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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팩션의 승리, '최종병기 활'

지난해 8월 10일 개봉한 ‘최종병기 활’(감독 김한민)은 747만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여 2011 한국영화 흥행 1위로 ‘등극’한 영화이다. 문학이 그렇듯 영화 역시 ‘명작’은 오래 가는 법이다. 특히 영화의 경우 대박을 터뜨리면 CD 출시 후 한동안 그 열기가 수그러들지 않는 특징이 있다.

사실 ‘최종병기 활’은 지난 여름대작 중 가장 늦게 개봉된 영화이다. ‘7광구’・‘고지전’・‘퀵’ 등 100억 원 이상을 쏟아 부은 대작의 위세에 눌려 개봉 날짜를 정하지 못하는 등 기를 펴지 못했다. 이변은 뚜껑을 열면서 시작됐다. 예컨대 개봉 8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함으로써 2006년 ‘왕의 남자’가 세웠던 9일 만이라는 최단 기간 기록을 깼다. 당연히 ‘7광구’・‘고지전’・‘퀵’은 ‘최종병기 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90억 원을 들인 ‘최종병기 활’이 500만 관객을 돌파한 것은 개봉 26일 만의 일이다. ‘퀵’과 ‘고지전’이 겨우 300만 명을 간신히 넘기거나 못 미쳤고, ‘7광구’가 손익분기점조차 넘기지 못한 223만 명의 초라한 성적으로 체면을 구길 즈음 ‘최종병기 활’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그 기세는 추석 대목으로 까지 이어졌다. 개봉 35일 만에 600만 명을 동원한 ‘써니’보다 흥행속도가 빠르더니, 결국 일을 내버린 것이다.

‘최종병기 활’의 2011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 기록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일단 ‘극락도 살인사건’(2077), ‘핸드폰’(2009)을 연출했으니 신인은 아니지만, 김한민 감독이 무명이었기 때문이다. 무명 감독의 흥행대박이라? 그쯤 되면 언론이 가만둘 리 없다. 활을 소재로 한 이유에 대해 김 감독은 “활도 잘 쏘고 각종 국제대회에 나가면 항상 금메달을 따는 한국에서 왜 활을 주제로 한 영화가 나오지 않는지 의아했다”(서울신문, 2011. 8. 23)고 말한다.

김 감독의 그 의아스러움은, 이를테면 유니크한 소재를 견인한 원동력인 셈이다. 사극 등 활과 화살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어 왔지만, 그것에 방점을 찍어 천착한 작품은 ‘최종병기 활’이 거의 처음이다. 말할 나위 없이 대박영화의 제1의적 요건이라 할 참신한 소재이다. 그러고 보면 관객들은 재미있고 괜찮은 영화를 귀신같이 알아보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

금방 ‘재미있고 괜찮은 영화’라고 했는데, ‘최종병기 활’은 결코 재미난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저 ‘삼전도의 비극’이라는, 치욕의 역사로 남게된 병자호란을 시대배경으로 한다. 무능한 조선 조정은 ‘오랑캐’인 청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죽어나는 건 백성이다. 50만 명이 청에 끌려갔다는 사실(史實)에 기초한 듯 보이지만, 오라비 남이(박해일)의 누이 자인(문채원) 구출작전은 픽션으로 보인다. 또 조선 조정의 포로 송환 노력이 없었던 건 팩트이지만, 자인과 남편 서군(김무열)의 귀환은 허구이다. 이른바 팩션이다.

팩션의 승리는, 그러나 단순히 그 자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빚어내느냐이다. 그 빚어냄이 같은 역사를 소재로 하더라도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는 영화가 되게 하는 열쇠라 할 수 있다. 우선 긴박감 넘치는 첫 화면이 관객의 시선을 끈다. 인조반정의 한 단면을 묘사한 쫓고 쫓기는 위기감과 사나운 개까지 풀어 사실감을 더하는 등 서두의 중요성을 잘 아는 감독의 역량은 시종 균형을 잃지 않는다.

