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21 (월)

  • 구름많음동두천 12.3℃
  • 맑음강릉 10.0℃
  • 구름조금서울 14.6℃
  • 흐림대전 16.2℃
  • 흐림대구 12.6℃
  • 흐림울산 11.5℃
  • 박무광주 17.2℃
  • 구름조금부산 13.1℃
  • 흐림고창 16.1℃
  • 흐림제주 17.0℃
  • 맑음강화 12.9℃
  • 맑음보은 13.2℃
  • 흐림금산 15.2℃
  • 흐림강진군 15.4℃
  • 흐림경주시 11.3℃
  • 흐림거제 13.4℃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문화·탐방

소시민이 바라보는 불편한 현대미술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을 볼 때마다 ‘벌거숭이 임금님’이 떠오른다. 현대 미술가들이나 이를 관람하는 사람들은 ‘샘’이라고 명명된 변기 앞에서 정말 미술, 혹은 예술이라고 느끼는 것일까, 혹 ‘저건 변기일 뿐이야’ 라고 말하면 무지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저어하여 침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아닌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진실을 말한 소년처럼 37억 달러를 호가하는 뒤샹의 세라믹 변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망치로 파손했다는 그 노인만이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은 어떤 전문적 해석을 가해도 내 눈에는 단순한 변기일 뿐이다. ‘나는 변기를 들어 현대미술의 면상에 집어던졌다’는 오만하고 폭력적인 뒤샹의 언어에도 공감할 수 없으며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수공적 기술의 재현행위가 아닌 선택한다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가의 본질’ 이라는 뒤샹의 이론에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림으로 그리는 수공적 기술재현행위보다 눈에 보이는 어떤 물건을 선택하여 특정한 공간에 옮겨놓는 것을 예술적 행위로 보기 어렵다, 그것을 설치예술이라고 부르는 단순한 배치라고 보기도 어렵다. 만약 변기에 대한 선택으로서 미학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기계를 예술로 인식해야 한다는 전제가 되고, 변기를 디자인하고 제작한 사람들이 예술가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예술에 대한 상식을 뒤엎는 이론을 덧씌워 미술관이라는 고급공간으로 이동시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뒤샹은 미술가라기보다 은유가 과장된 궤변가다. 이 변기가 왜 그곳에 있는지 현대미술의 해설을 듣거나 문장으로 읽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명성있는 사람들의 현대미술에 대한 과도한 분석이나 해석, 혹은 상식을 초월한 이론은 언어적 유희에 머물 뿐, 그의 의도가 작품을 관람하는 일반인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 현대의 전시회를 찾는 대중들은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며 특별히 미술작품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무의미를 느낀다면 그들만의 예술이며 그들만의 가치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뒤샹의 이론대로라면 모든 생활용품이 미술관으로 이동되어 각자 그럴듯한 해설을 붙인 미술작품이 되어야 한다. 왜 변기만이 ‘샘’의 이름을 가진 예술작품인가. 개인의 명성에 따라 어떤 사물은 선택되고 어떤 사물은 선택되지 않는다면 이는 문화적으로 편파적이고 권력적이며, 모든 사물이 예술작품이 된다면 미술, 혹은 예술의 경계가 무너지고 예술의 영혼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진다.

뒤샹과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 등을 소개하는 ‘현대미술의 이해’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이들의 작품에 대한 공감과 감동은 없고 불편하고 기괴하고 외면하고 싶은 심리만 작동했다면 그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는 만큼만 보여서 그런가? 고흐나 박수근, 이중섭의 작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무엇이 있다. 무엇인지 모르는 슬픔이 어리어있고, 삶과 생활을, 인간과 사회에 대해 숙고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 이는 인간의 고정관념이 작동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마음을 넘치는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그러나 변기를 보기 위하여 미술관을 찾을 이유는 내게 없다. 뒤샹의 이름이 없을 뿐, 변기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데미안 허스트나 마크 퀸도 마찬가지다. 발상의 전환이라든가, 경계를 허물었다든가 따위의 이론에 대해 반감이 먼저 작용하고 아름다움보다 공포나 혐오를 먼저 느낀다면 그것을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나의 심정이다. 관련 전문가들이 ‘당신이 뭐길래?’ 하며 문외한이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이 생각을 굽히고 싶지 않다.
 
마크 퀸의 끔찍한 작품, “셀프”를 우리나라 사람(김창일 아라리오 그룹 대표)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조선일보 2013. 12월 7-8일 토요 섹션 WHY? 에서 읽었다. 현대미술의 반전이며 그들끼리 공유하는, 결코 대중적이지 않으며 대중적이길 원하지 않는 현대미술의 명성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작품이 우리나라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마크 퀸의 ‘셀프’는 호러적이며 데미안 허스트의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서 불가능한 육체적 죽음’ 이라는, 포름알데히드가 가득한 유리진열장에 매달린 상어는 과학실에 어울리는 박제의 의미 이상으로 오지 않는 것을 문외한의 그것이거나 무의식적 편견, 고정관념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뒤샹의 ‘샘’에 대하여 현대미술의 기호라고 읽고 싶지도 않고, 새로운 시각에 대한 도전이라고 읽고 싶지도 않으며 이미지의 재해석이라는 말에 동조하지도 않는다. 벌거숭이 임금님을 보고 눈으로 본 그대로 말한 소년처럼 이것은 단지 변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많다.

아무튼 아이디어나, 발상이나 혹은 그 무엇이든 아름다움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 예술이라고, 혹은 우리가 미처 알지못하는 것을 작품으로 일깨워주는 것을 나는 예술이라고 느끼고 싶다. 순전히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