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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강대국 전쟁체험인식(상)

고조선과 고구려 싣에 만주와 중원을 차지했을 때는 말할 것도없거니와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영토가 줄어들었을 때도 우리 민족은 세계(주변) 강대국과 거의 빠지지 않고 전쟁을 치뤘다.

우리 나라가 언제 세계 강대국들과 전쟁을 했느냐고 의아스럽게 여길 이도 적지 않겠지만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다. 그 역사를 차분히 살펴보기로 하자.

김삼웅(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한민족의 형성 시기인 고조선 시대 당시 중국의 강국 한나라와 전쟁을 치른 위만조선을 시작으로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 백제와 당나라와의 전쟁, 고려와 여진·몽골과의 전쟁, 조선과 일본·청국·러시아와의 전쟁, 대한제국과 미국·프랑스·영국·일본과의 전쟁,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일본·독일에 대한 전쟁 선포, 해방 후 중국·소련과의 전쟁 등 그야말로 세계 최강국들과 거의 빠지지 않고 전쟁을 치렀다.
위만조선은 한나라와 1년이 넘는 전쟁으로 결국 패전하여 한사군이 설치되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백제·고구려를 80여 년 동안이나 침략하였으며, 고려 시대에도 북방민족의 끊임없는 침략을 겪었다. 조선 시대에는 병자·정묘호란과 임진·정유왜란의 피맺힌 전쟁을 치렀다. 조선조는 대마도 정벌에 나서기도 하고 고려조 이래 끊이지 않는 왜구의 침략을 격퇴했다.
고려 시대는 456년의 왕조 기간에 417회의 전란을 겪었고 조선왕조 519년 동안에는 360회의 난리를 치렀다. 이 수치는 대외 전쟁과 외우내환이 포함된다. 평균 1년마다 한 차례씩 환난을 겪은 셈이다. 지정학상 위치 때문인지, 통치자들의 외교 역량의 부족 탓인지, 주변 세력의 정세가 바뀔 때마다 전쟁을 겪고, 역외(域外) 강대국들의 무고한 침략을 받아야 했다.
민족형성기 이전부터 시작된 외세의 침략은 민족 내부의 통합과 국력신장·문화창달에 어려움으로 나타나고, 거듭된 외우내환은 민족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세계사적으로 한민족처럼 세계 강대국들과 어떤 형태의 전쟁이었던 전쟁경험을 가진 나라는 그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외적과 전쟁을 하지 않은 기간이 그나마 평화의 시대였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하였다. 신라의 반도통일 이후는 당나라의 영향력, 고려와 몽골 전쟁 뒤에는 몽골의 부마국, 한말 이후의 일제 식민지, 6·25전쟁 이래 지금까지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쟁 아니면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 상태에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민족문화와 민족언어를 유지해 온 것 또한 세계사적으로 거의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주변의 여진·거란·몽골 등이 대부분 한족(漢族)에 동화되거나 민족자체가 소멸된 것과 비교할 때 역시 독특한 현상이다.
수 천년 동안 지속돼 온 외국과의 전쟁은, 그것도 패배로 끝나기 일쑤인 전쟁의 결과는 정신적으로 국민에게 외세지향과 사대의식을 심어주는 계기를 만들고, 대결의 상대를 내부에서 찾게 되는 분열주의를 파생시켰다. 극심한 붕당정치와 전쟁·지역갈등·집단이기주의 등은 이러한 결과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는 물론 일본 관학자들과 한국 어용사가들이 한국사의 식민사관을 강조하면서 상투적으로 제기해 온 이론이다. 식민사관론자들은 정신적 사대주의와 지리적 반도성을 꼽았다. 이들의 주장과는 상관없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지리적 조건과 역사변천 과정은 민족성과 국민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민족성과 국민정신은 지리와 역사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에 어떠한 역경에서도 이를 극복해 나가는 민족적인 저항정신과 도전의식, 그리고 투철한 민족혼은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게 하고 사회적 역동성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우리 민족이 고대 이래 외국과 치룬 크고작은 전쟁의 사력(史歷)을 살펴보기로 하자. 편의상 ‘전쟁’ 이란 용어를 쓰고 있지만 어떤 경우는 일방적으로 침략을 당한 경우도 있고, 혹은 제3국의 침략전쟁에 동맹 또는 동원된 사례도 없지 않았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PAGE BREAK]위만조선과 한나라 전쟁

