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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옷이 날개야!

박춘길 /경기 의정부 신곡중 교장


 내 고종사촌 누나 하나가 성북동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었다. 전문적이고 고급스런 그런 의복 가게가 아니라 아이들로부터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잡다하게 여기 저기 걸려 있는 그런 가게였다. 누나라고 하지만 두 살 위의 같은 또래로써 함께 장난치며 자랐기 때문에, 심심해서 잡담이나 늘어놓고 싶을 땐 그 가게에 놀러가곤 했다.
 나는 일단 그 누나와 함께 있기만 하면 내 친 누나보다도 더 포근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 친누나는 이러 저런 잔소리를 하며 아직도 나를 어린애로만 취급하는 듯한 느낌 때문에 약간 주눅이 들어 있었지만 이 누나만큼은 나의 진한 농담도 흉금 없이 잘 받아 넘겼으므로 마음이 가벼워 좋았다. 그런데 그 가게를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누나의 쾌활한 성품에 알맞게 운영되는 그 옷가게에 가면 우선 돈을 안 들이고서도 이런저런 의상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고 또한 옷에 따라 사람들의 개성이 묘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우선 옷가지들만 살펴보아도 모두 특색이 있었다. 색채는 말할 것도 없고 디자인 또한 가지각색이어서 옷 자체를 창조하는 사람들의 재능 또한 갖가지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런 옷은 누가 입을까? 저런 옷을 찾는 사람도 있을까? 저 옷은 색채에 비해 너무 디자인이 복잡하지 않나? 저 옷은 질감에 비해 너무 단순해서 보 잘 것이 없는데…"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옷이 아무리 다양해도 다 임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이었다. 옷을 사기 위해 옷가게에 들른 사람들은 우선 자기의 독특한 취향에 따라 굳은 표정으로 의복 고르기에 심취되고 자신만이 내릴 수 있는 최적의 평가로 제 몸과 개성에 어울리는 의복을 찾는 것이다. 그러다가 낙점이 될 만한 옷이 있으면 이리 대보고 저리 대보고 또는 거울에 비춰보고 의복에 자기를 맞추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는 것에 흥미를 느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겉모습만큼이나 개성 또한 가지각색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걸려 있는 옷들 중에는 아무리 봐도 희한한 옷이 한 벌 있었다. 그 옷은 색상 자체가 요란할 뿐만 아니라 디자인 또한 여느 옷과는 매우 다른 면모가 있었다. 사실 옷이란 디자인이 좀 다르더라도 기본적으로 호주머니나 깃, 단추 등은 각자 정해진 위치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 옷은 우선 그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부터 거부하고 있었다. 어쩌면 있어야 할 곳을 일부러 피했다고 하는 편이 더욱 적절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선 앞부분에 있는 깃이 뒤에도 똑같이 붙어 있어서 옷을 보면 어디가 앞인지를 구분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또 양팔에 호주머니가 붙어 있는가 하면 양어깨의 견장은 짝짝이로 붙어 있었다. 더구나 옷의 색채 또한 부분마다 달라서 혼란스럽다 못해 그 옷을 보면 마음이 뒤틀려 안정이 되지 않았다.
 상점에 들른 사람들 또한 나와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 또한 진열된 옷을 따라 한바퀴 휙 둘러보다가도 그 옷 앞에 이르렀을 때는 신기한 듯 한참동안이나 그 옷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때였다. 새침한 표정으로 상큼하게 들어온 아가씨 하나가 다른 사람들처럼 옷을 따라 죽 돌다가 그 옷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고 여느 사람들처럼 한참동안이나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옷을 만지작만지작하더니 아무 말 없이 휭 나가버렸다. 그 때였다. 그 아가씨의 모습을 대변이라도 하듯 고종사촌 누나는 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분명히 저 옷은 누군가에게 제일 좋은 옷으로 팔릴 거야…. 그런데 저 아가씨가 마음에 두는 것 같구먼"
 그 때 나는 누이를 빠끔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그 아가씨가 옷에 대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 ?"
 "옷 장사를 하다보면 잡히는 '감'이라는 게 있는 법이야"
 내가 묻는 말에 누나는 자신의 감이 틀림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감이고 나발이고 그 상큼한 아가씨가 그 옷을 살 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옷에 대한 생각은 내 머리 속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고 우리들의 화재 또한 잡담으로 이어져 그 날 저녁은 그렇게 보냈다. 그러던 중 며칠이 지나가고 어느 비오는 날 저녁이었다. 나는 출출한 참에 소주 한잔이 생각이 났다. 술을 잘 하지도 못하면서 TV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본다거나 비오는 날이 되면 한 잔 하고픈 충동이 가끔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혼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너무 청승맞아 싫었다. 그래서 내 머리 속은 이미 덤불에서 바늘이라도 찾듯 이 사람 저 사람 술친구가 될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 사람은 만나려면 시간이 너무 늦었고 이 사람은 간단한 소주를 마시기에는 너무 벅차고 이 사람은 집에 없을 게고…"
 그러다 보니 또 다시 고종사촌 누나에게 생각이 머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있으면 가게문도 닫을 시간이고 또 한 잔 하면서 그 동안의 동향도 들을 겸 이 시간에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고종사촌 누나말고 누가 있으랴! 당장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주 한 잔 얘기에 누나의 낭랑한 목소리는 이미 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나는 단 숨에 누나 옷가게로 향했다. 내가 옷가게에 도착했을 때였다. 누나는 밖에 걸어두었던 옷가지들을 이미 안으로 들여놓은 상태였다. 누나는 장사가 잘 되었을 때면 으레 흥얼거리는 목소리로 나를 맞았다.
