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서면 서상리 양지편이란 마을입니다. 요즘처럼 밤이 길어지고 날이 추워지면 어머니는 오 촉짜리 백열등 아래 모시를 삼고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시거나 화투로 패를 만들며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런 날 아버지께 옛날이야기 해 달라고 조른 일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면 이야기 많이 하면 집이 가난해진다고 하면서도 성화에 못이기는 척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담 하나 사이에 있는 옆집의 동갑내기 친구까지 앉아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들었습니다. 무서운 이야기도 있었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 중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 빈대 절터 또는 장군터 이야기입니다. 이곳은 서면 서호리 산178-1의 망운산록에 있는 곳으로 절터라 하기도 하고 큰 대인이 살았던 집터라는 말도 있습니다. 대개 지금은 이곳을 ‘장군터’, ‘대장군지’ 혹은 ‘재앙구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시대적인 배경은 고려말에서 조선말까지로 생각됩니다. 이곳에는 팔척장신에 힘은 장사인 도술을 부리는 대인이 부인과 같이 살았습니다. 이 대인은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에 중국 황산에도 갔다 오고 일본에도 갔다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골짜기 아랫마을에 왜구들이 노략질을 일삼으며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대인은 이 소식을 듣고 왜구들이 올 날을 점을 쳐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족히 수백 명이 되는 왜구들이 배를 나누어 타고 뭍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대인은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 살고 싶으면 당장 물러가라.” 호령소리는 귀청이 찢어질 듯했습니다. 하지만, 왜구들은 자신의 수만 믿고 달아나질 않았습니다. 그 순간 대인은 도술로 몸을 더 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숲 속에 있는 전봇대보다 더 큰 나무를 뿌리째 뽑아 휘젓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양은 파리채로 파리를 때려잡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왜구의 태반은 죽고 겨우 살아남은 놈들은 모조리 배를 타고 그들의 소굴로 돌아가 이 무시무시한 사람의 소식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왜구들은 더 힘을 모아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조선 곳곳에 밀정을 보내어 지도를 그리게 했는데 이때 남해의 대인이 사는 곳도 탐지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군 지도부는 남해의 그 대인이 침략의 방해가 되니 닌자들을 보내서 없애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1591년 왜국은 일본 닌자들을 서상골의 장군터에 비밀리 잠입을 시켰습니다. 한편, 대인은 점을 쳐 보니 자신을 죽이려는 자객들이 오는 것을 미리 알아 몸을 피하기로 하였습니다.
대인이 사는 망운산 자락은 입추를 지나 상강을 넘어서자 단풍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인은 부인을 불러놓고 “부인!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대문으로 관이 하나만 나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관이 두 개가 나갈 것이요. 내 말을 꼭 명심하여야 하오. 그리고 며칠 후면 변복을 한 닌자들이 집을 찾아와서 내가 어디에 숨었는지 위협하며 죽이려 할 것이요. 그때 절대 내가 숨어 있는 곳을 말하지 마시오. 부인은 가르쳐 줘도 죽고 안 가르쳐 줘도 죽소. 그러나 난 어떤 칼날 앞에서도 죽지 않을 것이요. 단 나를 죽일 방법은 저 기둥에 매달려 있는 짚신에 침을 뱉어서 내 머리를 세 번 때리면 죽소.” “예, 나으리 이년의 목숨이 몇 번을 죽어도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다짐을 받고 대인은 몇 마디 중얼거리자 하얀 연기와 함께 지네로 변하여 주춧돌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변복한 닌자들이 담을 넘어들어와 대인이 있는 곳을 대라며 부인의 목에 칼을 겨누었습니다. 부인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습니다. 몇 번을 다그쳐도 입을 열지 않자 닌자들은 “이년이 피 맛을 봐야 알겠느냐.” 하며 단칼에 한쪽 어깨를 잘랐습니다. 부인은 물드는 선혈을 보며 살려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래 살고 싶으냐? 그렇다면 내 서방이 어디에 숨었는지 불어.” 부인은 몇 번의 위협과 고문, 살고 싶다는 욕망에 못 이겨 대인이 사랑채 가운데 기둥 주춧돌 밑에 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닌자들은 주춧돌 밑을 파헤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후 그곳에서는 베를 짤 때 사용하는 보디 짝 만한 지내가 더듬이를 세우고 노려보는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닌자들은 지네를 끄집어내 칼로 내리치기를 반복했지만 지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몇 번의 시도가 허사로 끝나자 지네를 죽이는 방도가 있을 것으로 알고 다시 부인의 다리 한쪽을 베어버렸습니다. 아내는 비명을 지르며 더는 버티기 어려운 사항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앞에 거의 실신한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대인의 당부는 메아리로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네 이년! 살고 싶지. 저 지네를 죽이는 방법만 알려주면 목숨만 살려주마.” 이 광경은 마당에 끄집어 낸 지내도 더듬이를 세우며 부인의 입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계속되는 닌자들의 고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될 즈음 “저 기둥에 걸린 짚신에 침을 뱉어 머리를 세 번 때리면 된다.”라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꿈쩍도 않고 곧추세웠던 지네의 더듬이가 소금물에 숨죽은 배춧잎처럼 축 처졌습니다. “그럼 진작 그럴 것이지. 에잇.” 닌자의 칼은 사정없이 허공에서 부인의 목을 스쳤습니다. 그리고 다른 닌자는 짚신에 침을 뱉어 지네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맑은 하늘에 번개와 천둥이 치며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계곡을 갈랐다고 합니다.
닌자들은 대인 부부의 시신을 짓이기고 유유히 이곳을 빠져나갔습니다. 후에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와서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는데 대인의 예언대로 관 두 개가 대문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시간을 더하여 사람의 입을 타면서 더해지며 일제의 강점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자 풍수에 능한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서 인물이 나올 만한 명당자리의 지세에 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한 술 더 떠 유명한 산의 정기가 시작되는 곳엔 쇠 봉을 박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본의 행각은 이곳 장군터도 피할 수가 없었다 합니다. 생존이 우선이라 내가 살려면 나라도 팔아먹어도 된다는 일본의 앞잡이들은 그 위치와 얽힌 이야기를 일러바쳤습니다. 그래서 장군터의 능선을 그리고 주문을 외며 쑥으로 불을 뜨고 마지막 붓으로 한 획을 긋자 장군터가 반으로 갈라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남해는 곳곳이 보물입니다. 그런 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산재해 있습니다. 이야기 대부분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그 입으로 전해 받을 대상이 줄어들고 없어지기 시작하는 지금에 보전할 길은 참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언뜻 어릴 적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라디오 방송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그 극작가는 우리나라 곳곳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채록하였다 합니다. 이곳 장군터의 이야기는 빈대 절터로 소개됐습니다.
지금 이곳은 아직 발굴이 덜 된 상태입니다. 이전에는 염소를 기르는 주인이 사는 움막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군터 주변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왓조각과 도자기 조각, 조선시대의 백자 조각도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무슨 연유가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직 역사적으로 고증할 증거는 없지만 새롭게 조명을 받아 보물섬의 새로운 명소로 다시 서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