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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6.25전쟁 66주년에 바라본 대한민국의 과거사

 오늘은 6.25전쟁 66주년이 되는 날이다. 정부에서는 10시부터 호국영령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이날을 맞이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번영된 대한민국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과 국가유공자의 헌신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속적인 총성은 멎었지만 우리는 지금도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우리는 다시 66년 전의 아픔을 되새기면서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50년 6월 25일 미명, 적의 포격은 새벽 4시부터 개시되었다. 그러나 전면공세라고 판단된 것은 상오 7시께였다. "서부전선 서단 옹진반도 까치산에 포진하고 있었던 부대는 5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적 1개 여단의 침공을 받았다"고 당시 12중대장이었던 정규한 장군은 회상한다. 적정의 이상을 눈치챈 것은 6월 23일. 위장된 적 전차가 관측되었고 전에 없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었던 적과 아군은 늘 메거폰을 통해 "처남" "매부" 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23일께부터는 이쪽에서 말을 걸어도 무응답이었다는 것이다.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참패하고 있던 1950년 7월 중순 일본 도쿄 사령부의 맥아더 원수는 적의 후방을 부술 작전을 구상했다. 바로 인천 상륙작전이었다. 인천의 장악은 서울탈환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이 전략에 대해 해군과 해병 전략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반대했다. 해군 측은 인천항의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 최대인 32피트나 돼 간조 때는 해안 접근이 불가능함을 들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서울 탈환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을 밀어붙이듯 결정했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6.25라는 슬픈 초연의 역사를 되씹을 때마다 서울 시민들은 한강 인도교의 비극을 생각한다. 공산군의 남침으로 수도 서울이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한강 인도교가 끊긴 것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3시 18분이다. 이 시간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이 한강교는 숱한 목숨을 앗아간 슬픈 이야기를 간직하게 되었다. 살길을 찾아 서울을 탈출하려던 수많은 시민들이 예고 없이 끊긴 이 다리 때문에 생명을 잃은 것이다.

암호 전문들 중에는 소련군사 고문단이 50년 5월 초 6.25전쟁 개시 작전계획을 작성, 인민군에 시달한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시켜주는 기밀문서가 포함돼 있어 6.25가 구소련의 사주에 따른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했음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7.27 정전협정 체결 39주년을 맞은 1992년 7월 27일 한 신문사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공산 세력이 본격적으로 전쟁준비에 들어간 50년 2월부터이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공산군 측에 불리하게 기울기 시작한 같은 해 10월 사이 김일성은 스티코프 소련대사를 통해 스탈린과 수차례 극비 암호전문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장의 포성이 멎은 지 63년. 그 상흔으로 평생을 시달려온 상이용사들은 아직도 그날의 ‘상처’ 를 치유하지 못한 채 병상에서 악몽을 되씹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육체적 고통을 비롯해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한 일이라 후회는 없습니다"라고... 그동안 겪은 풍상을 말해주듯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팬 상이용사는 6.25때 입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인해 서울 강동구 보훈병원에서 국비환자로 치료를 받고 있으면서도 보국의 자긍심을 잃지 않고 생존해 가고 있다.

6.25는 이 땅에 갖가지 씻지 못할 유산을 많이 남겨놓았지만 가장 수가 많은 것이 이를테면 전쟁 고아다. 당국 집계에 나타난 고아 수는 전국에 5만 9천여 명으로 약 육백 개의 고아원에서 자라야만 했다. 가족 상황을 물으면 "잘 모르겠어요.┉아버지는 빨갱이한테 끌려가셨다 하고 엄마는, 엄마는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이들은 지금도 힘들지만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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