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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순천시, CEO 및 Leader를 위한 인문학 강좌

어느 덧 우리 사회에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이러한 영향때문인지 순천시와 순천상공회의소, 성공회대학교가 주관한 CEO 및 Leader를 위한 인문학 강좌가 2015년 6월까지 매월 한 차례씩 총 9회에 걸쳐 에코그라드 호텔에서 이뤄진다.

지난 10월 30일 ' 미래사회의 변화와 인문학적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의 강의를 시작으로 11월 27일 아침 7시부터 안도현(우석대 교수)시인의 '시인, 백석을 읽다' 2회 강좌가 있었다.

시인 안도현은1980년 스무 살 무렵, 백석의 시 '모닥불'을 읽고 그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백석의 시에 둥지를 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만나고 싶은 심정으로 시를 썼다. 쉴 곳도 그의 시였고, 잃어버린 시의 나침반을 찾아 헤맬 때 길을 가르쳐 준 것도 그 둥지라고 이야기 했다.

백석은 정주가 고향으로 1912년에 태어나 방응모의 지원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에 유학을 하였다. 이 당시 일본의 주목을 끌던 시인들과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집을 접했고 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백석보다 앞선 주요한이나 정지용은 유학시절부터 일본어로 시를 발표하였으나 단 한 편도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모더니즘적인 시를 탐독하고 시론을 받아들였지만 조선 사람의 언어를 지키고자 한 지조를 엿볼 수 있다.

이후,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거쳤으며 외국어 능력이 탁월하여 오랫동안 번역하는 일에도 힘썼다. 그는 1962년 북한 문단에서 사라진 이후 1996년 작고할 때까지 30년이 넘은 시간 삼수군 협동농장에서 농사꾼으로 살다 작고하여 백석의 시계는 오늘날까지 정지되어 있다.

시집 '사슴'은 발간되자마자 당대의 많은 시인들을 매료시켰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은 백석의 '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찾을 수 있으며, 신경림은 '내 시의 스승으로 먼저 백석 시인을 들고 있다. 또 이시영의 '귀가'는 백석의 '산 비'에서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는 교사로서 진지한 자세로 교단에 섰다.

정주와 오산학교는 일찍부터 걸출한 문인을 많이 배출하였다. 춘원 이광수, 백석보다 10살이 많은 오산학교 선배 김소월이 있다. 또 선우휘는 백석보다 10년 후 태어나 조선일보 주필로 활동하였다.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여사는 전 재산을 팔아도 백석의 시 한 편만 못하다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의 시는 김수영과 함께 국어 교과서에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으며, 윤동주가 필사한 시집 5,6권이 현재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는 월북 작가도 아니면 재북 작가라 해야 할 것이다. 백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시인이다.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텍스트가 있고 백석의 시를 다룬 수많은 논문들이 있음에도 우리는 그의 문학과 생애를 완벽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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