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의 본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변별력 즉, 선발을 위한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성취도 측정을 위한 기능이다. 우리 나라에서 현재의 수학능력시험에 대한 수요자들의 기대를 보면, 전자 즉 선발을 위한 평가의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 몇 년간 수학능력시험은 새로운 교육 정책을 살린다는 취지에서 난이도를 낮추면서, 성취도 중심의 평가로 전환되는 것 같은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1년 너무 쉽게 출제된 수학능력시험으로 인해서 변별력을 상실하더니, 2002년에는 너무 어려워 평균 60~70점 정도의 점수하락을 가져왔다. 학교 현장은 당황했고, 수험생들은 아연하였으며, 학부모들은 혼란스러웠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과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수학능력시험이 어렵게 출제된 것을 사과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와 같은 혼란이 일어나게 된 본질은 선발에 있어서 줄 세우기를 차단하고 다양한 선발 방식을 유도한다는 취지에 입각하여, 선발에 결정적 변수인 ‘총점 석차’를 발표하지 않은 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근본 원인은 평가정책(評價政策)과 평가문화(評價文化)의 괴리(乖離)에 있다. 우리 나라에서 수학능력시험은 국가가 어떠한 정책의도로 가든지 선발의 기능을 수행해주기를 기대하는 학부모들과 대학 당국자들의 안이함 때문에, 새로운 평가 문화의 정착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의 기능을 한꺼번에 확 바꿀 것이 아니라, 대학들로 하여금 다양한 선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준비기간과 여건을 마련한 후에, 자연스럽게 그 기능이 변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변화를 유도하면서 국가적 평가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첫째, 안정적이고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시험의 기능은 준비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근거를 삼을 수 있는 준거(準據)를 충실히 제공하여야 한다. 그것이 선발의 기능이든 성취도의 측정 기능이든 평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점수분포를 유도할 수 있는 난이도를 유지해야 한다.
동시에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현재, 대학들은 특별한 입시 대안을 갖고 있지 않고, 대학 수학능력시험은 입시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에 대한 기대의 눈들이 한 해에 70~80만 명, 넓게는 500만 명에 이른다. 그들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둘째, 차제에 수학능력시험이 완전히 성취도를 확인하는 시험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고, 선발은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다양한 도구를 개발하도록 하여야 한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이라는 명칭이 암시하듯, 학생들이 과연 대학교육을 받을 기초 소양을 갖추고 있는가 즉, 학생들이 최소한의 성취를 이룩하였는가를 측정하는 도구로 자리잡도록 그 역할을 변경하여야 한다.
셋째, 출제위원의 구성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 현재의 수학능력시험은 출제위원을 대학 교수들로 구성하고, 검토위원을 교사로 구성하고 있다. 수학능력시험 출제의 실제를 보면, 문항 출제는 출제위원의 고유 업무로 하고 있고, 출제 문항에 대한 검토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출제위원 구성은 수학능력시험 문제가 난이도 조절을 실패하는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가 되고 있고, 평가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한 인적 변화의 차원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인적 구성 절차이다.
안정적인 난이도를 위해서 학생들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일선 교사들이 출제 위원 구성의 중심을 차지하여야 하고, 교수들은 검토위원이나 또는 일부 적은 비중의 출제위원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다.
우리의 교육 당국은 수학능력시험을 하나의 자격 시험으로 역할을 낮추고, 그러한 모양새를 위해서 총점과 석차로 발표하는 것을 금하고, 등급제로 발표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형식적인 약속만을 지키고 실질적인 것을 지키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다. 총점제를 폐지하고 수능석차를 발표하지 않으려면, 그에 맞는 조건을 갖추어 놓고 하여야 한다.
그런데 올해의 입시 현장도 여전히 수학능력시험의 의존도가 막대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외형적인 틀만 바꾸어 놓으면, 골탕을 먹는 것은 바로 학생들이요, 학부모요, 진학지도 교사들이다.
교육은 백년대계이다. 교육은 우리의 미래이다. 그러한 교육을 충분한 준비와 공감대가 없이, 주변 여건의 개선 없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시행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책임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