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변하고 있다. 오늘날처럼 빠르게 달라지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놀라운 변화에 신기해 하다가도 그 엄청난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휘청거리게 된다. 밖의 세상이 변하는 만큼 우리 생각이나 마음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우리는 늘 무언가 비빌 언덕을 찾고 또 버팀목을 구하곤 한다. 하도 정신없는 세상변화가 어지러운 나머지 어디든 안정된 곳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안온하게 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가깝고 익숙한 자리를 더욱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안으로는 가족이요, 밖으로는 학교다. 언제나 밖에서 지친 나를 품어주고 보살펴 주는 가족, 그리고 언제 봐도 똑같은 눈에 익은 교실환경에다 지루하긴 하지만 몸에 익은 시간표에 따른 일상이 진행되는 학교. 그러다 보면 우리는 이러한 가족이고 학교는 언제부터고 늘 그렇게 있고 앞으로도 내내 그렇게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상 속에 가족이고 학교고 늘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다. 아니 역사를 살펴봐도 가족과 학교만큼 변화무쌍한 제도는 없다.
사람은 사람 사이, 곧 인간(人間)에서만 사람답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인간다운 사회생활, 곧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보살피고 돌보고 이끌어 주어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 그 첫 자리가 가족이고, 그 활동의 첫 내용이 곧 교육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람들이 오늘날과 같이 핵가족을 이루고 산 것도 아니오, 학교에서만 교육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부부중심의 가족은 최근의 일이고 아주 옛날에는 그저 무리를 이루고 사는 집단생활부터 했다. 그러다가 농경사회가 정착되면서 대가족의 형태를 띤 가족유형이 나타나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왔고 이른바 산업화를 통한 근대화 과정에서 현대사회의 가족유형으로 오늘날과 같은 부부와 자녀중심의 핵가족이 나타난 것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그저 집단 안에서 너, 나할 것 없이 모두 교육을 했고 삶 한복판에서 삶 전반에 걸쳐서 교육을 받았다. 그것이 학교라는 틀에 맞추어 제도화된 것은 불과 몇 천년 전의 일이며 그 때에도 학교는 겨우 몇몇 사람, 곧 지배계층만을 위한 기관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면서 가족과 지역사회의 삶 속에서 자연스러운 생활교육을 받았을 뿐이다. 오늘날과 같은 대중화된, 국가 중심의 공교육 체제에 따른 학교가 생긴 것은 산업화와 근대적인 민족국가 형성의 과정에서 질 높은 노동력과 의무를 다하는 국민을 양성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게다가 핵가족화와 더불어 옛날처럼 삶 속에서 교육을 할 수 없게 된 점도 작용하여 생활 속의 교육을 떼어 학교라는 틀과 제도에 맡긴 것이다.
학교중심 아닌 학교만능 교육관
이렇게 만들어진 산업화 시대의 가족과 학교는 나름대로 그 기능과 역할을 나누어 맡았다. 가족은 편안하고 안온한 쉼터이면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삶터, 그러면서 동시에 정서적으로 강한 유대를 갖는 가족 구성원들이 인간관계를 배우고 익히는 겪음터였다. 특히 가족은 비교적 수직적인 인간관계의 축, 곧 아버지 중심의 가족문화를 이루고 자라나는 세대의 사회생활의 준비라는 일차적인 사회화의 장소가 되어준 것이다. 반면에 학교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족에 이어서 흔히 말하는 이차적인 사회화, 곧 본격적인 사회생활의 준비를 해주는 기관이었다.
[PAGE BREAK]개인마다의 특성과 개성을 찾아주고 그에 따라 사람들을 사회가 필요한 곳 적재적소에 알맞게 배분해 주는 일을 한 것이다. 때로는 우리 사회처럼 후발 산업국으로 근대화를 서둘러 하게 된 경우 마치 대규모 공장처럼 경제성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길러내는 역할도 맡고, 빠른 사회변화에 적응시키는 훈련기능도 맡았다. 가족과 학교의 분업은 현대사회를 떠받치는 두 축이었고 그것이 잘 이루어진 사회는 근대화에 성공하여 국민 대다수가 현대사회의 풍요와 복지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비교적 뒤늦게 시작한 산업화를 압축적으로 진행한 우리 사회도 이 단계에서는 적잖이 과장된 가족과 학교의 분업으로 문제는 많지만 겉보기에는 나름대로 성공적인 근대화를 꾀해 왔다. 다만, 흔히 그렇듯이 이런 과장된 분업과정에서 다양한 교육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학교중심 아니 학교만능의 교육관을 낳은 것이 문제였다.
