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2024.11.15 (금)

  • 맑음동두천 10.9℃
  • 구름많음강릉 16.0℃
  • 맑음서울 14.0℃
  • 맑음대전 13.2℃
  • 맑음대구 13.6℃
  • 구름많음울산 17.4℃
  • 맑음광주 14.1℃
  • 맑음부산 19.2℃
  • 맑음고창 11.3℃
  • 맑음제주 19.9℃
  • 맑음강화 12.4℃
  • 맑음보은 11.3℃
  • 구름조금금산 7.5℃
  • 맑음강진군 15.9℃
  • 구름조금경주시 14.7℃
  • 맑음거제 17.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재미'의 가치를 발견한 세대

W세대는 축구놀이나 신나게 즐겼던 철없는 젊은애들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재미'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를 찾아냈기 때문에 W세대는 여타 다른 세대만큼 중요한 문화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김정운 /명지대 여가정보학과 교수



나이를 잣대로 한 방식에서 탈피

 W세대는 한국문화사에서 유래가 없는 특정한 집단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W세대는 2002년 서울에서 열렸던 월드컵이라는 특수한 사건으로 '재미있게 즐겼던' 집단을 지칭한다.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이 특수한 집단의 이름을 W세대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미국의 반전세대나 유럽의 68세대, 우리 현대사의 4.19세대나 6.10세대와 같은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상업주의의 질펀한 잔치에 불과한 월드컵에 온 나라가 들썩인 것도 그리 달갑게 느끼지 않는 이들도 많다. 철없는 W세대를 계급 없는 사회, 전쟁 없는 사회,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를 위해 치열하게 싸운 반전세대나 68세대,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4.19세대나 6.10세대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으며 문화사적 의미를 운운하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이들도 있다. W세대는 축구놀이나 신나게 즐겼던 철없는 젊은애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바로 이 '재미'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를 찾아냈기 때문에 W세대는 여타 다른 세대만큼 중요한 문화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재미'라는 가치와 아울러 W세대라는 호칭이 가지는 문화사적 의미는 우선 나이라고 하는 참으로 설득력 없는 세대구분방식을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나이를 통한 집단 구분은 근대적 사고의 핵심이다. W세대라는 호칭은 한국 사회가 근대적 사고의 틀을 벗어난 21세기적 사고가 가능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구태의연한 연령에 의거해 규정하자면 W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대충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젊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듯하다. 이제까지 세대구분으로 나누자면 청소년기 혹은 청년초기에 이르는 이들이다. 지금까지 이들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이는 아주 간단한 실험으로도 증명된다. 예를 들어 '청소년'이란 단어 뒤에 아무런 단어나 연결시키라고 하면 대부분 '청소년범죄' '청소년문제'와 같은 단어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뒤쪽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단어의 앞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으라고 하면 '비행청소년'과 같은 단어 이외에는 달리 어울리는 표현이 없는 듯하다.
 심리학자들이 청소년 문제와 관련하여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자아 정체감 또한 청소년의 부정적 사회적 표상을 확립하는데 일조를 한다. Erikson의 정신분석학적 발달이론은 청소년기는 자아정체감이 확립되어야 하는 불안정한 시기로 규정한다. 즉 자아가 없는 아주 황당한 시기라는 것이다. 청소년의 사회적 표상이 이런 방식으로 형성되는 배후에는 18세기 이 후에 나타난 순수한 아동으로서의 개념과 발달 또는 진보, 성숙이라는 근대적 이념이 버티고 있다.

