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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얘들아, 성적보다 중요한 것은 인성(人性)이란다.”




하계방학을 앞둔 선생님은 학기말 성적처리와 방학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하다. 더군다나 부서마다 방학 전에 처리해야 할 업무 또한 만만치 않다. 쉬는 시간, 교무실은 성적을 확인하려는 아이들로 어수선하기까지 하다. 특히 생기부에 내용 하나라도 더 적으려는 일부 극성스런 아이들의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수요일. 2학년 ○반 1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발길을 옮기려는데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 오는 인기척이 났다. 누구인지 궁금하여 뒤돌아보니 ○반 ○○○였다.

“○○야, 무슨 일이니?”
“학기말 성적이 궁금해서∼요.”


그 아이는 자신이 없는 듯 말끝을 흐렸다. 사실 학기말 성적이 이미 마무리 되어 모든 담임 선생님이 학급 아이들의 과목별 성적을 열람할 수 있는 상태였다. 다시 말해, 학생들은 구태여 교과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본인 성적을 알 수 있었다.

“영어성적, 담임 선생님에게 확인해도 될 텐데.”
“선생님, 그게 아니고~요.”


그 아이는 분명 하고픈 말이 있는 듯 끝말을 흐렸다. 그런데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듯했다. 교무실 내 자리까지 왔는데도 녀석은 끝내 본인이 하고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워낙 할 일이 많아 성적을 확인시킨 뒤, 녀석을 빨리 돌려보낼 요령으로 컴퓨터 화면을 켰다.

바로 그때였다. 녀석이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사실 제 성적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 왔습니다.”
“그래? 그것이 뭔데?”
“죄송하지만, 생기부에 교과세부특기사항 좀 적어주실 수 없나요?”
“글~쎄.”


시큰둥한 내 반응에 녀석은 실망한 듯 고개를 떨궜다.

“죄송해요. 선생님.”

더 이상 자기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녀석은 죄송하다는 말을 한 뒤,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영어교사가 꿈인 녀석은 ○○대학 사범대학을 목표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예의바른 모범생이었다. 특히 수업시간마다 발표를 잘해 아이들의 부러움을 많이 사는 녀석이기도 했다. 그런데 노력하는 만큼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늘 고민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녀석의 잠재력이었다. 단 한 번의 어학연수 경험이 없는 녀석의 말하기 실력은 혀를 내 두를 정도였다. 그래서 내심 학기말에 녀석의 그런 점을 생기부에 적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녀석 또한 자신의 그런 특기를 교과 담임인 내가 생기부에 조금이나마 기록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용기 내어 나를 찾아온 듯했다. 그런데 오늘 내 반응에 실망하고 돌아간 녀석이 차후 생기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교과세부특기사항 란에 기대하지 않았던 내용이 적힌 것을 확인하고 놀랄 녀석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최근 대학 수시모집에서 학생부의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학생부에 목매는 아이들이 많아 졌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내용을 교사에게 들이대며 적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오직 좋은 대학에만 합격하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에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심히 염려스럽다. 이럴 때 일수록, 교사는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사실이 아닌 내용을 부풀려서 적어주는 것을 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사는 사실에 입각한 검증된 내용만을 적나라하게 적어줘야 할 것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전교 석차 상위 4%에 해당하는 한 녀석이 학기말 성적표를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성적표를 내밀며 교과관련 세부특기사항이 적히지 않았다며 적어줄 것을 요구했다. 녀석은 어릴 적에 몇 년간 캐나다 어학연수를 다녀와 영어 실력이 여타 아이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그러다 보니, 영어시간 엎드려 자는 경우가 일쑤였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 대들 때도 가끔 있었다.

녀석의 경우, 영어 성적은 최고였으나 인성(人性)은 생각 이하였다. 괘씸하여 생기부에 특기사항을 적어 달라는 녀석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해 녀석은 대학 수시모집에 여러 곳을 지원하였으나 모두 낙방하였다. 녀석이 대학에 떨어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성적보다 인성을 더 중요시하는 그 대학 합격기준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다행이 수도권 모(某) 대학에 추가합격하여 지금은 대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녀석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 녀석의 얼굴이 자꾸 떠올려지는 이유는 왜일까?

교단에 선 지 25년이 지났다. 처음 교단에 섰을 때의 마음이 지금은 어떠한가? 요즘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이들에게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라고 한 것 같아 후회스럽다. 한편 지나친 입시 위주의 교육 때문에 교사로서 진작 가르쳐야 할 내용을 가르치지 못한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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