 "웬 일이야. 술타령을 다 하게"[PAGE BREAK]  그렇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누나가 더 빨리 가고픈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누나의 손놀림을 보고 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누나가 마지막으로 돈 괘를 정리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문이 확 열리더니 어떤 아가씨가 쑥 들어왔다. 그 아가씨는 걸려 있는 다른 옷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 괴상한 옷 앞에 가서 우뚝 섰다. 그리고는 한 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을 지껄였다.
 "어이구 이 옷 팔릴까 봐 마음 고생 꽤 했네"
 그 상큼한 아가씨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말을 이었다.
 "아줌마 이 옷 얼마지요?"
 그 아가씨는 옷값만 말하면 돈이야 얼마든지 주려는 듯 너무 급하게 묻는 바람에 오히려 주인 쪽에서 금액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 때 누나는 야릇한 감정을 교차시키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십오만 오천원이예요"
 아니나 다를까. 그 아가씨는 비싸다 싸다 말도 하지 않은 채 걸려 있던 옷을 자기 몸에 척 걸치고 거울을 향해 이리 저리 몸을 재보고 있었다. 그리고 홱 돌아섰다. 아가씨의 얼굴에는 장미꽃이 이슬을 머금은 듯 생기가 돌았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 아가씨는 낯이 많이 익어 있었다.
 "저 아가씨를 어디서 만났지…. 어디서 본 듯한 아가씬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순간 섬광처럼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며칠 전 저녁 때 이 가게에 들려 그 옷을 관심 있게 보고 갔던 그 아가씨임에 틀림없었다. 그 때 새침한 아가씨의 모습과 지금의 활짝 핀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아가씨의 지갑은 이미 열려져 있었고 불려진 옷값이 일시에 튀어나왔다. 동시에 아가씨의 비죽거린 입술이 떨렸다.
 "자기는 양복이 몇 벌인데 내가 옷 한 벌 산다면 쌍 눈을 켜고 노려봐. 내 참 기가 막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허공에 대고 하는 여인의 불평이었다. 드디어 그 아가씨가 신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갔을 때였다. 나는 신비스런 생각에 젖었다.
 "야참! 그 괴상한 옷을 정말 사가는 사람이 있네. 옷이 날개라더니 그런 날개를 다는 사람도 있구먼. 의복은 바로 그 사람 자체야"
 모를 일 이였다. 여하튼 그 일로 인하여 술집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더욱 가벼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 때 나는 고조된 감정을 누르며 누나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그 아가씨가 하는 말은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어이구 남자들은 다 이렇게 무뎌. 자기 남편이지 누구긴 누기여?"
 "아니 그럼 그 여자가 결혼을 한 아줌마야?"
 "그럼, 요즘엔 아가씨 같은 아줌마가 얼마나 많은데?"
 "남편 있는 사람이 그런 옷을 어떻게 입지?"
 내 말에 누나는 매우 답답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그것이 모두 개성이야 개성, 그렇게 보는 사람들의 눈이 이상할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아닌게 아니라 그 옷은 개성이 뚜렷한 옷이었다. 얼마 후 우리는 소주방에 도착했고 소주잔을 기울이던 누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술값은 내가 낼께"
 "아니 무슨 소리야 누나 술 취했나봐. 내가 산다고 분명 말했잖아"
 "사실은 아까 그 옷은 십만원만 받으면 돼. 하지만 그 여자의 자존심을 좀 살려주고 싶어서 십오만 오천원을 부른 거야. 그래서 생각지 않은 오만오천원이 생겼지"
 나는 장사에 찌들은 누나의 양심을 뻔히 내다보며 엉뚱하다는 듯 물었다.
 "쥐뿔이나 자존심은 무슨 자존심?"
 "여자들 심리를 모르면 말을 하지마. 그런 여자들일수록 값이 비싸야지 싸면 사지도 않아. 그리고 그 옷을 입으면서 계속 자존심을 부릴 수 있거든? 그래서 그 여자의 자존심을 좀 살려 주고 싶었단 말야"
 "하긴 역시 그것도 개성은 개성이구먼…"
 그 말을 들은 나는 너털웃음을 크게 웃으며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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