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파시스트 독재가 심화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국외로 탈출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우리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모든 것이 변하고 말 것이다”라는 칼 츠마이어의 말대로 국외로 망명한 지식인들은 국외 반나치 운동의 중심이 되어 국제적인 연대를 형성하였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2,000여 명의 지식인들이 연구실과 서재, 교회를 뒤로 하고 국외로 빠져나갔다.
나치(NAZIS)는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을 통칭한다. 나치즘은 19세기 말엽 유럽에 일반화된 반(反)유대주의, 백색인종 지상주의, 국가주의, 제국주의 및 반사회주의와 반민주주의를 기초로 해 발생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독일 제3제국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나치즘의 중심이론은 독일민족 지상주의와 인종론이었다. 여기에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과 유대민족의 열등성이 대비되었다. 게르만 민족은 인류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종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가장 열등하고 해악적인 인종은 유대 종족으로, 그들은 아무리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을 실시하더라도 천성적인 열등성과 해악성은 개선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유대종족은 항상 주위 환경을 부패시키거나 또는 해악을 만연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우수한 민족은 그들의 열악성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격리시키거나 또는 절멸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념적·정치적 배경에서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오랜 음모 끝에 마침내 독일공화국 총리에 지명되었다. 권력을 장악하게 된 히틀러는 의회 방화사건을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당을 탄압하면서 총선거를 통해 만든 전권수임법으로 강력한 1인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는 복수정당제를 폐지하여 일당독재를 확립하고 히틀러 유겐트, 나치부인단 등 전국민을 대중조직으로 묶었다. 여기에 반항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거나 처형하였다. 게르만 민족지상주의를 제창하면서 유대인의 공민권, 나중에는 영업권마저 박탈하고 이들을 강제수용소에 수감하였다가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치독일에는 300개가 넘는 강제수용소와 그 지소가 있었다. 확인된 것만 해도 3만3500명 이상의 외국인이 정치범으로 처형되고, 600만 명의 유대인과 수십만 명의 집시, 독일 각지의 병원에서 이송되어 온 10만 명 이상 환자, 330만 명의 소련인 포로, 유럽 피점령 지역의 주민 수백만 명이 살해되었다.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1944년 11월까지 9413명의 장교와 병사가 처형되었다. 민간인의 경우 적어도 40만 명의 독일인이 나치정권 12년 동안 ‘합법적’으로 살해되었다. 사형 이외에 같은 기간에 22만500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자유로운 예술과 학문, 언론이 소멸되고 사회 전체가 병영국가, 감옥과 학살장으로 전락하였다. ‘대독일’ 건설의 명분으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이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 나중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전부를 병합하였다. 이어서 폴란드를 침입하는 등 게르만 민족에 의한 동유럽 정복을 꾀하여 광적인 학살극을 자행하면서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를 전화(戰禍)에 몰아넣었다. 히틀러는 나치체제의 버팀목으로 친위대(SS)를 조직하고, 비밀경찰을 강화하여 각계 각층의 모든 국민을 감시토록 거미줄처럼 엮었다. 뿌리깊은 증오의 대상이 된 유대인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강제수용소에 수감하여 혹독한 고문과 살육을 저질렀다. 교회, 군대, 학교, 노동조합을 나치 조직으로 획일화시키고 일반 국민도 히틀러 신봉자로 만들었다.
[PAGE BREAK]히틀러의 광적인 독재와 이웃 나라 침략을 비판해 온 학생, 지식인과 종교인들의 조직적인 저항운동이 전개되고 학생들과 종교지도자 등 각계에서 히틀러 제거운동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암살계획이 폭로되면서 수많은 학생지도자와 기독교인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처형당하였다. 나치에 저항하는 많은 지식인이 해외로 탈출하거나 망명하였다.
