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동에 두 번째 간 것은 교지에 실을 ‘특집-문학의 향기’를 위해서였다. 마침 13년 만에 자가용을 바꾼 직후였다. 방학 중인 8월, 신차 에어컨은 빵빵했다. 드디어 3명의 학생기자를 태우고 가는 데만 4시간도 더 걸리는 먼 길을 나섰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녀석들은 자는 데 여념이 없다. 가는 코스도 취재의 일부라 자선 안된다고 그렇게 일렀건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점심식사차 들른 칠곡 휴게소에 도착해서야 학생기자들은 잠의 늪에서 겨우 빠져 나왔다.
드디어 도착한 이육사 문학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있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는 등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육사의 업적을 기념, 추모하는 곳이다. 육사 탄생 100주년인 2004년 문을 열었다.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 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2300평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의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육사의 흉상과 육필 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 혁명 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 생활 모습 등도 재현해 놓았다. 2층은 낙동강이 굽이져 흐르는 원천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영상실과 세미나실, 전망대 등이 갖춰져 있다.
학생 기자들이 취재하는 동안 나 역시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경내를 둘러 보았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다. 팜플렛 등 자료에 따르면 육사는 1904년 5월 15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진성이씨 이가호(퇴계 이황 13대손)와 항일 의병장 허형의 딸 허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9개월간 교편을 잡았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귀국하여 대구에서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문화 활동을 벌였다.
육사는 1923년부터 중국 북경 등지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해 조직 활동을 펼쳤다. 1927년 여름에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육사뿐 아니라 원기, 원일, 원조 등 4형제가 함께 검거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다. MBC TV 특집드라마에서 방송된, 육사가 처음 쓴 ‘죽일 육(戮)’을 아내가 ‘땅 육(陸)’으로 고치게 했음이 흥미롭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첫 시 ‘말’을 발표했다. 이후 총 39편의 시를 남겼다. 이듬해 북경과 남경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했다. 6개월간 교양과목으로 정치학·사회학·철학 등을 배웠다. 그 외 군사학·통신법·폭탄제조법·피신법·암살법 등을 교육받았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육사는 직접적인 실력 투쟁의 길을 얼마간 완화했다. 대신 이 시기부터 육사는 시·소설·수필·평론 등 문학의 전 장르에 걸친 작품 활동에 들어갔다. 고교 문학(하) 교과서(교학사)에 실려 있는 ‘절정’을 비롯 ‘광야’, ‘청포도’ 등이 널리 애송되는 시이다. 그 중 ‘절정’을 잠깐 감상해보자.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진갠가 보다.
육사는 1931년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옮긴 이후 사회 비평을 병행함으로써 대중을 계몽, 각성시키려고 노력했다. 1943년엔 국내의 항일 저항조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국내 무기 반입을 시도했다. 같은 해 7월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검거되어 생의 마지막 길을 떠났다. 1944년 1월 16일 북경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한 것이다.
학생기자들에게 그런 내용들을 열심히 적게한 후 문학관 뒤로 나가보니 이육사의 생가가 있다. 그냥 일반 초가집이다. 시비와 나란히 한 이육사 동상 옆에서 학생기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다시 광복의 달 8월이다. 이 자유로움의 향기가 그들의 순국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니 새삼 경외감이 솟구쳐오른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달리한 이육사!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가 몹시 그리운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