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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평화 만들어 가기

교실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교사들은 잘잘못을 가리는 판사가 된다. 학생들은 교사에게 적절한 판단을 구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교실 평화를 위해 교사는 판사 역할보다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 따져보면 어느 일방의 잘못으로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인규 | 서울미술고 교감


내면의 평화가 교실평화

‘왕따’니 학교폭력이니 하여 우리의 교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교실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니 어찌 문제가 없을까? 어른들이 툭하면 이혼하고, 싸움질을 하고 있다면, 이 작은 교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교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그곳이 우리의 미래를 제일 먼저 맞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실이 갈등과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데, 우리의 미래가 어찌 평화스러울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반면에 우리의 교실에서 학생들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학생들이 행복해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참으로 희망적일 것이다. 이를 너무 기대한 나머지 일부 교사들은 어찌 이런 학생들은 가정에서 학교에 보내지 않는가 하며 불평한다. 학교가 가진 문제를 두고 가정이 문제니, 학부모가 문제니, 학생이 문제니 하는 귀인 논쟁은 따져보면 덧없는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 문제없이 학교에 보낸다면 학교가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문제는 교실에서 따돌림이나 싸움, 폭행 등 사건의 빈번한 발생 현상 자체가 아니라 이에 대한 학교의 부족한 대처 능력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체 중에서 몇 명이 ‘왕따’를 경험했고, 학교 폭력을 당했다는 조사 결과에 대해 어느 기준 이상 일어나면 심각한 것으로 판정할 것인지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교실로 인하여 학부모들이 불안해 한다는 것이다. 학부모의 불안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보고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으레 문제가 일어나면 학교의 대처는 상투적인 경우가 많다. 가해자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고, 피해자를 격리 조치하며, 교내 순시를 강화하고, 계도 훈화를 많이 하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학교가 교육 기관인지 사법·교정 기관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만약 학교가 진정 학교다워지려면 사소한 것이든 중대한 것이든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폭력에 대한 교육적 해결의 전문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전문성이 외부 전문가를 학교에 초빙해서 해결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바로 현장에서 대처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바로 교사들이 현장에서 폭력에 대한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일정 교육과정을 이수하여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 폭력에 대한 대처는 교사 자신의 ‘내면의 평화’를 통해 구축되는 것이라는 점을 알면 순차적으로 다음 수순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수순이란 타인의 마음을 평화롭게 정렬시킬 줄 아는 것이며, 나아가 학생의 갈등을 조정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즉, 나의 내면에서 분노를 조절할 줄 알면 상대의 분노를 제어할 줄 알며, 제3자로서 분노를 제어할 줄 알게 된다. 그래서 교실 평화 만들기의 요체는 바로 교사의 내면 평화인 것이다.[PAGE BREAK]분노 감정의 생성 원리

