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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얼마나 아세요?

자칭 수원을 사랑한다는 수원토박이다. 수원에서 태어나 50여년을 고향 수원을 지키며 수원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 직업이 교원인지라 주로 학교 교육분야에서 학생들에게 애향심을 불러일으키는 교육을 해왔다. 애향심이 발전하여 애국심이 된다는 신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 지도자로서 ‘서호사랑 봉사학습 체험교실’을 2005년부터 지도해 왔다.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7년 째 이어가고 있다. 그 덕분일까? 서호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조금 더 안다. 학생들을 지도하려니까 미리 교재연구를 하고 지도자료를 준비하여 지도에 임한 까닭이다. 그래서 제법 알게 된 것이다.


필자가 체험교실에서 지도하는 내용은 서호의 축조연대, 축만제의 뜻, 정조가 서호 저수지를 만든 이유, 농자천하지대본의 뜻, 정조의 애민정신, 항미정, 제방에 있는 소나무의 나이 계산하기, 농촌진흥청에서 하는 일, 수원이 농업과학의 메카인 이유, 농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여기산과 우장춘 박사, 수원팔경, 서호의 옛 모습, 서호에만 살았던 민물고기 이름, 서호납줄갱이가 없어진 까닭, 수질오염의 원인과 대책, 우리가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수질오염 예방법, 나라꽃 무궁화 등이다.

그런데 필자에게 수원 화성과 정조대왕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하면 왠지 자신이 없다. 밑천이 딸린다. 배경지식이 부족하다. 누구나 알 수 있는 통상적인 이야기 몇 마디하고는 끝이다. 수원을 사랑한다는 거짓말이 곧 들통이 난다. 이게 수원에서 오십 년 이상을 산 수원토박이의 현주소다. 자존심이 상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얼마 전 화성행궁을 돌아 본 일이 있었다. 신풍루 앞에서 무예24기 시범을 보았다. 그 앞에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다. 우측에 있는 느티나무 안내판을 보니 이 세 그루가 보통나무가 아니다. 역사에 대한 무지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정조가 왜 이 세 그루의 나무를 품(品) 자 모양으로 심었을까?

조선시대 궁궐 앞에는 품(品)자형 구도로 나무를 심었다. 이 세 나무들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3정승을 상징한다. 나무 식재는 ‘3공이 모여 어진 정치를 하라’는 뜻이라고. 이런 깊은 뜻을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지금 이 세 그루의 나무는 전국 궁궐이나 행궁 앞에 유일무이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우리 학교 도서실에 있는 ‘우리가 몰랐던 정조, 화성 이야기’(김진국, 김준혁 저)를 펼쳐든다. 이 느티나무는 행궁 앞을 탈권위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민본주의, 제도개혁, 탈권위의 상징물이며 신풍루 앞은 왕과 백성이 하나가 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실제 1795년 정조는 화성행차 6일째인 윤 2월 14일 새벽 신풍루 앞에서 백성들에게 직접 쌀을 나누어 주었다. 그 때 혜택 받은 백성들이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 539명과 서민 4천 813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나누워 준 쌀만 368석에 달했다고 한다. 그 때만 해도 왕이 지시를 통해 쌀을 하달하는 일은 있어도 직접 참석해 곡식을 나누어 주는 일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다. 정조의 애민정신의 발현이다.

화성 축성에 있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 화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혜로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점. 정조는 축성을 시작하는 1794년 1월 전국의 모든 고을 수령에게 지역의 성곽에 대한 설계도를 수집한다. 전국 백성의 지혜를 모으려는 것이다. 전국 성곽의 설계도를 통해 장단점을 분석, 그 결과를 가지고 화성을 설계하였던 것이다.

또한 정조는 축성에 동원된 기술자들의 기술과 지혜를 존중하여 화성 4대문에 있는 공사실명판에 감독관인 고위관리들과 기술자인 편수들의 이름을 넣었다는 사실. 이름을 걸고 책임 시공을 하니 부실공사가 생길 수 없다. 200여 년 전부터 공사실명제를 시행했으니 이게 바로 실학정신 아니던가!

