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기억 속 어딘가에 있을 그녀, 당편이
이문열 작가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을 세상에 내 놓았고, 쓰는 족족 이슈를 불러 일으키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너무도 현학적인 그의 작품 스타일에 반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주는 매력은 크다 못해 사뭇 치명적으로까지 다가온다.
십년도 훨씬 전에 읽게 된 그의 소설,『사람의 아들』이 주는 충격은 정말이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1979년 "오늘의 작가상"의 영예를 안겨 준 그의 작품을 보면서, 과연 이문열은 어떤 정신 세계를 갖고 있을까 궁금했었다.
예수와 아하스페르츠가 만난 것은 다섯 번이나 되는데 그 첫 번째는 광야에서였다. 아하스 페르츠는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예수에게 세 가지 시험을 한다. 허약한 육체와 영혼으로 고통받고 방황하는 인간을 위해 빵과 기적과 권세를 요청하였으나 예수는 그 요청을 거부하고 아하스 페르츠를 사탄으로 규정하며 물리친다. 이에 아하스 페르츠는 그가 약속한 구원의 허구성을 보고 그를 거부하기로 결심한다.
그 뒤 만남을 거듭하면서 아하스 페르츠는 한편으로는 예수를 설득하고 한편으로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진행시킨다. 그리고 예수가 인간적인 구원을 기어이 거부하자 로마의 힘을 빌려 그를 처형하고 만다. 하지만 예수의 재림이 걱정되어 죽지 못하고 끊임없이 세상을 배회하며 감시하는 역을 맡게 된다.
- 출처 :
http://www.yes24.com/24/goods/1392485?scode=032&OzSrank=1, 책소개 中에서
수많은 기독교들인에게 적지 않은 반감과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최고의 작품, 어느새 이 시대의 고전의 반열에 능히 오를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 작품을 읽은 지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읽은 이번 작품,『아가』역시 그의 역량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가』는 지금은 쉽게 볼 수 없지만 옛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어느 반푼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골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란 이들이 오랜만에 동창회 모임을 가지면서 제기한 물음으로 긴 이야기는 시작된다.
「맞다, 당편이는 참 어예 됐노?」 (11쪽)
어린 시절 그들의 입담에 끝없이 오르내리던 당편이, 나중에 각자가 성장해서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게 되었을 때에도 고향 한 자락을 지키며 꿋꿋이 살아가던 당편이를 추억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엄밀히 따지면 여기의 모든 이야기는 한 인물에 대한 과거 회상의 이야기인 셈이다.
당편이는, 어느날 잠에서 깨어보니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더라는 카프카의『변신』속의 그레고르 잠자처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기관이나 정신을 지니지 않은 채로 홀연히 그 마을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지주였던 녹동 어른 댁의 대문간에 버려진 채로 발견된다. 다행스럽게도 인심이 후한 녹동 어른은 당편이를 거둬 들이게 된다.
「어예기는 어예? 하마 내 품에 날아든 새를. 당편이는 우리 식구라. 그러이 여러 소리 말고 낑가조라(끼워주라). 너들하고 한 쌈에 여주라(넣어주라), 이 말이따. 타고난 게 들쭉날쭉해도 이래저래 빈줄랴(맞춰) 어울래 사는 게 사람이라.」 (28쪽)
해방이라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굴레를 지나오면서 그렇게 모자라고 반편이었던 그녀에게 일어났던 갖가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작품 전반에 걸쳐 소개되고 있다. 자세한 줄거리는 혹시라도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생략하고, 난 여기서 당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려 한다.
당편이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길을 가다가도 만나면 손가락질하거나 간혹 비웃기도 할 것이고 마주치거나 혹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이다. 사람의 구실이라고는 어느 것 하나 할 수 없었던, 심지어는 걸음걸이조차도 '기우뚱 철퍼덕'이라고 묘사될 만큼, 정갈하게 차려 놓고 때론 맛을 음미하며 들어야 하는 식사도 불편한 수족 이동 반경으로 인해 온갖 음식들을 마구 버무린 '당편이 밥죽'으로 때워야 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조금도 비관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작품 속 곳곳에서 당편이의 존재는 독특하다 못해 빛나기까지 했다.
높임말이라고는 쓸 줄 몰랐던 그녀, 나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그녀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하대했던 그녀, 하지만 그런 막 되어 먹은 그녀를 동네 사람들은 따뜻이 감싸주었다. 그 넉넉한 인심이 우리 삶의 전반을 지배했었던 한 시대가 있었다는 걸 꼭 기억하고 싶었다. 물질보다도 명예보다도 사람이 우선이었던 시절, 그땐 다소 평균적인 사람에 못 미치는 이가 있더라도 녹동어른을 비롯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러했듯, 다 거둬 입히고 먹이고 했으리라. 그들의 원초적인 미약함과 모자람에 동조하진 못했을지라도 기꺼이 그들의 삶의 한 편에 끼워 넣어 줬을 것이다. '반편이'였지만 함께 살아갈 때는 그녀 역시 '온편이'로 인식될 그런 세상이 있었다는 것이겠다.
삶의 변화나, 역사의 변화는 한 개인에게 때론 비운을 몰고 오기도 한다. 그녀를 아무런 조건 없이 거둬 주었던 녹동어른이 죽고 나서 그녀의 삶에도 일대 바람이 불 기미가 보였지만 녹동어른이 몸소 보여준 아량을, 마을 사람들은 잊지 않았다. 상 차린 김에 밥 숫가락 하나 더 얹어 그녀를 먹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남아도는 옷가지들로 그녀의 추위와 궁핍함을 면하게도 해 주었다.
한 고향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이 모임을 하다 말고, 이제 와서 누구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인간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당편이를 왜 굳이 찾았을까? 그저 그것은 단순히 한 고향 사람으로 기억되는 누군가가 궁금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태곳적 인간의 본질에 다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어린 아이의 지능을 갖고 있다. 통상적으로 한 인간의 생애에서도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점점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경향도 갖고 있다. 사회화가 덜 된, 아직 그 인생조차도 여물지 않은 어린 아이의 존재가 지극히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사실은 우리가 한 번쯤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온전한 한 사회인으로 성장해서 자신의 삶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사회에 기여하면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지금, 어딘가 한 구석이 지극히 모자라고 저렇게 살 바에야 짐승으로 사는 게 더 낫다고 여겨질 만한 그런 존재 조차도 보듬어 안고 살아갈 수 있었던 우리의 지난날이 새삼 그리워진다.
작가 이문열은, 늘 사족처럼 그의 글 속에 자신의 생각을 두드러지게 담아내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 모습들이 수많은 문청들의, 혹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지 않은 영향력을 끼쳐 왔고 아마도, 가장 사랑받는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반열에도 오르게 했을 것이다. 물론 때론 그의 지나친 개입이 눈에 거슬리기도 한다. 작가의 개인적인 신념을 너무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고-"사람의 아들"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선택"은 많은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현학적인 태도와, 인간의 무능함을 꼬집다 못해 인간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 지극히 염세적인 생각들을 표출해 온 탓에 더러 미움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작가는 작품으로 승부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좋으면 그 작가는 작품 속에서 우리들의 뇌리 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법이다.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양산하고 시대의 화두를 예민하게 건드려 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던 그는, 분명 위대한 작가 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