“레지스탕스 정신은 반항적 기질과 이상주의의 혼합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반파시스트 지하운동에 가담한 남녀들은 모멸적 권위에 대항하여 자존을 지키고, 공포와 폭력에 항거하여 양심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싸웠다. 특히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레지스탕스는 정치에 도덕적 차원을 부여해 주는 체험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승산 없는 전투를 위해 자기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희생토록 유도하였다. 그들의 이상으로부터 공동의 노력이 우러나왔으며, ‘경쟁심, 치졸함, 모략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따뜻하고 우애 있게 단결된 협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지식인과 저항』, 제임스 D, 윈킨스)
망명길 오른 일급 지식인들
히틀러의 파시스트 독재가 심화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국외로 탈출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우리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모든 것이 변하고 말 것이다”라는 칼 츠마이어의 말대로 국외로 망명한 지식인들은 국외 반나치 운동의 중심이 되고 국제적인 연대를 형성하였다. 나치 선전상 괴펠스가 “나는 그들을 지구의 끝까지 쫓아가 근절시키고야 말 것이다”라는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망명가들은 게슈타포의 마수를 피해가면서 나치 패망 때까지 개인적으로 또는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히틀러와 싸웠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지식인들의 국외 망명은 학자, 언론인 1300여 명, 문학, 예술가 800여 명으로 2000여 명이 연구실과 서재, 교회를 뒤로 하고 국외로 빠져나갔다. 프라하, 취리히, 암스테르담, 스톡홀름, 파리, 런던, 뉴욕, 멕시코, 모스크바 등 세계 각지가 망명지로 선택되었다.
망명자들의 성향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4그룹으로 나눠진다. ①그룹은 자유주의자들로서 프랑스, 영국, 스위스, 미국, 남미에 망명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전후 서독으로 귀환하였다. ②그룹은 사회주의 계열로서 모스크바에 망명하고 전후 동독으로 귀환하였다. ③그룹은 유대계 출신으로 전후 이스라엘에 정주하고 ④그룹은 국내에 잔류하면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하여 이른바 ‘국내 망명그룹’으로 분류되었다.
양심과 지성에 충실하고자 국외 망명길에 나선 이들은 가난과 질병, 굴욕과 소외감을 감수하면서 반나치 투쟁에 온몸을 던졌다. 가장 참혹한 경우는 ‘국내 망명자’들이다. 이들에게는 비밀경찰의 감시와 이웃의 밀고, 강제수용소, 집필금지 등 극한 상황이 주어졌다. 붙잡히면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저항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스위스로 망명한 슈테판 게오르게는 임종에 앞서 “나치 독일에는 나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근대 독일시의 성좌라 불리는 슈테판의 임종 소식에 나치 선전상 괴펠스가 국장(國葬)을 제의했지만 측근들은 끝내 거절했다. 슈테판의 사례에서 망명가들의 의지를 살필 수 있다. 대부분이 일급 지식인들인 이들의 망명으로 나치 독일의 학문세계는 황폐화되었다. 학자적 양심을 가진 교수들의 다수가 대학에서 추방되거나 망명객이 되고, 당대의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15명의 시인, 작가 중 11명이 국외 망명길을 떠났다. 남아 있던 4명 중 1명도 강제수용소에 수감됨으로써 독일문학계는 황폐화되었다. 정치학계의 경우 중진 학자 18명이 망명하여 나치독일의 정치학계는 종전을 맞을 때까지 그야말로 황무지 상태였다.
대표적인 국외 망명가 중에는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탈출하여 영국에 이어 미국으로 망명한 F. 노이만, 망명지 브라질에서 자살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빈 상징파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 아내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교수직에서 추방되어 망명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 등이 독일의 일급 지식인들이었다.
프로이트, 훗셀, M 셀러, 아인슈타인, E 블로흐, K 레비트,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포이, 히방거, E 윙거, L 렌, H 아렌트 등 독일의 세계적인 학자들이 고국을 떠나 망명객이 되었다. 지식인뿐만이 아니었다. 히틀러의 암살 사건으로 가족과 함께 체포돼 악명높은 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된 반나치 활동의 중심인물 육군대장 G 할터와 같은 무반(武班)도 나치독일의 고국을 떠났다.
[PAGE BREAK]이들과는 달리 저명한 철학자로서 나치에 협력한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기회주의 지식인도 적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치 당원이었던 하이데거는 프라이르그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나치 계획을 실현시키고자 학생들을 동원했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그 대학생들을 이끌고 투표장에 나가 “독일민족이 하나가 되고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기 위하여 총통에게 투표할 것”을 역설했다. 그는 히틀러의 학살정책에 대해 비판은커녕 일체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지원하는 어용지식인이었다.
