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마을의 봄빛이 쏟아집니다. 화사한 벚꽃나무는 팝콘을 튀기듯 퐁퐁 꽃들이 피어납니다. 그렇지만 그늘진 화단을 보니 지난 계절에 무성했던 풀들이 말라 있습니다. 마른 풀 아래 검은 흙 속에는 겨울을 땅 속에서 보내는 벌레들이 숨을 죽이며 동면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가물가물 쏟아지는 잠 속에서 죽은 듯 보이나 죽지 않은 상태로 가을과 봄 사이에 있는 한 계절을 보낸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견디며 쏟아지는 봄 햇살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지요.
우리의 삶도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아닐까요? 요즘은 젊은이에게 더 힘든 시절입니다. 지난 해 회자인구(膾炙人口)한 ‘금수저, 은수저’, ‘헬조선’ 등의 단어에서도 짐작하듯 부모의 능력에 의해 계층이 고착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시대는 젊은이에게 불행한 시대입니다. 우리의 젊은이가 부모의 물려준 수저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새로운 경계의 문을 열어나가 창의적으로 인생을 디자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동면한 벌레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서 죽은 듯 죽지 않은 상태로 살아갈 것입니다.
겨울처럼 얼어붙은 취업시장과 살아나지 않는 경제지표 등으로 힘든 현실을 생각하며 답답한 마음으로 니체의 글을 읽었습니다. 니체는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우리의 삶을 어떻든지 간에 ‘아모르파티(amorfati)’ -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나는 춤출 수 있는 신만을 믿는다. 춤추기 위해서는 몸은 가벼워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삶을 춤추듯 살기 위해서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춤은 중력을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즉 지구를 둘러싼 중력이 언제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 걸음을 걸을 때 마다 우리를 누르는 중력을 극복해야 위로 몸을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삶에 있어서 중력은 무엇일까요? 굳어버린 관습, 편견, 자기를 믿지 못하는 마음 같은 것이 아닐까요?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력일 것입니다. 그저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내 인생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볍게 뛰어올라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 갈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춤추기 위해서는 몸을 먼저 움직여야 하듯이 목표를 향해 머리가 아닌 몸을 먼저 움직여보십시오. 자기 몸을 인정할 수 있으면 자기 속의 자아를 찾고, 이것이 바로 세상과 교감하는 것입니다. 바로 자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고 실천할 때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아모르파티(amorfati)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니체는 신이 죽은 시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의 영혼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백승영 교수는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고 말한 니체의 핵심 키워드를 통해 니체의 사상을 ‘디오니소스적 긍정 철학’이라 말합니다.
철학에서 탈근대적 전환을 가져온 니체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의지가 힘에 의해 수행하는 장소로 위버멘쉬(Übermensch , overman)적 삶을 살 갈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야 자신을 긍정하고 세계에 대해 긍정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삶의 매 순간 모든 계기와 계기를 자신을 위해 구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바람 몰아치는 들판에 홀로 선 젊은이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 일을 10년만 견디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궁하면 통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궁하기 때문에 그 궁기를 면하고자 견디어 낸다면 진정한 자아가 눈을 뜰 것입니다. 신께서 문을 닫아버릴 때는 반드시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합니다. 투덜거리지 말고 뚜벅뚜벅 걸어서 나를 누르는 중력을 극복하기 위해 몸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내 속에 있는 의지를 불러보십시오. 그러면 인생의 길섶마다 숨겨진 행운이 손을 내밀 것입니다.
이 말은 어쩌면 청년이 아닌, 저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편안함 속에서 안주하려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물처럼, 절벽을 만나면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지나고 막히면 돌아가는 용기와 지혜를 배우고 싶습니다. 물처럼 모든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르고 싶습니다. 명예에 욕심내는 것이 아니라 교사로 첫걸음을 걸어 아이들의 교실로 들어설 때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물은 낮게낮게 흘러야 바다와 만날 수 있습니다.
화사한 봄꽃 사이로 이제 눈을 뜬 작은 벌레들이 기어다닙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작은 생명체 옆에 앉아 나직하게 주문을 외어봅니다. ‘아모르파티(amorfati)’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참고>
1. 아모르파티[ amorfati ] 독일의 철학자 F.W.니체(1844∼1900)의 운명관(運命觀)을 나타내는 용어.
운명애(運命愛)라고 번역된다. 그에 의하면, 운명은 필연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닥쳐오지만, 이에 묵묵히 따르는 것만으로는 창조성이 없고, 오히려 이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출처 : 두산백과)
2. 위버멘쉬(Übermensch , overman) :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신체적 존재이며,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자, 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완성시키는 주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위버멘쉬(초인) 개념은 힘에의 의지와 허무주의 그리고 영원회귀 사유와의 정합적 구도를 완성시키는 매개개념으로 사용된다.(출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