뜨거운 물체를 대면 손을 뗀다. 왜 손을 떼었느냐 물으면 뜨거웠기 때문이라고 답을 한다. 그러나 뜨거운 것을 내가 만졌구나 지각을 하고, 그래서 손을 떼어야겠구나 판단을 하고, 이에 따라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뜨거운 것을 대자마자 연수 근처에서 반사 행동을 한 후에, 나중에 대뇌에서 내가 손을 뗀 것은 뜨거웠기 때문이라고 지각한다. 지각 판단 행동이라는 순서는 그리 일상적인 것은 아니다.
갑자기 뒤에서 앞으로 움직이는 시커먼 무엇이 지각되었다고 하자. 지각 판단 행동이라는 순서를 밟는다면 이렇다. ‘아, 저것은 무엇일까? 나를 해치는 것일까, 아닐까? 그래 나를 해치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피해야지.’ 그러나 실제 이렇게 행동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수 있다. 설사 시커먼 무엇이 생명을 해칠 가능성이 적다고 하더라도 죽은 뒤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일단 피하고 나서 나를 해치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이 옳다. 실제 우리의 생명 기제는 이렇게 진화되어 있다.
나를 공격해 오는 그 무엇에 대해 나의 몸은 방어하기 위해, 혹은 역으로 공격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든다. 온 몸이 긴장하고 신경이 곤두선다. 혈액 순환은 증가하고, 혈압도 오른다. 그래서 얼굴은 붉게 상기되고 주먹을 붉게 쥐는 법이다. 이때 사고 기능도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일념(一念)을 이룬다. 그래서 ‘저게 나를 해칠 지 몰라’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게 나를 해치는 것’이라 일단 단정한다. 나쁜 것으로 생각해 버림으로써 나의 방어 기제가 효과적으로 작동된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나의 몸을 구한다. 나는 나의 몸을 구한 후에 판단을 한다. ‘아, 나쁜 것이 아니었네….’
이러한 생명 보존의 기제는 우리 조상들이 정글과 초원 지대에 살면서 자연의 재난과 동물의 습격, 타 종족의 공격으로부터 유전자를 보존해 온 원리였다. 지금 현대에 살면서 자연의 재난도 줄어들었고, 동물의 습격은 거의 없고, 타 종족의 공격도 현저히 줄어들었건만 아직 내 몸은 과거를 기억하고 여기에 맞추어 작동된다.
생명 보존의 원리는 나의 자존심이나 신념, 재산, 기타 다른 내가 가진 것이 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작동된다. 만약 이것이 침해되었을 때, 방어하기 위해 혹은 역으로 공격하기 위해 내 몸과 마음이 작동된다. 혈압이 오르고 혈액 순환은 빨라진다. 근육은 긴장하고 언제든지 상대를 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생각은 일념으로 진행된다. ‘너는 세상에 나쁜 몸이야. 네 시커먼 속은 다 알겠어. 네가 없어져야 세상이 더욱 정의로워질 거야. 나는 정의의 사도! 그러니 당신은 나한테 벌을 받아야 해.’ 공격하는 것이 물체라면 금방 상대에 대해 판단을 하고 공격의 고삐를 늦출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말이나 생각이기 때문에 판단이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방어 기제는 더욱 영속화된다.
일단 방어 기제가 작동되면 눈과 귀와 감각도 고정된다. 나쁜 놈의 그것으로만 보고 듣게 된다. 더욱이 나의 말이 그렇게 나가면 상대도 고와질 리 없다. 내가 나쁜 놈이라 했던 것만큼 나쁜 놈으로 행동한다. 그러니 진짜 나쁜 놈이 된다. 눈싸움이 말싸움되고, 폭력이 되고, 전쟁이 된다. 상대가 나쁜 놈임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도 등장하고 마르크스도 등장하고, 의회민주주의도 등장한다. 정치인도, 지식인도, 교사들도, 나이 어린 학생들도 여기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PAGE BREAK]지금 학교교육은 어쩌면 상대를 나쁜 놈이라는 것을 검증하기 위한 이론적 기저를 제공하는 활동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화가 난 정서가 먼저이고 화가 나는 판단 근거는 나중이라는 것이다. 화가 나서 판단한 근거들은 실재하는 원인이 아니라 화가 났기 때문에 지어낸 생각인 것이다. 이 점은 참으로 중요하다. 화난 상태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불난 데에 부채질하는 것이지 결코 분노를 깨뜨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분노에 빠져 있을 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된다. 상대가 분노에 빠졌을 때에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된다. 조용히 분노의 정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분노 조절의 요체는 바로 이것이다.

