사람들이 수필집을 읽는 이유는 교양을 쌓거나 인격을 수양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수필집을 손에 드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나는 중요한 목적이 있다. 수필집을 읽으면서 수필의 작법을 익히기 위함이다. 소재는 어느 것으로 할까. 구성은 어떻게 했는가. 주제 표현을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등 수필을 공부하기 위해서 글을 읽는다.
그 중에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내가 자주 드는 교과서다. 사실 이 책은 제법 오래전에 출간되었다. 문체도 투박하고, 담겨진 내용도 요즘 세태와 떨어져 있다. 그런데 좋은 글은 시대를 뛰어넘는다고 한 것처럼, 요즘 범람하는 수필과 다르다. 최근 쏟아지는 수필은 행세하는 사람들이 훈계하듯 말하기 때문에 읽다보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근원의 글은 청량한 솔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가 하면, 바위를 따라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읽혀진다.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선비들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던 기품이 배어나왔다. 근원 선생이 스스로 수필은 ‘다방면의 책을 읽고 인생으로서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글이고서야 수필다운 수필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글은 ‘마음속에 부글부글 괴고만 있는 울분을 어디 호소할 길이 없어 가다오다 등잔 밑에서, 혹은 친구들과 떠들고 이야기하던 끝에 공연히 붓대에 맡겨 한두 장씩 끄적거리다 보니’ 그것이 소위 자신의 수필이란 것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표현은 결국 근원이 수필관을 피력한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글에 대한 겸손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울분을 썼다고 하지만, 근원의 수필은 오랜 인생이 삭아서 우러나온 글이 대부분이다. 가다오다 만난 이야기여서 누구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의 표현이고, 낯설지 않은 느낌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글을 읽으면 글의 내용에 빠져든다. 작가가 형상화하는 상상의 세계에 몰입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근원수필’을 읽으면서 근원이 풍기는 사람 냄새에 이끌렸다. 작품들이 모두가 선생의 자화상 같이 그려진 것이라 사람 냄새가 물신 풍긴다. 비록 구차하고 고통스러운 생활에 찌들고 시달리는 경우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출렁인다.
두꺼비 연적 하나 사고,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중년부부의 삶의 풍경이다.(작품 '못생긴 두꺼비 연적'에서) 이발을 하러 가서도 이렇게 깎아 주, 저렇게 깎아 주 하는 의사 표시를 하지 못하는 주인공.(작품 '8년 된 조끼'에서)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이란 이발소에서 자신의 머리 깎는 의사를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근원 선생도 그런 남정네들의 모습과 다를 게 없는 사람이다.
근원은 제법 공부도 많이 한 화가이면서 뛰어난 문필가이었다. 친구들도 당시에는 꽤나 이름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근원의 수필 속에는 이런 명성들이 들어나 있지 않다. 문장이 간결하고 산뜻하다. 글쟁이에서 그림쟁이로 넘나드는 이야기 속에는 한 겨울 홀로 핀 매향 향기가 은은하게 번져온다. 만연체의 문장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옆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짧게 쓴다. 어떤 때는 숨소리까지 들려오는 것이 근원의 수필이다. 심하면 땀 냄새까지 그대로 풍겨온다.
피천득 선생이 수필은 청자연적이라는 절묘한 왕관을 씌웠는데, 근원의 수필은 청자연적이라는 명품 근처에도 못 간다. 시골 무지렁이 선비가 담뱃대를 때리면서 뱉어내는 투박한 이야기다. 시골뚝배기 같은 문체가 우아하고 전아한 세계에는 얼씬도 못한다.
이런 문학 세계는 근원의 욕심 없는 삶의 모습과 어울려 더욱 빛난다. 근원의 수필 '육장후기'는 근원 선생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아끼던 집(마당 앞에 7, 80년 묵은 늙은 감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고택, 작가는 이 집을 ‘노시산방’이라 했음)을 돈이 궁색해서 남(좋은 친구이며 같이 그림을 그리는 수화 김환기)에게 넘긴 이야기다. 보통 사람 같으면 후일 이 집값이 몇 곱절 뛰어올랐다는 소식을 접하면 잠이 안 올 것이다. 오히려 근원 선생은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라고 즐거워한다. 세속에 물든 사람들은 손해를 계산하고, 집을 판 자신의 과오를 들먹일 것이다. 그러나 근원은 “인생이란 세상에 태어날 때 털 올 하나 가지고 온 것이 없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털 올 하나 가지고 갈 수는 없다. 물욕(物慾)의 허망함이 이러하다”라며, 가난한 선비의 자세를 보인다.
스스로 ‘화도(畵道)를 걸어가는 것이 가장 행복되다(생각나는 화우들)’고 여기는 선생의 삶은 애초에 물질과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선생에게는 ‘현대는 괴물(발·跋)’이고, ‘세상은 턱없이 분주한 것(매화)’이다. 이런 세상에 맞서 사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저 속아서 사는 곳인가 보다’(안경)라고 정신의 자유로움을 획득하고 초월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근원이 돈벌이에 밝거나 능했다면 이런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가지는 것보다는 베푸는 것을 좋아했고, 친구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림에 빠져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그는 생각이 깨끗해서 글도 맑다.
그렇다. 글이란 삶이다. 특히 수필은 그렇다. 턱없이 바쁜 일상에서 매화 향기를 탐하는 어리석은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이 깊은 사유의 물줄기를 만들고 섬세한 언어를 배출하는 것이다. 간혹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쓴다고 모국어를 가시밭길로 내치는 것을 자주 보는데, 그들에게 근원의 깨끗한 마음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