하이데거는 당정책에 대한 이견과 바덴주 문부성과의 불화관계로 취임 1년여 만인 1934년 2월 총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하지만 수많은 지식인이 망명하고 국내 반나치 전선에서 싸울 때 ‘소극적’ 이나마 히틀러를 지지하고 ‘침묵’함으로써 지식인의 역할을 외면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후 독일사회에서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물샐 틈 없는 정보정치와 폭압 통치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나치 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멈춰지지 않았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3년 동안에 확인된 것만도 5425건의 정치적 재판, 즉 반나치 활동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2만883명의 피고에 대해서 연 3만979년에 이르는 징역 내지 금고형이 선고되었다.
1936년에는 1만1687명의 공산당원과 1374명의 사회민주당원이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고, 1937년에는 공산당원 8068명, 사회민주당원 733명이 체포되었다. 나치체제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집단인 수많은 카톨릭과 기독교인이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지거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유대인 과학자로서 나치로부터 박해를 받은 A 아인슈타인은 전후에 나치 시대 저항운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겼다.
“나치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나는 자유의 애호자로서 자유의 옹호를 먼저 대학에 기대하였다. 대학은 언제나 진리에의 헌신을 스스로 자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대학은 곧 침묵하였다. 그래서 나는 신문의 위대한 편집자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불같은 사설들은 지나간 날에 그들의 자유에의 정열을 힘차게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대학처럼 침묵하였다.
오직 교회만이 진리를 탄압하는 히틀러의 싸움터에 결연히 일어섰다. 나는 전에 교회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교회에 대하여 큰 애착과 찬미를 느낀다. 왜냐하면 교회만이 지적· 도덕적 자유의 옹호에 용기와 끈기로 싸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므로 내가 과거에 멸시하던 존재를 지금은 솔직히 찬미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다.”
반나치 운동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토마스 만, 본 회퍼, 브레히트의 저항과 수난의 역정을 살펴서 당시 독일지식인들의 고난상을 돌이켜본다.
토마스 만의 저항과 고난
토마스 만(1875~1955)은 형 하인리히 만과 장남 클라우스 만도 모두 작가인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부덴브로크가(家)의 사람들」, 「마의 산」 등 명작으로 널리 알려지고, 1929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일찍부터 나치의 대두를 위험시하고 ‘이성의 호소’ 등 정치적 강연과 평론을 통해 독일시민들에게 위기를 호소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1933년 국외강연 여행길에서 그대로 망명객이 되어 스위스에 머물렀다.
1936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국적을 얻고 반나치 투쟁의 작품을 발표하자 히틀러 정부는 독일국적과 국내재산을 몰수하고 본 대학 철학과에서 받은 명예박사 칭호까지 박탈해 버렸다. 만은 여기에 대항하여 반파시즘 기관지 「척도(尺度)와 가치」를 발행하고, 1939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 초빙교수로 초청받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40년부터 1945년 5월까지 BBC방송을 통해 독일국민에게 히틀러 타도를 호소하는 반나치 정기방송을 계속하는 집념을 보였다.
[PAGE BREAK]본 대학이 박사학위를 취소하자 이 대학에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나는 순교자이기보다는 오히려 대변자이기를 원한다”면서 정신적인 망명 독일의 대변자 역할을 도맡게 되었다. 1934년 미국을 처음 방문하여 이듬해 하버드 대학이 아인슈타인과 함께 박사학위를 수여하여 조국이 빼앗은 학위를 미국에서 되찾았다. 이때 루즈벨트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백악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망명생활중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바이마르의 롯데」, 「요셉과 그의 형제들」, 「독일과 독일인」, 「파우스트 박사」 등 대작을 잇따라 발표했다. 특히 「파우스트 박사」는 예술성으로나 사상적으로 나치를 증오하고 히틀러 정권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집필한 명작으로 꼽힌다.
나치스 패망 후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하면서 1955년 8월 12일 8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죽기 전 분단된 조국에 대해 “나에게는 동서독 간의 분계선이 없다. 내가 찾은 것은 서독도 아니고 동독도 아니다. 오직 독일 땅, 한 덩어리의 독일 땅이 나에게는 있을 뿐이다”라고 절규했다.
