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손님 그곳, 후포리 처가댁에 다녀오다
금요일(5일). 퇴근하여 온 나를 보자 아내는 다짜고짜 물었다.
"여보, 방학인데 저흰 휴가 언제가요?"
"휴가요? 미안하지만 올여름엔 계획이 없는데요."휴가 계획이 없다는 말에 아내는 실망한 듯 말했다.
"오늘 낮에 엄마에게 전화 왔는데 한번 다녀가지 않느냐고…"
"그래∼요?"아내는 내 시큰둥한 반응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아내와 결혼한 지 25년이 지났다. 매년 여름이면 우리 가족은 연례행사처럼 후포리 처가댁을 찾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여름 방학이 짧을 뿐만 아니라 학교 일이 많아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몇 년 전부터 처가댁이 있는 후포리가 모(某) 방송사 프로그램에 방송을 타는 바람에 장모님 친구 사이에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남 서방’ 이야기가 화두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장모님도 백년손님 ‘남 서방’ 못지않은 사위가 있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내심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시간 날 때마다 장모님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한번 다녀갈 수 없는지를 물어보곤 했다고 하였다. 그러면 아내는 장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방학하면 꼭 내려갈 것을 장모님과 약속했다고 하였다.
아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이래로 장모님은 6남매 모두를 출가시키고 종갓집 맏며느리로 홀로 후포리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그리고 자식들이 모신다고 하면 장모님은 장인어른이 잠들고 있는 이곳 후포리를 떠날 수 없다며 극구 사양하셨다.
매년 장모님은 손수 농사지은 농작물(고추, 감자, 파, 고구마, 옥수수 등)과 바다에서 직접 따서 말린 미역을 보내주신다. 그리고 한번 내려갈 때마다 비싼 대게를 한 상 가득 차려 줄 정도로 장모님의 사위 사랑은 남다르다. 용돈을 손에 쥐여 주면, 그 돈을 다시 손자 손녀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장모님은 욕심이 없으신 분이다.
방학했는데도 내 입에서 휴가 이야기가 나오지 않자 오늘은 작심한 듯 아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 듯싶었다.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장모님께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사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장모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 저녁. 평소 장모님이 좋아하는 잡채 거리를 마트에서 사서 후포리로 출발했다. 행여 오매불망 사위를 기다리고 있을 장모님이 걱정할까 봐 아내는 중간 중간 장모님께 전화했다. 강릉에서 자동차로 2시간 30분 정도 걸려 처가댁에 도착했다.
도착하자, 처가댁에는 장모님과 장모님 친구 몇 분이 아내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사위 자랑을 하고 싶어서인지 장모님은 사전에 동네 친구들에게 사위가 온다는 이야기를 해둔 모양이었다.
다음 날(토요일). 장모님과 장모님 친구 몇 분을 모시고 후포리 시내로 갔다. 이 지역이 방송을 타서일까? 예전에 한산했던 거리가 주차할 곳을 없을 정도로 관광객들로 붐볐다. 특히 남서방이 프로그램에서 어르신을 모시고 간 곳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문득 장모님의 기를 살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TV에서 ‘남 서방’이 했던 것처럼 장모님과 친구 분들을 시내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며 먹을 것과 갖고 싶은 것 모두를 사드렸다. 장모님은 기분이 좋아서인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연신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그 모습에 사위인 나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순간, 잠깐 시간을 내어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 장모님은 내 손을 꼭 잡으며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우리 ‘김 서방’이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셨다. 친구들 앞에서 사위인 내가 장모님 당신의 위신을 세워준 것에 기분이 좋으셨던 모양이었다.
일요일 아침. 우리와의 이별을 앞두고 장모님은 늘 그랬듯이 냉장고에 있는 온갖 해산물을 아이스박스 안에 넣어 주며 건강에 신경 쓸 것을 당부했다. 장모님이 싸준 것들을 차에 싣고 난 뒤, 자주 찾아올 것을 약속하며 장모님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출발하기 위해 차에 타자, 장모님은 안전 운행을 당부하셨다. 아내와 내가 집에 들어가라고 계속해서 주문해도 장모님은 손사래를 치시며 우리말을 듣지 않으셨다. 그리고 우리 차가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는 장모님의 모습이 차의 백미러에 비쳤다. 우리와의 이별이 못내 아쉬운 듯.
2박 3일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장모님과 함께한 시간만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장모님,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