위만조선은 BC 108년 중국 한나라 무제의 침략을 받고 1년여 동안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한나라 무제는 대외 팽창정책에 적극적이었는데, 위만조선에 대한 침략도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무제는 BC 109년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에게 군사를 주어 육지와 바다를 통해 고조선을 공격케 했다.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1년여 동안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자신의 아들까지 포함된 중신들의 한나라 투항으로 왕검성이 함락되고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한은 위만조선 지역에 낙랑군을, 옛 임둔 지역에 임둔을, 옛 진번의 땅에 진번을 각각 설치하고, 이듬해 고구려 영토 예맥에 현도군을 설치했다. 그 후 BC 82년에 진번, 임둔 양군을 각기 반씩 폐기하고 나머지 반은 낙랑과 현도에 통합했다. 얼마 후 현도군마저도 토착인들의 저항으로 서북쪽으로 쫓겨 소자하 상류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낙랑군만은 옛 진번군의 7현을 합친 대낙랑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끈질긴 공격으로 낙랑군은 313년(고구려 미천왕 14) 설치된 지 약 420년 만에 고구려 영토에 편입되었다. 낙랑군의 위치는 학자마다 다른데, 지금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지역의 일부로 인식하고, 북한 학자들은 요하 부근이었다고 주장한다. 민족형성기에 고대국가 중심지에 한족이 420년이나 똬리를 틀게 된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6세기말 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양제는 598년, 612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고구려를 침략했다. 이에 앞서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 문제는 고구려를 침략할 계획을 세운다. 이를 간파한 고구려는 598년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했다.
수나라는 이를 구실 삼아 30만의 대병력으로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고구려 군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요하를 건너지 못했으며, 바다를 통해 침략해 들어온 수군도 폭풍을 만나 상륙하지 못한 채 퇴각했다.
그 후 수 양재는 612년 100만 군사와 병참 지원병 200만 명 등 도합 300여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을지문덕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를 맞아 요동성 싸움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더 진격할 수 없게 된 수나라는 별동군 30만으로 평양성을 직접 공격케 했으나 살수에서 섬멸되어 살아 돌아간 자가 2800여 명에 불과했다. 패배 뒤에 613년과 614년에도 계속 공격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격퇴하여 수나라는 618년에 멸망하였다.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

618년에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 나라는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가능하지 않아 두 나라는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당 태종은 그동안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고구려 원정준비를 서둘러 645년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당군은 한 달 여의 전투 끝에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고려는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을 중심으로 당군의 치열한 공격을 격퇴시켰다. 두 달 동안의 끈질긴 공격으로도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던 당은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당나라는 그 뒤로도 고구려 침략의 뜻을 굽히지 않고 수 차례에 걸쳐 공격해 왔다.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한 후 다시 소정방·설인귀 등을 주장(主將)으로 삼아 몇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그 때마다 고구려는 군·민이 한덩어리가 되어 침략군을 격퇴했다.
그 후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고구려를 다시 공격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은 다음 세 아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국론이 분열하면서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멸망했다.
[PAGE BREAK] 백제와 당나라 전쟁

660년 나당 연합군은 18만 대군으로 백제를 침공했다. 소정방이 이끈 당군 13만여 명은 해로를 통해, 김유신이 이끈 5만 신라군은 육로를 통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이 거느린 5천 결사대가 최후 저항을 시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사비성이 함락되고 이 해 7월 18일 의자왕이 투항함으로써 왕을 비롯한 왕자, 대신, 일반 백성 등 수많은 사람이 당나라로 끌려가고 700년 백제왕조는 멸망했다.
백제의 멸망 후 부흥군이 일본의 구원병과 합세하여 백강에서 나당 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백제 유장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근거지로 삼아 3만여 군대를 모집하여 나당군을 공격, 200여 성을 수복하는 전과를 올렸다. 왕족 복신과 승려 도참은 주류성에 잔존한 백제군을 수습하여 나당군에 맞섰다. 한때 사비성을 포위하여 점령군인 당군을 고립시키고 탈환 직전까지 갔으나 신라군의 내습으로 끝내 성을 탈환하지 못한 채 백제 부흥운동은 좌절되었다.


신라와 당나라 전쟁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당은 본심을 드러내어 신라까지 병합하려 했다. 이에 대해 신라는 필사적인 대당 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신라의 대당 항쟁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계속되었는데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을 크게 무찔렀다. 신라는 이때 크고 작은 전투에서 22회를 승리로 이끌어 대당 항쟁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신라가 고구려의 부흥군을 지원하여 당을 공격하고 백제의 옛 지역을 장악하자 당은 설인귀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와 싸우게 했다. 신라는 설인귀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당의 이근행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매소성에 내려와 주둔하자 매소성을 공격하여 당군을 크게 격파, 말 3만 필을 노획할 만큼 대승을 이루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나당전쟁은 신라의 우세로 전개되었다. 매소성은 경기도 양주 근방으로 추정된다.