기생집에서의 검무, 숲 속 추격신, 절벽 뛰어넘기와 기어오르기 등이 빠른 카메라 워크로 숨 가쁘게 펼쳐지는 등 2시간 남짓한 상영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감정을 드러내는 대목에서는 TV드라마처럼 늘어지는 부분이 있어 아쉽다”(세계일보, 2011.8.5)는 신문 리뷰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 자인과 남이, 자인의 혼례 등 감정을 드러내는 대목 역시 빠른 속도감의 화면 전개를 다소 완충시키는 순기능적 장치들로 읽힌다.

어쨌든 그런 빚어냄은 국내 최초로 사용되었다는 고속카메라 ‘팬텀 플렉스’ 덕분이다. 3D영화처럼 다가오는 활시위가 당겨져 휙 날아가는 화살이라든가 원빈 주연의 ‘아저씨’(2010)에서 보던 추격신 장면들이 그렇다. 가히 ‘추격영화(chase film)’라 할만하다. 김 감독은 앞의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촬영감독의 역작이다”며 공을 돌리기도 했지만, 한국영화 기술의 진일보함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또 하나의 남다른 이유이다. 보는 즐거움이 아연 배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에서 재미난 영화는 아니라고 말했는데, 이 대목만 보면 틀린 지적이다. 또한 재미 없으면 관객이 들지 않는 속성과도 거리가 있는 얘기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답은 치욕의 역사를 재미삼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종병기 활’은 민족적일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문화에 있어 국수주의자가 되어도 좋다는 필자의 편견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물론 관객, 특히 흥행성적을 주도하는 10,20대 젊은 층은 영화에서 민족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골치 아프다는 것이다. 마구 때리고 부수는, 그리하여 남는 것이나 건질 게 거의 없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오랜 세월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최종병기 활’을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재미난 영화로만 보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압축된 전쟁 상황은 감독의 의도인 듯싶은데, 오히려 그것이 더 상흔을 남긴다. 가령 아군과 접전 없이 무혈입성하다시피하는 자인의 결혼식장 난입과 마을 백성들 나포 장면 등이 그렇다. 전쟁이 기본적으로 끔찍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것이 더욱 잔인하고 치사하게 보이는 것은 군인간 전투가 아니어서다. 이를테면 전쟁상황 압축에도 불구하고 그 처절함
은 오히려 극대화되어 있는 셈이다. 

“너희 왕처럼 기어와봐라” 따위 대사가 주는 치욕의 역사 환기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메시지를 놓친 채 숲 속 추격신, 절벽 뛰어 건너기 같은 기술적 현란함의 재미에만 빠져드는 건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다. 민족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은, 그러나 애국 따위와는 관련이 없다. 남이의 자인 구출이 나라 구하기와 아무 관련없이 오로지 피붙이에 대한 원초적 끌림 때문이니 말이다.

아쉬운 점은 따로 있다. 초반부 쥬신타(류승룡)의 공격을 받은 남이가 살아 돌아오는데, 그 과정이 너무 엉성하거나 싱겁다. 쥬신타가 죽은 것으로 생각한 만큼 그것에 필적할 살아남는 과정의 절실함이 구체적으로 그려져야 했다. 위기에 처한 남이를 별안간 호랑이가 나타나 구해주는 것도 긴박감이란 전반적 균제미를 단번에 깨뜨려 황당하기까지 한 대목이다.

자인의 오라비(남이)에 대한 반말투 대사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역적으로 몰린 무반의 명문가 자녀들이기에 그렇다. ‘어서 어서’라는 우리말 대사가 자막으로 뜬 것이나 “한양 집에 가서 근사하게 꼬슬(꽃을→꼬츨) 심고” 따위 틀린 발음도 옥에 티랄까 매끄럽지 못해 아쉽다. 그럴망정 명대사 하나 기억해두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자신도 죽지만, 최후의 승부에서 쥬신타를 쓰러뜨린 남이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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