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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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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강마을 편지 - 씨앗론

강마을은 소만을 지나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모내기를 시작하였고, 보리밭은 눈에 띄게 누릇누릇합니다. 아까시 꽃은 절정을 지나고 있고, 오동나무꽃은 끝물인 듯한 꽃이 보입니다. 붉은 개양귀비는 유혹적으로 강가에 피어나고 보랏빛 칼퀴나물꽃은 물감을 뿌린 듯 강둑을 장식합니다. 은사시나무의 떨림은 바람을 부릅니다. 그 바람은 여름바람이고 유혹의 바람이고 뜨거운 바람인가 봅니다. 
  
봄꽃들이 진 자리마다 푸른 열매가 맺혀져 있습니다. 매화나무는 바람결에 덜 여문 푸른 매실을 후두둑 떨어뜨립니다. 너무 많이 열매를 달았던 탓일까요. 나무 아래에는 푸른 매실이 가득 떨어져 있습니다. 열매가 너무 많으면 나무는 안타까운 얼굴로 비고 모자란 열매들을 떨어뜨립니다. ‘후두둑 후두둑’ 생살 찢는 소리를 내면서 어린 열매를 떨어뜨려 남아있는 열매가 더 튼실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무섭도록 정확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씨앗은 식물과 동물 모두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신갈나무는 가을이면 수많은 열매를 대지에 뿌려 자손의 번식을 준비합니다. 수천 개의 도토리는 토끼와 다람쥐와 멧돼지의 먹이가 되고 곤충들의 안식처이자 양식이 될 것입니다. 그 중 몇 개의 도토리는 봄까지 커다란 신갈나무 잎 아래 숨어서 싹을 틔우겠지요. 그러나 어린 도토리 싹에게 자연은 가혹하고 무서운 존재일 것입니다. 보드랍고 여린 잎을 잘라먹는 고라니며 토끼를 만나기도 하고 멧돼지의 무지막지한 발에 밟혀 짓이겨 사라지기도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역경을 견디면 젊고 푸른 신갈나무로 우뚝 서서 자신의 씨앗을 대지를 향해 보냅니다. 지금 저 산야에 선 푸른 나무 한 그루는 이렇게 낯선 대지에서 살아남은 당당하고 멋진 존재입니다. 그처럼 우리 역시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음은 신갈나무나 은사시나무보다 더 큰 필연적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진실한 믿음의 씨앗은 나라나는 필연적 존재의 탄생시킵니다. 세상은 얼마나 위대한 곳일까요? 이런 필연이 모여서 꿈꾸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이 꽃피는 곳입니다.

씨앗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DNA를 유전시켜 준 존재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의 큰 형태를 쪼개어 보면, 그 속에 자기와 닮은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닮은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된다고 합니다. 부분과 전체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자기 유사성 개념을 기하학적으로 푼 구조를 프랙털(fractal)이라고 합니다. 프랙털(fractal)은 단순한 구조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복잡하고 묘한 전체 구조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용어는 IBM의 Thomas J. Watson 연구센터에 근무했던 프랑스 수학자 만델브로트(Benoit B. Mandelbrot) 박사가 1975년 ‘쪼개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프랙투스(frāctus)’에서 따와 처음 만들었다고 합니다. 만델브로트 박사는 저서 <THENATUREOFGEOMETRYFRACTAL>에서 “영국의 해안선 길이가 얼마일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리아스식 해안선에는 움푹 들어간 해안선 안에 굴곡진 해안선이 계속되었고, 자의 눈금 크기에 따라 전체 해안선의 길이가 달라졌고 결과적으로 아주 작은 자를 이용하면 해안선의 길이는 무한대로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같은 모양이 반복되는 구조를 ‘프랙털’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겉으로 보기엔 무질서하게 보일지 몰라도 자세히 그리고 마음을 다해 들여다보면 준엄한 우주의 질서가 숨어 있습니다. 고사리와 같은 양치식물, 공작의 깃털, 은하의 신비로운 모습이 모두 프랙털의 구조라고 합니다. 저는 이 프랙털 이론이 인간의 삶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균 77세 정도로 본다면 그 사람의 삶은 유년기와 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장년기와 노년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 사이 우리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그저 살아가는 삶처럼 보이지만 어김없는 자연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질서해 보이는 인생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같은 모양의 반복입니다. 지난 봄 어떤 씨앗을 심었는지는 그 사람의 여름살이와 가을살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권력도 명예도 재력도 자연으로 돌려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긴 인생이라는 구조를 다시 한 해의 짧은 구조로 바꾸어 보면 똑 같은 결과를 보여줍니다. 큰 형태를 쪼개어 보면 그 속에 자기와 닮은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닮은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것은 한 달과 하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침나절을 허둥지둥 보내면 저녁 무렵 허망함이 가슴에 바람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똑같은 모양의 한 달을 만들고, 한 해의 형태를 반복하게 됩니다.

지금이 일 년 중 가장 바쁜 농사철입니다. 소만 무렵 모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한 해 벼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낮에는 뻐꾸기 울음이 온 들을 수놓고, 밤이면 소쩍새가 피곤한 농부의 귀를 파고듭니다. 저도 산과 들에 풍성히 뿌려진 씨앗들이 제 힘으로 발을 내려 푸른 잎을 피워 올리듯, 바른 믿음과 따뜻한 미소의 씨앗을 마음밭에 뿌려 그 잎을 피워내고 싶습니다. 큰 나무의 모양이 작은 씨앗 속에 숨어 있음을 늘 생각하고, 작은 잘못은 큰 잘못과 닮은 구조로 자라남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강마을 무논에 뻐꾸기 울음이 찰랑찰랑 물장구를 칩니다. 아, 첫여름이 다가오나 봅니다. 어디서 꼬물꼬물 어여쁜 씨앗 하나 빼꼼이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참고>
1. 프랙털(fractal):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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