우리 청소년이 얻은 새로운 이름

 프랑스 문화사가인 Aries는 아동의 개념이 18세기 유럽에서 만들어 진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자세히 밝히고 있다.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아동의 개념이 구성되고 아동에서 성인에로의 이행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시기로서 청소년 개념이 만들어 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행과정을 어떠한 논리로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동-청소년-성인의 이행논리는 근대의 구성물인 발달, 또는 진보의 개념에서 얻어 진다.
 근대성의 핵심은 이성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성적 사유에 대한 신념은 보다 진보한 세계가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이를 모든 사람이 수긍하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성취해 낼 수 있다는 세계관으로 이어진다. 즉 변화를 진보로 이해하고 이 진보를 성취하겠다는 세계관이다. 마르크스의 그 유명한 철학자의 과제를 기억해 보라. 이 때 세계사는 미개에서 문명으로 이어지는 단선론적인 발전의 과정으로 해석된다. 유럽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진보 이념의 발견은 불평등, 억압, 착취의 구조를 개혁해 나가는 도구가 되기도 했지만 또 다른 방식의 억압과 착취를 가능케 하는 기회로 작용한다. 이를 변증법이라 하는 것 같다.
 문명발달이라는 보편적 설명 틀에 따라 인종의 개념이 만들어지고 이 인종을 문명화 정도에 따라 일렬로 배치하는 문명화론의 배후에는 생물학적인 '발생반복설(recapitulation theory)'이 자리잡고 있다. 개체의 발생은 종족발생을 반복한다는 생물학 이론이 사회진화론으로 변조되면서 진보의 이념은 또 다른 억압의 도구가 되기 시작한다. 아동/성인, 여성/남성, 미개/문명의 이분법이 단선론적인 진보의 논리에 따라 재배치된 것이다. 물론 성인은 아동을, 남성은 여성을, 문명은 미개를 계몽해야 할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다.[PAGE BREAK]  나이에 따라 발달과정을 배치하는 심리학 이론 역시 이러한 발생반복설의 또 다른 얼굴이다. 흔히 계단으로 떠올리는 발달의 메타포는 아동에서 성인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나이에 따라 일렬로 나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나이에 따른 발달이 문명화 정도를 측정하는 동일한 척도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아이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청소년은 미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문명화되지도 않은 고약한 존재로 인식한 것도 바로 생물학의 발생반복설을 인간 개체발달과정에 적용한 Hall이라는 심리학자의 이론에서부터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로서의 청소년 개념을 고안해 낸 것도 바로 그다. 결국 이행기로서의 청소년은 갖가지 문제를 포함하는 불안정한 시기로 처음부터 규정된 것이다.
 이제까지 청소년이라는 이름은 발달과정에서 불안정한 시기로 인식되어 왔다. 개화 초기, 소년, 청소년, 청년 등의 단어들은 희망과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 청소년은 근대적 교육의 객체이면서 계몽의 주체였다. 브나르도 운동과 같은 농촌계몽운동에서 청소년은 불안정한 문제의 시기로 인식되기보다는 사회변화의 주체로 인식되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근대의 단선론적 진보이념이 교육제도로 구체화되고 기능적 체계를 갖춘 이 후 청소년에 대한 우리사회에서의 사회적 표상은 서구의 그것과 동일한 부정적 내용을 갖게 된다. 그 후 우리사회의 청소년은 몇 명이 함께 몰려있기만 해도 불량청소년이 되었다. 밤길에 한 무리의 청소년을 마주치면 건장한 성인도 흠칫할 정도가 된 것이다. 이러한 청소년이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W세대.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차이

 W세대는 이전의 청소년 세대 개념에서 필수적인 발달, 진보를 위한 교육의 강박적 내용이 빠져있다. 물론 비슷한 다른 이름도 있었다. X세대, N세대 등등.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가 더 강한 이들 이름에 비해 W세대는 전혀 새로운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재미'라고 하는 차원이다. 이제까지 한국사회에서 재미, 즐거움과 같은 단어들은 왠지 내놓고 추구해서는 안 되는 가치였다. 엄숙하고 진지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웃는 표정은 왠지 경박해 보였다. 즐거워도 즐거운 내색을 내놓고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오죽하면 변소에서나 맘놓고 웃을 수 있었을까. 재미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와 결합된 W세대는 이전의 미성숙하고 교육받아야 하고 언제든지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는 그 청소년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오히려 기성세대에게 재미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를 가르치고 있다.
 기성세대들이 착각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우선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이 같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W세대가 빨간 옷을 입고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광화문으로 몰려들 때 청소년세대가 항상 걱정스러웠던 기성세대는 기뻐했다. 국가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이 철없던 것들이 드디어 애국심이 생겼구나. 87년 광화문에서 독재타도를 외쳤던 40대들은 당시를 회상하며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쳤다.
 그러나 그 '대∼한민국'과 이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W세대에게 '대∼한민국'은 '재미'의 기호일 따름이다. '대∼한민국' 대신 H.O.T가 되었든 G.O.D가 되었든 별 차이가 없다. 그들이 외치는 '대∼한민국'은 분단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인들이 수 십년에 만나 우느라고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그 '대한민국'이 아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을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은 더 더욱 아니다. 그저 재미있는 '대∼한민국'이면 족할 뿐이다. 우연하게도 '재미'의 코드가 '대∼한민국'이었을 뿐이었다.
 착각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거리응원이 선수들을 격려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 일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축구장과 한참 떨어져 있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선수들을 응원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응원이란 경기장에서 선수들의 투지를 북돋아주기 위해 하는 일이다. 즉 우리편이 이기기 위해 선수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축구경기의 승리가 목적이고 응원은 수단일 따름이다.
 거리응원은 사정이 좀 다르다. 도대체 무엇을 응원한단 말인가. 선수들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말만 응원이지 응원이 아닌 것이다. 선수들이 응원을 통해 힘을 얻어 축구경기를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응원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응원하면서 즐기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이 때 전광판에서 보여지는 축구는 이 재미를 매개해 주는 수단일 따름이다. 물론 축구를 이기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꼭 이겨야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함께 '대∼한민국'을 외치며 즐길 수 있다면 축구경기는 어찌 되었든 그리 큰 상관이 없었다.