그 뿐 아니다. 정조는 성곽을 쌓는 추운 겨울, 기술자와 허드렛일을 하는 모든 인부들에게 털모자와 솜옷을 하사한다. 당시만 해도 털모자나 귀마개는 정3품 당상관 이상만이 착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솜옷도 당시 귀족들의 전유물이요 서민들은 형편이 어려워 여름에 입었던 삼베옷을 그대로 입었다고 전해진다.


털모자와 솜옷을 하사 받은 백성들, 어떠한 자세로 축성에 임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결국 화성은 정조의 위민정신이 이심전심으로 백성에 와 닿아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탄생한 것이다. 정조의 백성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화성을 꽃피운 것이다.

흔히들 수원 사람들을 외부에서는 깍쟁이라고 부른다. 사전적 의미로는 ‘남에게 인색하고 자기 이익에 밝은 사람들’ 이라는데 과연 그럴까? 수원 깍쟁이의 유래를 살펴보면 자랑스런 수원시민이다. 정조의 상업 활성화 정책으로 성내엔 부자 상인들의 시전이 생기고 장사를 하려는 일반 상인들의 작은 상가가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어떻게 일했을까? 새벽부터 문을 열어 밤늦도록 열심히 일을 했고 그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을 것이다. 이런 상가들을 ‘가가’라고 불렀고 여기서 일하는 상인들을 ‘가가쟁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깍쟁이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깍쟁이는 수원을 발전시킨 부지런하고 근면한 사람을 뜻한다. 수원사람을 비하하려고 깍쟁이라는 말을 일부러 쓰는 사람들은 수원 사람에 대한 시샘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우리들은 오히려 깍쟁이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합리적인 성실성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화성의 백미는 화홍문이다. 수원북중학교 재학시절, 이 곳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 여름철 수영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화홍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화홍문의 기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유산이라는 것밖에 모른다.

다행이 전문가가 자세히 정리해 놓았다. 화홍문은 버드내로 나누어진 성곽 안쪽 마을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 본래의 기능인 수문 역할, 그 위에 설치된 누각은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는 휴식 공간, 성곽 본연의 임무인 방어시설 역할이다.


그러나 화홍문이 정말 화홍문인 이유는 물줄기가 흘러가는 바닥돌들. 국왕이 친림하는 곳에만 깔려있다는 넓은 돌인 박석.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에 있는 돌들이 깔려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최상의 건물 앞에만 설치되는 박석이 화홍문에 있는 것이다. 또한 일곱 개의 수문을 통해 쏟아지는 장쾌한 물줄기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우리 학교 도서실에 있는 정조와 화성에 관한 책 네 권을 읽어 이 정도의 교양지식을 갖게 되었다. 이제 외지에서 누가 화성을 안내해 달라고 하면 그래도 조금은 자신감을 갖고 할 수 있겠다.

화성행궁에 들어서면 신풍루 앞 느티나무에서 정조가 품(品)자 형으로 나무를 심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정조의 민본정신과 애민정신을 이야기 하리라. 팔달산의 화성에 올라서는 10년의 축성기간이 3년으로 단축된 이유 중 하나가 정조의 사랑임을 말하리라. 정조가 기술자와 일군들에게 하사한 털모자와 솜옷 이야기를 하면서 정조의 평등정신을 설명하리라.

수원 깍쟁이의 어원도 설명해 주면서 유상의 근면 성실한 삶을 이야기 하겠다. 화홍문에서는 화홍문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박석 이야기는 빼놓지 않겠다. 덧붙여 1906년 대한제국 화폐에 화홍문의 도안이 들어간 이유도 설명하리라. 일제시대인 1922년 대홍수로 소실된 화홍문의 석축과 누각을 10년 만에 시민의 힘으로 복원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사례도 이야기하리라. 문화유산 복원은 바로 민족정기의 부활이었던 것이다. 정조의 위대한 정신을 그 후예들이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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