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를 보았다. 호랑나비는 짙은 파우더리향을 풍기는 자잘한 초록빛 꽃이 숨어 핀 회양목 사이를 나폴나폴 날아다니더니, 화단 가에 핀 민들레 노아란 꽃에 잠시 앉았다. 진홍의 광대나물 꽃을 한 발로 만져보다가 황금빛 폭포를 막 이루기 시작한 개나리 쪽으로 다시 날아갔다.
나비는 우리나라에서는 죽은 영혼이 나비로 환생한다는 설화가 있다. 죽은 연인이 나비가 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에서는 젊은이가 나비를 잡으러 갔다가 미인을 만난다는 이야기를 통해 아름다운 연인과의 사랑이나, 부부의 사랑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여인은 꽃으로 남자로는 비유하여 금실 좋은 부부가 서로를 지극히 연모하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민화의 대표적인 소재가 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큐피드가 사랑하는 소녀 프시케(psyche)는 나비를 뜻한다. 영혼이 있는 나비로 어떤 어려움도 견디고 자신의 사랑을 이루는 프시케의 모습은 누에고치를 찢고 새로운 기어 다니는 존재에서 날아다니는 찬란한 생명체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치를 짖고 그 속에서 자아성찰과 고독의 과정을 겪어야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봄은 꽃의 계절이고 나비의 계절이다. 꽃이 피려면 생살을 찢는 아픔을 동반하여야 하듯이 나비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날개를 얻기 위해 긴 침묵의 시간을 외롭게 혼자 견뎌야 한다.
장자는 꿈 속에서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장자의 ‘제물편’에 있는 꿈에 관한 이야기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장자는 제자를 불러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내가 지난 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내가 나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버렸더니 나는 나비가 아니고 내가 아닌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까 꿈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내가 나인지도 놀랐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분명 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알쏭달쏭한 스승의 이야기를 들은 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 스승님의 이야기는 실로 그럴듯하지만 너무나 크고 황당하여 현실세계에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자 장자가 말하기를, "너는 쓸모 있음과 없음을 구분하는구나. 그러면 네가 서있는 땅을 한번 내려다보아라. 너에게 쓸모 있는 땅은 지금 네 발이 딛고 서 있는 발바닥 크기만큼의 땅이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땅은 너에게 쓸모가 없다. 그러나 만약 네가 딛고 선 그 부분을 뺀 나머지 땅을 없애버린다면 과연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작은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겠느냐?”
제자가 아무말도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자 장자는 힘주어 말했다. “너에게 정말 필요한 땅은 네가 디디고 있는 그 땅이 아니라 너를 떠받쳐주고 있는, 바로 네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나머지 부분이다.”
장자는 장자와 나비는 별개인 것이 확실하지만 그 구별이 애매한 것은 사물이 변화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꿈인지 현실인지에 대한 구분의 무의미함은 더 나아가 크고 작음, 아름답고 추함, 선하고 악함, 옳고 그름을 구분하려는 욕망 역시 덧없는 것일 뿐이라는 인식으로까지 나아간다. 장자의 호접몽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청서출판)
나비를 보았다. 저 나비의 꿈에 내가 있는 것인지, 나비의 꿈 속에 내가 있는 것인지 아련한 봄날의 오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