'재미'의 주인이 되는 '재미' 발견

 거리응원은 놀이의 주체가 되는 즐거움이 어떠한지를 경험케 해주었다. 축구선수들이 주인공이 아니었다. 내가 주인공이었다. 빨간 옷 입고 얼굴에 태극문양 그리고 아무 때나 '대∼한민국'을 외치면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엇박자로 장단을 맞춰주는 그들은 경기장에서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어야만 기뻐하는 기성세대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TV앞에서 맥주를 홀짝거리다가 골 못 넣으면 욕설을 퍼붓는 것 이외에는 달리 축구를 즐길 줄 몰랐던 그들은 관객, 즉 객체에 불과했다. 한번도 재미의 주인인 적이 없었던 그들에게 그 철없는 W세대는 '재미의 주인이 되는 그 재미'가 어떤지를 가르쳐 준 것이었다.[PAGE BREAK]  기성세대들도 나름의 재미를 찾아 헤맸다. 마라톤이 그 중 하나다. 최근 마라톤 행사는 개최하기만 하면 남는 장사가 된다고 한다. 42.195㎞를 뛰는 괴로움을 즐기겠다는 마조히스트들이 줄을 선다는 것이다. 대개 30, 40대의 중년 남자들이다. 건강을 생각하여 뛴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때문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중년남자들에게 마라톤을 완주하는 일은 건강에 오히려 해롭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런데 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중년의 마라톤 중독자들이 갈수록 많아진다고 한다. 세상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믿을 것은 내 몸으로 느끼는 이 고통뿐이라는 것이다. 하도 믿을 수 없는 험한 세상을 살아와서 이제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내 몸 하나뿐이라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또 다른 재미를 찾아 나선 이들이 있다. 노사모가 그들이다. 이들은 마라톤을 즐기는 마조히스트들보다는 약간 젊다. 20, 30대가 주를 이룬다. 아직도 정치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대부분 자원봉사자들인 이들은 한 정치가의 팬클럽을 자처하며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 심지어는 가족을 총동원하고 자기 주머니를 털어 가며 한 정치인을 후원한다. 가만히 보면 무척 재미있어 하는 것 같다. 아주 새로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인 후원하는 일이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새로운 변화인 것 같다. 그러나 적이 분명하고 승패에 따라 희비가 너무 분명한 노사모는 여전히 재미가 목적이 아니라 승리가 목적인 것 같다.
 W세대는 재미가 목적이다. 이는 이전 세대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차원이다. 축구나 여타의 것들이 수단이 되고 재미가 목적이 되는 수단-목적 뒤집기는 사람끼리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원숭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원숭이도 말할 수 있다는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발견했다. 물론 발성구조가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음성을 통한 말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기호를 이용한 말하기는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의도와 남의 의도를 구분하는 능력 등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단 원숭이들 사이에서 자란 원숭이는 이런 능력이 없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란 원숭이들만 이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 사이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뜻이다.

