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4일 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원 45명은 제207차 우리문화유산답사기행으로 경남 남해 팔백리 첫번째 기행지 호구산 용문사를 찾았다. 용문사에 들어서니 주지 성전스님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용문사
7세기경부터 신라 불교는 자장, 원측 등 고승들에 의해 불교가 왕성하게 퍼져 나갔다. 남해는 신라 10승의 한사람인 윈효대사가 남해 보광산에 보광사를 짓고 최초로 포교하였다고 전한다. 구전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조에 남해의 영산인 보광산(현, 금산)에 보광사(普光寺)를 세우고 그 이후(670 - 700년대이후) 망운산 남쪽 인 서면 연죽리에 연죽사를 세웠다. 이 연죽사는 신종5년(1202)에 진각국사 혜심에 의해 고현면 대곡리 망운산 아래로 이건되어 영장사(靈藏寺)라 하였다. 이 영장사가 임진왜란때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100년 후인 인조15년(1637)에 승 계원이 현 위치에 이건 중수하여 화방사라 하였다.

용문사는 보광사에 속했던 암자였고 보광사가 없어지면서 용문사에 합사하였다고 전하며, 보리암 역시 암자였다고 전하고 있다.남해에는 보리암과 용문사, 화방사를 비롯하여 고현면의 망덕사, 관음사, 선원사, 계사, 빈대절터. 서면의 둥구나무절, 빈대절터. 이동면의 와가리절. 남면의 운암사. 삼동면의 난화방절, 학서나무절, 두룸박골절, 고은사. 창선면의 큰골절, 큰절, 성명암 등 많은 절이 있어 예로부터 찬란한 불교 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지금은 그 절들이 모두 없어지고 절터들만 황량하게 남아 있다. 용문사는 남해군 이동면 용소마을 뒤산 호구산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게 큰 가람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아담하면서 사찰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신라 고찰이다.

용문사의 유래는 원효대사가 금산을 찾아와 보광사를 짓고 산 이름도 보광사라 하였다. 그리고 현 용문사에 첨성각을 세웠는데 유교가 성하던 현종원년(1660)에 남해현의 유림이 절의 입구가 향교와 면대한다하여 다른 데로 옮기라 하므로 백월당 대사가 남쪽에 있는 용소 위에 터를 정하고 용문이라 정한 다음 사찰명을 용문사라 하였다.

한문으로 현판되어 있는 "龍門寺 建記"를 해석하여 보자
『용문사는 옛 보광사라 금산 보광동에 소재하였으니 지금의 동쪽산 기슭이 곧 그 곳이다. 현종조 경자년(1660)에 현내의 유관(儒冠)들이 절의 문과 향교가 상대한다하여 이건하라 하므로 사찰을 옮기니 이 절에 백월당(白月堂) 대사가 옛터(보광사)에서 나와 호구산 남쪽에 이건하고 용문사라 이름하니 동문에 용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 영조47년(1771)에 삭탈관직 당하고 남해로 유배온 유의양(柳義養)이는 남해문견록을 기행문체로 저술하였다. 용문사와 관련되는 부분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ㅡㅡㅡㅡ금산 서쪽 편을 바라보니, 용문사가 있으니, 큰 절이었다. 나는 보통 때에는 절 구경을 무미히 여겨 왔었으나, 용문사 도국이 매우 좋아 보이기에, 잠깐 절 구경을 하려노라. 하고, 그리로 가서 산세와 골짜기의 경치 좋은 곳을 살펴보니, 사면으로 바위 벼랑이 높고 험하여 완연한 성첩이 이루어져 한 곳도 허한 데가 없고, 그 속에 큰 샘까지 있어서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아니합니다.
하고, 골짜기 어구에 십여간 너비나 터져 있으니, 짐짓 산성을 만들음직한 땅이었다. 산성을 만들려 하여도 산 위에는 저절로 생긴 성첩이 있고, 수구 십여간을 잠깐 막아 쌓았으면, 옛 사람이 이른바, "한 사람이 문을 막았으면 일만 사람이 열지 못할 땅"이었다. 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 곡식을 저축하여 두었다가 완급에 충무공 같은 이를 맡겨 두었으면, 물에 나가서 싸우고 성에 들어와 지키면 해방 형편이 과연 좋아 뵈되, 근래 사람들이 이런 데에 염려함이 적으니, 이를 보았느냐, 일컬어 말할 곳이 없고, 실제로 관련이 없어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허술히 넘기는 선비의 말을 누가 채용하리요?ㅡㅡ』

사계절 어느 때 가릴 것 없이 찾아가도 사찰 주위의 자연 풍경과 사찰이 반겨 주지만, 특히 여름철이면 호구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물을 따라 오르면 입구에서 목장승이 첫 번째로 반겨준다. 재잘대는 물소리를 따라 걸어가노라면 일주문까지는 단숨에 오를 수 있다.
남해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용문사! 찾는 이들은 날이 갈수록 길을 비좁게 한다.