본 회퍼의 저항과 고난
디트리히 본 회퍼(1906~1945)는 반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히틀러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신학자이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동차에 뛰어올라 미친 사람으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하지 않겠는가?” 본 회퍼가 독재에 저항하는 지식인의 행동원리를 제시한 말이다.
베를린 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당시 교수들로부터 ‘천재적 신학청년’의 평가를 들었던 본 회퍼는 히틀러가 집권한 다음날 ‘지도자 개념의 변천’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서 히틀러는 국민을 잘못된 길로 오도하고 있으며, 그의 정치원리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적 지도자를 우상화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권력의 광신자가 된 히틀러는 교회까지도 나치체제에 편입시키려 들었다. 육군 군목 출신의 루드비히 뮐러를 통해 제3제국의 감독이 지배하는 하나의 제국교회를 시도한 것이다. 나치는 이를 위해 ‘신앙운동 독일기독교인’을 결성하여 복음주의교회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독일의 기독교는 뮐러의 수중에 들어가고 “국가사회주의 정신이 곧 교회의 정신이며 국가사회주의라는 의지를 교회의 의지로 대체해야 한다”라고 ‘정부의 교회일체화’ 공작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본 회퍼를 비롯한 독일교회에서는 히틀러의 광적인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다.
저항의 중심에 선 본 회퍼는 고백교회에 속한 목사로서 반나치 투쟁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저항운동 틈틈이 저술활동도 계속하였다. 「기독교 윤리」는 이렇게 하여 집필한 저서이다.
본 회퍼는 ‘미친 운전사’를 차에서 끌어내리고자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하였다가 1943년 4월 5일 게슈타포(비밀경찰)에게 체포되고 베를린에 있는 터겔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2년여 동안 각처의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는 옥중생활을 하다가 나치가 패망하기 직전 1945년 4월 9일 베를린의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게슈타포 장관의 직접명령으로 39세를 일기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PAGE BREAK]
브레히트의 저항과 고난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는 뮌헨 대학 시절부터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은 독일의 대표적인 극작가이다. 뮌헨과 베를린을 무대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모든 문학장르에 걸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여 독일의 당대 최고 작가로 문명을 떨쳤다.
1933년 부인, 아들과 함께 체코의 프라하로 피난, 이때부터 12개국이 넘는 나라를 떠도는 15년간의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치는 1933년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시작으로 자신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자유주의적인 문인, 지식인, 언론인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켜서 많은 문인, 학자를 체포했다.
브레히트는 히틀러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풍자시 「죽은 병사의 전설」을 발표하여 나치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브레히트가 망명한 후 나치 당국은 그의 모든 책을 공개리에 소각했다.
나치의 분서광란은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히틀러가 집권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일간지 나치타우스가베가 1933년 4월 26일 분서대상의 서적 목록을 제시한 것을 계기로 서적의 ‘불온성’을 가늠하는 명단이 나돌았다. 이 해 5월 10일 전국의 대학도시에서 브레히트의 작품을 포함하여 수많은 저명 작가와 학자들의 저서가 소각되었다.
1935년 망명지 파리에서 ‘진실을 쓸 때의 다섯 가지 어려움’을 발표, 이 글이 ‘응급조치를 위한 실천지침’이란 위장된 제목으로 독일에 반입되어 유포되면서 나치 당국은 브레히트의 국적을 박탈했다. 미국에서 나치 패망 때까지 저항하다가 1948년 10월 서독으로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연합군 당국이 미군 점령지 독일에 입국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동베를린으로 가게 되었다. 15년에 걸친 기나긴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극단 베를린 앙상블을 창단하고 동베를린에 전용극장을 마련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1956년 8월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했다.
건강이 점차 나빠져 죽음을 예감하기 시작한 그는 “내가 죽거든 사체는 전시하지 말고 장례식에서는 조사가 없기를 바란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브레히트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온 동독 당국은 장례식을 호화롭게 거행했으며 독재자 울브리히트도 참석하여 거창한 조사(弔辭)를 읽었다.
동서독의 출판인들은 분단시절부터 브레히트의 전집을 준비하여 통일 후 30여 권이 넘는 전집을 공동 출판하여 그의 문학적·정신사적 업적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