'수단-목적' 뒤집기가 낳은 결과

 '눈길맞추기(joint attention)'는 물건을 사이에 두고 엄마와 아기가 눈을 맞추는 행위를 뜻한다. 이 눈길맞추기가 바로 인간에게만 있는 뭔가 특별한 것이다. 언어는 물건의 이름을 익히는 것부터 출발한다. 물건의 이름을 익히기 위해서는 엄마와 아이가 같은 물건을 바라보는 과정, 즉 눈길맞추기가 있어야 한다. 같은 물건을 바라보며 엄마가 말하는 물건의 이름을 익히는 것이 의사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우리가 같은 주제를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대화가 되는 것처럼 같은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약간 어려운 말로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형성이라고 한다.
 눈길맞추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엄마가 수단이 되고 물건이 목적이 되는 '지시적 눈길맞추기(imperative joint-attention)'가 있다. 아기가 엄마에게 물건을 달라고 눈짓하는 경우이다. 이 때 아이의 관심은 엄마가 아니다. 물건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 두 번째 눈길맞추기는 '의사소통적 눈길맞추기(communicative joint-attention)'이다. 낯선 물건을 보면 아이는 엄마와 눈을 마주친다. 엄마의 설명을 원하는 것이다. 즉 목적은 엄마의 설명이고 물건이 수단이 된다. 의사소통적 눈길맞추기의 전형적인 형태는 엄마와 아이가 물건을 가지고 놀 때이다. 물건을 가지는 것이 아기의 목적이 아니다. 물건으로 매개되는 엄마의 이야기, 정서적 반응을 즐기는 것이다. 이 과정이 인간만이 가진 의사소통능력의 기원인 것이다.
 조금 지난 이야기지만 근대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이 한참일 때, Habermas는 꽤나 용감했다. 다들 이성에 대한 신화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데 그래도 이성의 힘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말이다. 복잡한 이야기를 쉽게 하자면 하버마스는 근대적 이성이란 포스트모던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몹쓸 것이고 당장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미완의 프로젝트라고 주장한다. 근대성의 문제는 도구적 이성이 비대해져 일방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일 뿐, 이성자체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성의 진정한 완성은 '의사소통적 합리성(kommunikative Rationalitaet)'이 구현될 때 가능하다고 한다.
 타인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기원이라는 주장에 그리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면 W세대의 수단-목적 뒤집기는 하버마스가 무척 행복해할 현상이다. 재미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는 놀이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고 놀이에서 의사소통적 행위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기와 엄마의 눈길맞추기 놀이의 목적은 재미이고 이 현상을 우리는 '잘 논다'고 한다. 잘 노는 사람이 남도 잘 이해하고 의사소통도 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드러운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

 재미를 추구할 줄 아는 W세대가 주인이 될 사회는 상당히 부드러운 사회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탱해 온 힘은 노동을 통한 성공, 성취에 대한 욕망이다.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게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성공시대의 주된 내용은 그들이 얼마나 자기의 가정을 돌보지 않고 일에 몰두했었나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재미를 희생하고 일에 몰두하고 사회적 성취를 이뤄내는 것이 절대적인 가치로 강요되었다.
 노동을 통한 성공, 성취가 절대가치로 여겨지는 사회의 특징은 불안과 적개심이다. 앞에 있으면 불안하고 뒤에 쳐져도 불안하다. 앞에 있는 사람이 예쁘게 보일 리 없고 나를 제치고 앞에 끼어 드는 이에 대한 적개심은 이로 말로 다 할 수 없다. 도로는 이런 현상이 가장 잘 관찰되는 곳이다. 아무도 앞에 끼어 드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 단순히 늦어지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직장에서 뒤져있는 것도 견딜 수 없는데 도로에서까지 뒤쳐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재미를 추구하는 사회는 한마디로 말이 되는 사회이다. 재미는 정서적 현상이다. 정서는 전염성이 강하다. 또 정서는 공유할 때 그 내용이 풍부해진다. 빨간 옷 사 입고 모두 광화문으로 나섰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정서가 공유되는 것은 의사소통행위의 핵심이다. 아기와 엄마의 눈길맞추기가 끊임없는 '정서조율(affect attunement)'과정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의사소통행위란 메시지의 교환이 아니다. '의도(intention)'를 공유하고 '정서(emotion)'를 공유하고 '주의(attention)'을 공유하는 과정이다. 함께 즐기면서 우리는 의사소통능력을 배운다.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는 함께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문화란 정서를 공유하는 방식이다. 서로 인사하고 손을 잡고 눈을 맞추는 방식이 각 문화마다 다르다. 정서를 공유하는 방식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리츄얼화 된 것이다. 재미를 추구하는 다양한 방식이 문화로 존재하는 사회가 살만한 사회다. 그래서 놀 줄 아는 W세대가 주인이 되면 적개심보다는 서로 말이 통하는 부드러운 사회가 되리라고 믿는 것이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