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그리고 있는 학교의 모습은 이렇다. 전체의 획일만으로 가득 차 개인은 없고 집단만 있는 제도교육의 모순을 이기는 곳. 온갖 이기주의가 흘러 넘쳐, 함께 살아가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현실 사회의 모순을 이겨내는 길을 찾는 곳. 단지 교육을 받는 대상에만 머물렀던 어린이가 교육의 한 주체로 튼튼히 서는 곳. 학교의 구성과 운영, 교육과정과 진행, 자료와 환경, 그 어떤 면에서든 교육의 네 주체가 균등한 권리와 의무로 자치를 실현하는 곳. 자기 하나 살기에 바빠 허둥대는 인간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살리는 상생의 경험으로 가득 차 있는 곳. 어린이 하나하나가 자기의 개성과 창의성을 활짝 꽃 피우면서, 약자를 편드는 공동체의 정의로운 평등을 체험하는 곳. 인간과 자연 전부를 껴안는 생명에 대한 존중을 깨달아 나가는 곳. 낱낱으로 흩어져 기존 사회의 가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힘을 모아 새로운 가치 질서를 창조하며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도전하는 인간상을 목표로 하는 그런 곳이 우리가 꿈꾸는 학교다”(김희동).
2. 제도교육의 대안을 꿈꾸는 학교
대안학교가 우리 나라에서 언론 특히 영상매체와 국민대중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말 학교위기 담론이 공론화되고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대안교육은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대안교육을 무엇으로 보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흔히 대안교육(alternative education)은 제도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고자 하는 일련의 교육적 흐름을 통칭하는 말이다. ‘대안’이라는 것이 비교와 복수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대안교육이라는 말도 일의적(一義的)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즉 ‘기존에 존재하는 학교교육’이 아닌 또는 그것과는 구별되는 교육형태라고 할 수 있다. 대안교육을 이렇게 제도교육의 보조적 또는 보완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대체적 의미로 파악해본다면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의 대안교육의 효시로는 국가주도의 교육과 국민순치 교육에 대한 저항이데올로기 기구로서의 노동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야학은 의식화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학교교육에서 소외된 이농 도시빈민청년을 대상으로 노동자의 권리 및 사회 참여적 태도를 기르는 등 국가이데올로기 기구로서의 제도교육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기의 대안적 교육적 형태는 공권력에 의한 가혹한 탄압과 주류언론이 의식화교육이라고 굴레를 씌움으로써 무력화되었으나 노동자의 권리신장과 노동민주화에 공헌하는 역할을 하였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초보적 형태의 대안 교육운동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언론과 여론이 대안교육을 다시 주목을 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 교육의 위기가 표면화된 이후부터이다. 1990년대에 들면서 성적경쟁에 의한 학생자살인구와 중도탈락학생이 증가하고 학교폭력이 증가하면서 교육문제가 쟁점화 되고 그 동안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입시교육과 무관한 대안적 교육프로그램을 묵묵히 운영해왔던 비정규학교들이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게 되면서 대안교육이 일반인의 입에 회자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교육부가 1996년말 학생들의 학교 부적응 현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도입의 일환으로 대안학교 설립이 가능해지고 그 결과 1998년에 특성화고등학교라는 새로운 유형의 학교가 법제화되어 직업 분야와 대안교육 분야에서 새로운 학교가 설립, 운영되게 되면서 더욱 일반화되었다.
