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김훈의 소설을 만났다. 김훈의 소설은 비슷한 면이 있다. 역사소설도 소재만 달라질 뿐 민중의 삶을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소설 ‘흑산’도 마찬가지다. 민초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서캐처럼 천한 사람들의 모습이 전개된다. 문장이 짧은 것도 여전하다. 짧아서 서술자의 감정도 없다. 인물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도 없다. 오직 사실만 냉정하고 날카롭게 전달한다. 이는 ‘남한산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김훈의 소설에서 서사가 왜소한 것은 아니다. 그가 전개하는 역사적 서사는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다. 인간의 내면까지 담담하게 전하는 다큐멘터리 느낌이 있다.
당시 조선은 무기력했다. 세상도 무기력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왕과 조정은 권력을 잃었다. 외세가 밀려오고 있었지만 조선의 왕권은 대응할 능력도 사상도 없었다. 왕권을 추스르는 일만이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최대 관심사였다. 부실한 왕권의 틈을 이용해 관리들은 수탈과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부패한 왕권과 비루한 세도가들의 위세에 눌린 민심은 새로운 사상을 만났다. 천주교였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천주교를 역적의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왕조를 뒤엎으려는 ‘사학(邪學)’의 뿌리를 잘라버리라는 자교를 내렸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가혹했다. 온갖 고문과 형벌로 피비린내가 풍겼다. 부모와 임금을 부정하고 외세를 끌어 드린다는 명분에 많은 사람은 곤장을 맞고 죽어갔다. 당시 백성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왕권은 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그들의 목숨을 짓이겼다.
이 소설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를 신봉한 죄로 유배당한 조선후기의 문인 정약전과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 이야기다. 여기에 포도청 관원 박차돌, 그의 누이동생 박한녀, 마포나루의 새우젓 가게 강사녀, 상전의 집을 도망쳐 나온 아리, 남대문 밖 옹기장수 최가람 노인, 궁녀 출신 길갈녀, 북경에서 주교를 만나고 오다 체포된 역참 마부 마노리, 정약현과 황사영의 노비에서 면천된 김개동과 육손이 등 민초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가면서 흘러간다.
그들은 신분의 차별 없이 누구나 평등하고, 이웃이 서로 사랑하며, 현세의 고통스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줄줄이 잡혀갔고 형틀에 묶인 채 추궁 받으며 곤장을 맞고, 때로는 능지처참을 당하며 죽었다. 김훈이 주목한 것도 여기에 있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p. 387. 후기).
김훈은 당시 슬픔을 정 씨 가문과 황 씨의 이야기로 집약해서 기록했다.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의 정 씨 가문에는 네 형제가 있었다. 약현, 약전, 약종, 약용이다. 이곳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가까운 곳이었다.
마재 물가의 세거지에서 정약현은 장성한 남동생 약전, 약종, 약용과 그 권솔들을 거느리며 가부장의 위엄을 문중에 드리웠다. 그의 위엄은 조용했고 평화로워서 이슬비처럼 사람과 마을에 스몄다. 정약현의 울타리 안에서는 닭들이 맨 마당을 쪼아 모이를 다투지 않았고 개들도 사람을 공경해서 흙발로 뛰어오르거나 행인을 보고 짖어대지 않았다. 제삿날 여러 집안의 조카들이 모여서 놀아도 촌수가 분명하면서도 두루 스스럼없어서 모두 다 한집 아들딸처럼 보였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했다. 노복을 고함쳐 부르거나 꾸짖는 소리가 정약현의 집 울타리를 넘어온 적은 없었다(p. 63~64.).
당시 조선은 권력자들의 횡포가 세상을 비루하게 덮고 있었다. 그러나 정 씨 집안은 부패한 공기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밤톨 같은 백성에게도 공경의 예를 잃지 않는 깨끗한 집안이었다. 김훈은 이 집안의 내력을 맏형 정약현의 인품으로 설명을 더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정약현은 ‘풍속이나 범절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풍속과 범절을 해치지 않았다. 젊은 시절부터 그의 심신에는 노성(老成)한 사려와 처신이 배어 있었다. 정 씨 문중의 노인들은 젊은 정약현을 오히려 어렵게 여겨서, 장자(長子)의 핏줄은 따로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p. 63.). 정약현은 책을 읽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고, 붓을 들어서 글을 쓰는 일을 되도록 삼갔다. 정약현은 말을 많이 해서 남을 가르치지 않았고, 스스로 알게 되는 자득의 길을 인도했고, 인도에 따라오지 못하는 후학들은 거두지 않았다(p. 68.).