정작 학교나 가족의 교육적 의미나 질보다는 학교 자체, 그리고 그 성과만 따지는 잘못된 교육관에 사로잡히게 된 것은 졸속한 산업화와 압축적 근대화의 가장 심각한 폐해로 우리 사회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걸림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 바로 최근 우리 사회를 거듭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 사람의 위기다. IMF 위기 이래로 경제나 사회 전반에 갖은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지만 결국 그 핵심은 사람이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세상은 또 한번 크게 변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뿐더러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탓에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사람의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사회의 앞날을 열어가려면 그 사람부터 제대로 살펴야 한다. 그 앞뒤를 따져보면 이렇다. 요즈음 일고 있는 세계화나 정보화와 같은 거센 변화의 조짐, 아니 문명전환의 물결에 즈음하여 이러한 가족과 학교라는 우리가 가장 익숙한 제도는 또 한 번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이제 자고 일어나면 새로워질 만큼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이런 격변의 시기 아니 문명전환의 시기에는 그저 저 밖의 환경이나 물건들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 그리고 사람의 관계조차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가족문화다. 핵가족조차 분열되고 해체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 관계 속에 있는 사람 자체도 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 곁의 자라나는 세대, 청소년들이 그렇다.
변화에 응답할 준비가 안된 학교
자라나는 세대인 청소년들은 어른세대에 비해 전혀 다르고 새로운 사람들이다. 사고방식이나 감수성뿐 아니라, 삶의 방식과 느낌, 버릇, 기호조차 어른들과는 딴판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인 미래의 주인공이다. 예전 우리 자랄 적처럼 어른들이 나름대로 예측 가능한 미래를 위해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면 좋겠다고 충고하거나 강요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컴퓨터 능력과 같은 미래사회의 핵심적인 역량에서는 이미 어른들을 앞지르고 있고 어른 세대의 상상을 뛰어넘은 미지의 시공을 바라보며 나름대로 제 삶과 앞날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른들은 가족 안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이들의 새로움과 다름을 감당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하며 그저 자신들의 뜻과 생각을 따라주지 않는다고 탓만 한다. 이들은 벌써부터 어른들의 기존의 가치나 제도에 웃자라 버렸고 어른들이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문화를 스스로 만들고 또 누리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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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가족과 학교의 역할과 기능, 곧 교육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가족문화의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어 앞으로는 기본적인 기능 이외에 가족의 교육적 역할과 기능은 점점 더 약화될 것이다. 반면에 학교의 교육적 역할과 기능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 우리 학교교육으로는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수가 없다. 우리는 대개 교육, 특히 학교교육을 기존의 가치체계나 지식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전수하는 보수적인 역할과 기능에 치중하여 강조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문명전환의 시기에는 그보다는 앞날의 새로운 삶의 틀을 준비하는 역할과 기능이 더욱 중요하다. 불행하게도 우리 학교교육은 전혀 이러한 과제를 감당하지 못하며 그 준비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
한편으로는 산업화 시대, 소품종 대량생산의 방식에 맞게 획일적이고 경직된 학교교육이 유지되고 있다. 다른 한편 학력주의 풍토 탓에 여전히 극한 경쟁의 교육이 판을 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두 시대착오적인 학교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시대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요구하고 다양성과 개성을 촉구하는데, 학교는 그 요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또한 학교는 이제 더 이상 학습의 중심도 아니오, 교육의 독점적인 장소도 아니다. 예전에는 학교가 학습의 중심일 뿐 아니라, 지역사회 지식의 중심이었고 교사는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벌써 오래 전에 이러한 학교의 위상은 달라졌다. 하다못해 학습기능으로 보더라도 편협한 입시위주의 학습으로만 본다면 학원에 그 주도권을 넘긴지 오래고 새로 등장한 컴퓨터에 학생들의 관심을 빼앗기고 있다. 지식정보사회에서는 학교뿐 아니라 다양한 학습의 채널이 열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의미에서 영국에서 나온 어느 보고서에는 학습중심으로서의 전통적인 학교는 30년 안에 없어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비단 학습뿐 아니라 위에 이야기한 자라나는 세대인 청소년들이 제 삶을 살아가기 어려운 곳이 바로 우리 학교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청소년이란 없다. 그저 학생만 있을 뿐이다. 이 땅에서는 ‘1318’이라는 중요한 삶의 시기에 제 나이 또래의 제대로 된 삶을 사는 청소년이 발 부칠 곳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학교 밖의 문제 청소년, 학교를 벗어난 일탈 청소년이 있을 뿐이다. 우리 자라나는 세대는 어른들이 만들고 사회가 시키는 학습을 강요당하는 학생신분에 묶여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학교에 갇혀 있다. 0교시부터 보충수업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낸다. 학교의 일상은 지루하고 답답하고 또 폭력적이다. 눈에 보이는 왕따나 체벌뿐 아니라 학력사회 전반의 경쟁주의에 찌들은 구조적 폭력 탓이다.