발해와 당·거란 전쟁

발해는 제2대 무왕 때 당이 흑수말갈(黑水靺鞨) 족을 이용하여 침략하자 726년에 흑수말갈을 공격했다. 흑수말갈은 말갈족의 하나로 다른 부족이 모두 발해와 합류했거나 포섭되었지만 상당한 힘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당은 흑수말갈을 이용하여 배후에서 발해를 공격하게 하고 어부지리를 얻고자 획책했다. 726년 흑수말갈이 당의 보호를 요청하여 흑수주로 편입되면서 발해에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발해 무왕은 당을 칠 것을 결심하고 먼저 당과 동맹을 맺은 흑수말갈을 쳐서 완전히 굴복시켰다.
732년에는 고려 장문휴가 당의 산동반도 덩조우를 공격했다. 이에 당은 이듬해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으나 실패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원정을 보냈으나 모두 실패했다. 발해 무왕때 덩저우를 공격한 것을 계기로 당이 발해를 침공했을 때 신라는 당의 요청에 따라 발해를 공격했으나 기상관계로 실패하고 말았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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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여진 전쟁

만주 동부 지역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여진족은 그 명칭이 숙신·읍루·물길·말갈·만주족 등으로 바뀌었다. 12세기 초부터 세력이 커지면서 고려의 영역을 자주 침범해 왔다.
이에 고려는 1104년(숙종9) 윤관이 섬멸전에 나섰으나 패배하고 1107년 다시 윤관을 대원수, 오연총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17만 대군을 동원해 여진족 정벌에 나섰다. 그 결과 135개 촌락을 평정하고, 1108년에는 이 지역 안에 9개의 성을 쌓고 남쪽지방 군사와 백성을 이주시켰다.
그 뒤 9성에 대한 여진족의 침습이 심해지자 윤관은 다시 여진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여진이 9성의 환부를 애걸하고 9성 방어에 어려움이 많다고 판단하여 9성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여진은 1117년 금(金)을 세워 고려에 형제 관계를 요구해 왔다. 1125년에는 요를 멸망시킨 뒤 송을 공격하여 중국의 화서 지방을 지배하고 고려에는 사대의 예를 강요했다.


고려와 몽골 전쟁

13세기 초 몽골 고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족은 테무진이 부족을 통일하면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1206년(고려 희종2) 테무진은 황제로 추대되어 대몽골국을 세웠다. 이후 정복전쟁을 추진하여 서하·금·서요 등을 정복하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앙 아시아는 물론 서아시아, 남러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몽골국은 1231년(고종18)부터 1258년까지 6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고 80여 년 동안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면서 사실상 고려를 예속화했다.
1231년 몽골군의 제1차 침입 때는 고려군이 구주성에서 적군을 크게 격퇴하고 1253년 몽골의 제5차 침입 때는 충주성 전투에서 승전하는 등 고려는 국가총력 체제로서 대몽항전을 벌였다. 특히 충주에서는 관군이 성을 버리고 도주할 때 노군(奴軍)과 잡류(雜類)가 협력하여 침략군을 물리쳤다.
또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것을 반대하여 삼별초가 전라·경상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진도에 이어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서 3년 동안이나 여몽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지배하려는 몽골과 종속적 위치를 감수하면서도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중들의 항쟁이었다.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오래 동안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반몽적·반정부적인 민중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후 몽골(元)은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시작으로 쌍성총관부, 동녕부 등 통치 기관을 설치하고 이를 통해 고려를 지배했다. 원나라의 국운이 쇠약해진 1370년(공민왕19) 동녕부를 요동으로 옮기고 자신들이 차지했던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었다. 공민왕은 동녕부가 요동으로 옮겨진 이후에도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대규모 동녕부 정벌을 추진했다.


고려와 명나라 전쟁

철령(鐵嶺) 지역은 원래 고려 영토였다. 14세기 중엽 한 때 반역자들의 투항으로 원나라의 지배에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고려에 수복되었다. 그런데 새로 일어난 명나라는 철령 이북땅을 명나라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곳을 요동에 귀속시키려고 책동했다.
이에 고려는 국방력을 강화하는 한편 문전·고원·영흥·정평·함흥 등과 공험진까지 고려 영토임을 밝히고 원나라에 철령위 설치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도 명나라가 1388년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站)을 두는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자, 고려는 철령위 설치의 중계 지점인 요동을 정벌하기로 했다.
고려는 1369년(공민왕 18)부터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왔는데, 우왕 때의 친원 정책 이후 명나라는 무리한 세공(歲貢)을 요구하고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1388년에는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고 요구하자 명나라 정벌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요동은 남만주 요하의 동쪽 지방으로 1360~1370년대 초에 고려는 이 지역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이곳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에게까지 통치영역을 넓히고자 세 차례나 출정해 큰 전과를 거두었다. 원나라 멸망 이후 명나라는 이곳에 요동 도지휘사사를 두어 만주 경략을 꾀하면서 고려와 여러 가지 충돌을 일으켰다. 이에 고려는 요동 지방을 공격해 명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 일파의 회군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8월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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