●[생명의 窓] 나를 버리는 즐거움/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매화가 피었다. 겨우내 없던 매화가 봄이 오는 기척이 오자 꽃이 되어 조용히 얼굴을 내밀었다. 이 꽃은 어디서 온 것일까. 꽃을 보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주인이 종에게 겨울날 복사꽃이 보고 싶다고 꽃을 찾아오라고 했다. 종은 복사꽃을 찾아 겨울 들녘을 열심히 헤맸지만 꽃을 찾지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종을 향해 주인은 꾸짖듯이 나무랐다. “이놈아. 봄이 되면 꽃이 있지 않으냐. 이 겨울에도 어딘가에 꽃이 있으니까 봄이면 꽃이 있는 것이지, 없던 꽃이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이냐.” 주인의 말이 그럴듯하다. 어리숙한 종은 주인의 말에 대답도 못 하고 그냥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꽃은 과연 어디에 있다가 온 것인가. 주인도, 종도 모두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만 천착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꽃이 없는 겨울에도 꽃은 어딘가에 피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겨울이면 꽃이 사라지고 봄이 오면 꽃이 핀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연이고 이것이 존재의 참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도 ‘내’가 있다고 굳게 믿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인연을 따라 왔다가 인연을 따라 사라져갈 뿐이다. 꽃이 인연을 따라 피어나듯 우리도 인연을 따라 존재하는 꽃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꽃이 한 철을 피면 또 지듯이 우리 역시 한 생을 살면 생의 시간을 떠나야 한다.
인연을 따라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 그래서 ‘나’는 있으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왜곡이다. 이 왜곡된 삶은 언제나 고통일 뿐이다. 존재란 인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자기가 있다는 견해를 벗어날 수 있다. 이때 존재는 고통으로부터도 벗어난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만나는 모든 것들과 부딪치지만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만나는 모든 존재와 사랑과 자비의 관계로 함께할 수가 있다.
스즈키 선사는 그의 책 ‘선심 초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초심은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나는 무엇을 얻었다’는 생각이 없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우리의 광대한 마음을 제한한다. 무엇을 성취했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 자기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 그것이 진정으로 시작하는 사람이다.” 스즈키 선사는 초심을 통해 존재의 참모습을 말하고 있다. ‘내’가 실재한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만이 초심의 사람이고 광대한 마음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들 존재의 크기는 얼마일까? 그것은 생각의 크기이기도 하다. 지금 이 육신이 자신의 실재라고 믿고 있다면 그의 존재의 크기는 몸의 크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자신이 인연에 따라 존재할 뿐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존재의 크기는 한정할 수 없다. 그는 스즈키 선사의 말처럼 광대한 마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육신으로 상징되는 존재에 갇혀 사는 사람은 소유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그런 삶에는 기쁨이 없다. 소유의 열망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기 때문이다. 소유란 사실 잃음의 전제가 아닌가. 소유가 없다면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소유하되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있다면 그는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된다. 이것은 ‘내’가 인연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나를 버리는 일은 즐거움이다. 나를 버리면 우주의 숨결을 느끼게 되고 날마다 좋은 날인 삶의 기쁨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좌절은 쉽게 찾아오고 근심에 날을 새우고는 한다. 나를 버린 사람만이 절망에서 희망을 보고 미움에서 사랑을 보고 번뇌에서 열반의 즐거움을 만날 수 있다. 매화는 어딘가에 있다가 온 것이 아니다. 인연을 따라 사라졌다가 인연을 따라 왔을 뿐이다. 매화가 있으나 매화는 없고 인연만이 있을 뿐이다. 매화는 자신을 매화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만이 매화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매화의 향기는 존재의 향기가 아니라 인연의 향기임을 이 봄에 좀 깨달아 보는 것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