정 씨 집안의 형제들은 조선 후기 소용돌이 역사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들은 천주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중에 셋째 정약종은 골수 천주교인이었다. 정약종은 죽음으로 맞서면서 끝까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다. 약종이 사학의 죄를 끌어안고 먼저 죽으면서 나머지 형제가 무사했다.
이 소설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황사영도 정 씨 집안의 사람이다. 그는 16세에 진사에 급제했다. 정조는 그를 만나는 순간 20세에 다시 부르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하지만 정조는 소식도 없이 세상을 떴다. 그는 정약현의 딸 명련과 인연을 맺으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강물 위에서 황사영은 숨을 깊이 들이쉬어 강의 기운을 몸 안으로 끌어넣었다. 강은 황사영의 몸속 깊이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잇닿아 흐르면서 낡은 시간과 헤어지고, 헤어지면서 또 다가오는 시간을 맞아들이는 새로움이었다(pp. 67~68.).
황사영은 처숙부가 말하는 신이란 강물과 같아서 현재를 모두 거느리고 흘러서 미래의 시간으로 생성되는 지속성으로 여겼다. 그때 황사영은 글이나 말을 통하지 않고 사물을 자신의 마음으로 직접 이해했고, 몸으로 받았다(p. 70.).
황사영은 촉망받는 젊은 지식인으로 마음만 먹으면 벼슬길에 올라 입신출세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사영은 순탄대로를 거부하고 세상의 부조리함에 맞서는 쪽에 선다.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박해와 시련의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으며 순교자의 길에 오른다. 그는 배론의 토굴 속에서 일만 삼천삼백여 자에 이르는 ‘황사영백서’를 남긴다. 주베아 신부에게 조선 천주교의 박해 실상을 알리고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지만 그의 체포와 함께 좌절되고 만다.
소설은 정약전에 집중한다. 세상의 저쪽으로 더 가까이 가고자 했던 정약종과 달리 세상의 이쪽에서 있었던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득히 펼쳐진 수평선 너머에서 뭍을 향한 그리움을 담고 살았다. 정약전은 암흑의 유배지 섬에서 살았지만,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은 듯 보인다. 소설의 말미에 창대에게,
나는 흑산(黑山)을 자산(玆山)으로 바꾸어 살려 한다.(중략)
같은 뜻일 터인데…….(중략)
같지 않다.(중략)
흑은 무섭다. 흑산은 여기가 유배지라는 걸 끊임없이 깨우친다. 자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이 바다의 물고기는 모두 자산의 물고기다. 나는 그렇게 여긴다(pp. 337~338).
‘흑산’은 ‘검은 섬’이다. 삶도 희망도 없다. 정약전이 흑산을 자산으로 바꾸어 부르겠다는 말 속에는 희망을 기다리는 뜻이 있다. 그것은 유배에서 풀려나기를 바라는 염원이라고 느껴진다. 그곳에서 물고기의 생태를 관찰한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집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흔히 오늘날 역사에서 정 씨 가문의 네 형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앞서는 사람은 언제나 막내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책으로 엮어낸 대학자이다. 하지만 김훈은 ‘흑산’으로 간 정약전의 일생에 초점을 맞췄다. 이유는 간단하다. 약전이 어둠의 땅 흑산에서 희망을 일궜다는 것이다. 민중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배반의 땅에서 태어났지만, 구원의 삶을 얻기 위해 무릎 꿇지 않고 꼿꼿하게 생명력을 이어갔다. 그들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다. 순교와 피맺힌 삶이 죽어간다. 김훈은 무거운 역사의 성찰을 통해 오늘을 사는 민중의 화법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