분노 조절을 위한 원리

‘저 녀석은 이래 저래서 나쁜 놈이야. 암 그렇고 말고.’ 만약 이렇게 생각하고, 정의감이라는 기준을 세운다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선한 행동이 되고,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 된다. 내가 참아버리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 된다. 진리와 정의의 전당인 학교에서 나쁜 놈을 그래도 두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학교는 곧 폭력화된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폭력을 두둔한 적은 없다. 참을 인(忍)자를 쓰라고 가르친 것이 학교이지 화를 폭발시키거나 위협이나 폭행을 가하라고 한 적은 없다. 이 가르침대로 참기만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화는 중요한 보호 장치이다. 그런데 무조건 이를 억눌러 버리면 가슴에 응어리가 되고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대를 욕하느라 정신이 없어진다. 억누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참아버리게 되면 서로를 조정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왜곡은 갈수록 심화된다. 그리고 본인 내부에서 잠재되어 속병이 된다. 상황은 변화되지 않고 나의 자존심을 뭉게거나 재산을 공격하는 일이 지속되면 언젠가 임계 한도를 넘어 공격이 들어올 때 한꺼번에 폭발한다. 사고를 치는 학생들을 관찰해 보면 지금까지 말도 없이 잘 참은 학생들이지 수시로 자기 속을 드러내는 애들이 아니다.
분노는 무조건 억압할 일도 아니고, 무조건 드러낼 일도 아니다. 앞에서 말한 나의 생명 기제 작동 원리를 조용히 지각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아, 내가 무엇 때문에 생명 보존 차원에서 몸이 작동하고 있구나. 아하 그래서 숨이 가빠오네. 얼굴은 붉어오고 주먹을 쥐고 있구나. 상대를 나쁜 놈이라고 일념의 생각을 하고 있구나…. 화가 나는 동안 이렇게 깨어있을 수만 있다면 화가 나를 잡아먹지 않는다.
이렇게 화난 의식을 내가 조용히 쳐다보고 있으면 화는 잠잠해진다. 그리고 마음의 선택을 기다린다. 화를 꼭 내야 할 상황인가? 만약 낸다면 어느 때, 어느 정도 낼 것인가? 혹시 내 기준만 전하면 되는 사항이라면 어떻게 전할 것인가? 보다 복잡한 절충과 타협이 필요하면 언제 만나서 협상을 할 것인가?
[PAGE BREAK]내가 화의 주인이 되어 화를 내기로 작정해서 화를 내는 것과, 화가 나의 주인이 되어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내가 화를 내기로 한다면 나는 충분한 무기와 전투식량, 우군, 통신장비를 비축해 놓기 때문에 결국 이기게 될 것이며, 화가 폭발해 버리면 이것들이 없는 가운데 전쟁하기 때문에 반드시 후회하도록 되어 있다. 역사상 존경을 받는 화는 간디나 킹 목사의 그것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화를 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화가 난 이유를 상대가 알도록 함으로써 상대의 행위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를 잘 전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의 기법은 단순하다. 그저 ‘무엇 때문에 내가 화가 있다’라고 전하는 것이다. 전하지도 않고 분노의 생각만 키우고 있기보다는, 만나서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 두 담화를 비교해 보라.
A는 상대로 하여금 방어기제를 작동시키지만 B는 상대로 하여금 협조기제를 작동시킨다.

A : “너희들 정말 이럴꺼야? 왜 지각을 자주 하는거야?”
B : “학생들아, 너희들이 지각을 자주 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
분노하는 상대에 대한 조절도 똑같다. 상대가 화의 주인이 되도록 도와주면 상대는 곧 이성을 되찾고 대화 분위기로 돌아서게 된다. 다음에서 A는 자칫 전쟁으로 비화된다. 그러나 B는 곧 상담 분위기로 전환된다. B와 같은 대화 방식을 ‘가시빼기 전략’이라고 부른다.

A : “아니, 선생님. 너무 하시잖아요. 머리가 길기로 서니.”
“어쭈 이 녀석이 감히 말대꾸야!”
“내가 무슨 말대꾸를 했다는 말씀입니까?”

B : “아니, 선생님. 너무 하시잖아요. 머리가 길기로 서니.”
“학교의 두발 규정이 너무 엄격해서 화가 난단 말이지?”
“네!”

교실 갈등과 중재 전략

교실 내에서 학생들은 크고 작은 분쟁에 휩싸인다. 집안 내에서 오누이끼리도 서열 다툼이나 헤게모니 전쟁을 치르는데 남남끼리 오죽하겠는가? 책상을 두고 몸이 넘어 온다고 다투고, 빌려간 돈 안 갚았다고 싸우고, 어떻게 하면 나한테 그렇게 대우했느냐고 다툰다. 판단 능력을 좌우하는 대뇌전두엽이 아직 덜 커서 그러려니 하면 학부모나 교사들의 속이 덜 상하련만, 학교의 일상은 성인보다 더한 규칙을 학교에 세우려 한다.

[PAGE BREAK]교실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교사들은 잘잘못을 가리는 판사가 된다. 학생들은 교사에게 적절한 판단을 구하기 위해 잘못을 일러바치고, 그 사이 한 판 싸우게 된다. 교사가 이를 다 들어주면 괜찮지만 그럴 시간도 모자라고 인내심도 크지 않다. 그래서 둘 다 벌을 세우는 것으로 대부분 끝이 난다. 만약 일방적으로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폭행한 것이라면 물론 가해자를 가려 벌을 준다. 만약 이러한 사태에 학부모가 끼여드는 경우 낭패이다.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을 두둔하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교사는 자칫하면 일방의 학부모로부터 상처를 입기 쉽다. “왜 선생님은 저 학생만을 두둔하십니까?”
교실 평화를 위해서는 교사가 판사로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중재자의 역할을 먼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져보면 어느 일방의 잘못으로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 보다는 쌍방 과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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