[PAGE BREAK]기존의 대안학교가 특성화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제도권에 진입하면서 대안교육의 확산에는 많은 기여를 했지만 그 대안성의 확보에는 오히려 적지 않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대안학교 운영자 및 참여자와 같은 프로 대안교육론자들의 교육지향이, 기존의 학교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안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아마추어 대안교육 희망자들의 순수한 관심과 요구에 따라 희석된 부분이 있으며, 더욱이 학교교육의 변화 개혁을 추구하고자 하는 국가의 의도에 이용되었던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대안사회의 건설(예컨대 생태주의)을 위한 교육실천을 지향하는 몇 개의 학교를 제외하고는 부적응아의 재적응 교육을 통해서 ‘세상과 화해하는 교육’을 지향하고 있고 이런 현상이 대안교육의 개념을 한정시키는 결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물론 앞에서 말한 대로 ‘대안’이라는 것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를 말하고 비교를 의미하기 때문에 재적응학교형 특성화고등학교가 대안교육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이들 학교들이 취하는 교육내용과 교육방법들은 기존의 학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안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고 거기에 도달하고자 하는 방법을 교육한다는 대안성과 적극성의 차원에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대안교육’과 ‘세상과 화해하는 대안교육’의 차이점을 밝혀두고자 하는 것이다. 거칠게 분류해 본다면 간디학교와 푸른꿈 고등학교, 풀무농업기술학교 등이 전자에, 영산성지고등학교나 두레자연고등학교, 양업고등학교 등이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빛고등학교나 세인고등학교는 학생 부적응 문제보다는 교과(학문)의 본질적 학습을 천착한다는 면에서 앞의 학교들과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3. 우리 대안학교의 지향과 방법
대안교육은 교육에 뜻을 둔 자들이 세상과 불화할 때 나타난다. 외국에서 대안교육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1960년대라면 우리의 경우 1990년대부터 본격화되어, 대중적으로 인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모순과 교육적 모순이 중첩되어 나타날 때 그 해법의 모색에서 대안적 삶의 양식의 탐색방법으로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1990년대의 우리 교육문제가 그만큼 심각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대안교육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출현에 따른 근대교육의 사회적 적합성의 위기, 전지구적 생태위기, 근대적 개인주의의 문제 등 현대사회의 근본적인 한계점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이종태, 2001). 우리의 대안학교의 이념적 지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간디학교나 푸른꿈고등학교는 생태위기에 따른 생태주의적 배경에서 출발하였고 기타 다른 대안학교들은 근대적 개인주의의 문제인식에 대한 공동체교육에 대한 믿음에 상당한 정도로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전체 대안학교의 이념적 지향에는 공통점이 있다(권현숙, 1999).
첫째, 대안교육은 인본주의 교육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기존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학습을 배제하며 인간 스스로의 탐구에 의한 학습을 강조한다. 한 아이가 한 인간으로서 인정될만한 규모로 운영되는 학습체계인 인간규모(haman scale) 교육운동을 표방하며 따라서 작은 학교를 지향한다. 기숙사제 학교를 지향함으로써 교사와 학생들의 완전한 일체감의 획득을 통해 학생지도에 임하고 마음공부(영산성지, 화랑고), 현실요법(양업고), 자체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둘째, 대안교육은 학습자의 개별의지와 판단을 최대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 교육사상을 가지고 있다. 대안학교도 미리 짜여진 교육과정을 운영하지만 학생들의 교육과정 참여여부를 상당한 정도로 학생들에게 위임하고 있다.
셋째, 대안교육은 학생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발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교육을 실천함에 있어서 주도면밀하게 정해진 방향으로 학생들을 끌고 가기보다는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맞추어 가면서 가능한 그들을 수용한다는 차원에서 낭만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안학교 교사들의 교육적 성향이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것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각종 청소년문제도 교육의 강압적 작용에 대한 저항적 행위라고 본다. 섬머힐과 같은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 대안학교에서도 자유와 관용의 정신이 지배되고 지켜진다. 상당한 정도의 일탈행위도 학교 안에서 수용되고 회복을 기대하고 기다려진다.