학교는 삶과 체험의 장소가 돼야
지금, 여기 우리 학교는 청소년들의 삶이 없다. 삶이 없는 학교는 즐겁지 않다. 즐겁기는커녕 지겹고 힘들고 짜증난다. 열악한 학교환경에서 획일적이고 경직된 수업문화에 이르기까지 어디고 즐거울만한 구석이 없다. 그러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학교생활이 고단하고 힘겨울 뿐이다. 오죽하면 학교붕괴니 교실붕괴 같은 말들이 생겨나겠는가? 하다못해 이를 견디지 못한 아이들은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하나씩 둘씩 학교를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학교는 이렇게 아이들에게 ‘혐오시설’이 되어가고 있다.
[PAGE BREAK]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 학교가 생기면서 학교란 본디 삶의 자리이며, 즐겁고 신나는 곳이었다. 또 누가 뭐라 해도 학교는 마땅히 즐거운 곳이어야 한다. 학교란 미래를 준비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을 살고, 누리고, 즐기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억지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학교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학교가 삶과 체험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배움터뿐 아니라, 삶터, 겪음터로 학교가 탈바꿈 해야한다. 그래야만 사람을 만나, 사귀고, 서로 바뀌며 살아갈 수 있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학교는 놀이터, 싸움터가 되어야 한다. 머리뿐 아니라 가슴과 손발을 써서 실컷 놀고, 또 다름을 알고 배우며 서로 다투고 함께 사는 방식을 익히는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학교에나 즐거움은 찾아들 것이다.
지금 당장 학교를 한꺼번에 이런 장소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필요성뿐 아니라 가능성은 아주 커지고 있다. 먼저 학교가 답답하고 지루한 학습의 장으로, 공부하는 자리로만 머물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앞서도 이야기한대로 그 학습과 공부는 이미 다른 통로가 많아졌다. 학교가 벌써 빼앗긴, 그런데 여전히 고수하려는 학습의 장으로서의 시대착오적인 독점을 포기하고 새롭게 거듭나기만 하면 된다. 배움터 뿐 아니라 삶과 겪음의 터전으로 말이다. 또 다른 한편 학생이 아니라 청소년인 자라나는 세대는 언제라도 이런 삶과 겪음을 학교 안에서 펼치고 누릴만한 풍부한 바탕을 갖추고 있다. 상업화되고 대중화된 문화뿐 아니라 이들이 만들고 있는 다양하고 힘있는 삶의 문화들이 그것이다. 이것을 학교에 받아들이고 교실로 들여오기만 하면 된다. 지금이라도 교실 한 구석, 수업 한 자락, 학교 한 공간에 이러한 가능성이 실현될 틈새만 만들면 된다. 이 틈새를 통해 학교 안에 즐거움이 생기고 머물 수 있도록, 또 자리잡히도록 차츰차츰 학교의 틀이며, 교실생활의 얼개며, 교육과정의 축을 바꿔 가면 된다. 그 자리는 그렇다고 멀리 볼 것도 없이, 갖은 걸림돌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학교에서도 즐거움을 찾고 또 만들어내려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