[PAGE BREAK]넷째, 생태주의를 전면적으로 표방하지 않는 대안학교에서도 대체로 내면을 들여다보면 생태주의적 사상이 담겨 있다. 생태주의는 평화교육의 한 맥락에서 환경교육이나 인권교육, 미래교육 등으로 연결되기도 하며 대안교육을 실천하는 한 방법이 되고 있기도 하다. 대안교육의 실천이 자연과 더불어 또는 자연친화적인 농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학교에서 도입하고 있는 노작교육은 노동교육의 차원에서보다는 오히려 생태주의나 인성교육적 의도가 더 크다고 보여진다. 다수의 대안학교에서는 소규모라도 텃밭을 확보하고 노작체험을 할 수 있도록 권장하고 있으며 두레자연고등학교나 풀무농업기술학교는 한 달 이상의 중국농장 체험을 하도록 하고 있다.
4. 대안교육의 확산을 위하여
현재 우리 나라에는 특성화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대안적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는 비정규학교 또는 시설들이 많이 있다. 또한 이들이 지향하는 교육목표도, 교육방법도, 교육현실도 다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모두 일반화시켜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더욱이 척박한 교육풍토와 사회적 무관심,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희생 속에서 지금의 대안학교교육의 성과를 일구어내고, 위기를 맞고 있는 공교육체계의 개혁에 많은 영감과 지혜를 주고 있는 대안교육론자들의 수고와 눈물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대안교육의 확산을 위하여 몇 가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대안학교의 위치성을 문제 삼을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대안학교 하면 농촌(또는 산골)에 위치한 소규모의 기숙학교를 암묵적으로 상정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대안교육이 지향하는 이념과 방법을 실현하기 위해서 이러한 조건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일반 학생들의 대안학교에 대한 접근가능성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학생들이 자신의 가정과 생활근거지를 떠나야 하며 기숙사 생활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기 때문에 대안교육이 표방하는 이념과는 달리 중산층 부적응아를 위해 기능한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둘째, 대안학교 재정운영의 영세성을 문제 삼을 수 있다. 대부분의 대안학교는 대안학교에 뜻이 있는 설립자와 교사들의 기꺼운 희생과 헌신성에 기초하여 운영되고 있다. 학생들의 등록금만으로는 학교운영이 어렵고 교사들의 보수문제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교육청에서 교사 인건비가 지급되어 차차 사정이 나아지고 있으나 인건비가 정규 교과 교사에게만 한정되어 있고 대안학교의 성격상 다양한 종류의 교사와 보조자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안학교의 살림이 전체적으로 아주 궁하다. 아직까지 인건비를 지원하지 않은 교육청도 있어 학교를 방문했을 때, 40만원 남짓의 월급으로 생활한다는 교사의 고백이 여전히 짠한 상태로 남아 있다. 교육청의 지원과 함께 대안학교를 설립한 종교단체의 후원과 일반시민 후원회의 활성화 및 지원비에 대한 감세 등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셋째, 재정규모의 영세성은 학교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운영과 교원의 안정적 양성, 임용 및 관리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이것은 대안학교 교사들의 생계 위협과 이로 인한 높은 이직률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교사 노동조건의 경시,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학교운영은 단기적인 것은 몰라도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넷째, 대안학교의 기능과 학생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이것은 대안학교가 특성화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양성화되면서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던 전제이기도 하다. 대안학교가 지나치게 중도탈락생 등 부적응아를 중심으로만 문제에 접근했다는 비판인 것이다. 즉 ‘끼’있는 학생을 발굴해 교육한다는 적극적 차원보다는 학교부적응 학생의 사회재적응을 돕는 차원으로 대안교육의 본래의 목적과 기능을 한정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다섯째, 대안학교가 특성화고등학교라는 형태로 제도권에 진입하면서 대안교육의 유연성을 잃어버릴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이것은 이상(理想)이 제도화되면서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이라 할 수 있는데, 교육과정의 작성과 운영에 대한 정부의 간섭, 학교형식의 고집, 건물 속으로의 안주, 형식의 강조가 그 예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대안교육과 입시교육과의 절충의 문제가 남아 있다. 대학입시가 이데올로기화하고 있는 우리 교육현실에서 대안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나 교사 모두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실정이다. 지금은 여러 대학에서 특성화고등학교 졸업생들의 특별전형을 받아주어 이 문제가 다소 완화되고 있지만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숙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