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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발전을 위한 올바른 평가 문화

교육현장에서 공정한 평가문화가 정착하여 합리적인 자유경쟁이 이루어져야만 국가발전의 원동력인 교육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육현장에서 평가문화의 정착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이며 공정한 평가에 바탕을 둔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풍토가 정착돼야 교육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최종근 | 미국 유타주립대 교환교수·전 한국국·공립고등학교장회장



합리적인 문화는 국가발전의 동력

몇 년 전 일본의 한 지방대학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일본정부의 장학금으로 유학 온 한 인도 학생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1년간 일본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일본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다른 나라보다 부강한 선진국이 되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이 공부하는 일본인 학생들은 우리보다 별로 우수한 것 같이도 보이지 않은데 말입니다. 교수님, 일본이 잘 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어려운 답변을 대신하고 말았다.
“일본사람 개개인을 후진국 사람들과 개별적으로 비교해 보면 반드시 특별히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사람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문화의식은 후진국 사람들의 것과 다르며 그 것이 일본을 다른 나라보다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후진국에서 유학 온 학생이 새로운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는 것은 몇 년 또는 10년 안에 이루어 낼 수 있을지 모르나 자기 국민의 문화의식을 바꾸는 것은 몇 세대 또는 세기가 소요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 온 우수한 후진국 학생들이 자기보다 크게 우수하지 못한 일본의 지방대학 학생들과 매일 같이 공부하면서 위와 같은 회의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진지한 생각을 가진 학생이라면 당연히 느낄만한 일로 이해할 수 있다.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어느 특정한 민족이나 국민이 다른 민족이나 국민보다 선천적으로 우수하고 부지런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이상 모든 민족의 구성원은 적어도 태어났을 때만은 동일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민족간·국가간의 발전 격차가 발생했을까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인간이란 주어진 어느 사회에 태어나면 그 사회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화 속에서 자라나게 되며 그 문화에 동화되면서 그 구성원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상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결정적으로 좌우하게 되는 민족문화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수천 년의 역사와 더불어 이어져 온 민족사의 결과물이자 기후나 지리적 자연여건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아온 우리의 생활양식과 의식구조, 그리고 관습과 제도 등을 비롯해서 그 사회가 이룩해 온 유형무형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PAGE BREAK]따라서 진취적이며 생산적인 제도를 갖추어 합리적으로 운영해 갈 수 있는 문화와 고도의 기술을 유지 발전시켜 온 경험을 쌓아온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 출생한 사람들에 비해 별다른 특별한 노력 없이도 기존의 문화를 흡수하여 계속 잘 살아가게 되어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 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유학생이 위와 같은 의아심을 갖게 되었음은 그 젊은 학생의 통찰력이 가상할만함을 말해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정한 평가 돼야 공정한 경쟁 가능

최근 미국 경제학자들이 경제성장을 위한 다음 세 가지 요인 가운데 어느 요인이 가장 중요한 역할과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연구하여 발표한 바 있었다. 즉 첫번째 자연적인 요인으로는 기후, 자연자원의 유무, 국토가 바다에 면해 있는지의 여부와 같은 지리적 위치 등을 포함시켰으며, 둘째 요인으로는 국가의 효율적이며 적절한 경제정책의 시행 여부를, 셋째 요인으로서는 국민경제를 뒷받침하는 관행, 관례, 법령 등 각종 제도(institutions)가 합법적이며 공정하게 운영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꼽았다. 여러 나라의 실례를 비교 분석해 본 결과 셋째 요인인 바람직한 제도의 운영이 경제성장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보도되었다.
제도화된 관행, 관례, 법령 등이 경제성장에 적절하며 그것이 법에 따라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 국가나 민족의 문화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특정한 개인의 지식이나 의식은 짧은 기간 안에 발전 내지 변화될 수도 있으나 전체 국민이나 민족의 문화의식은 한 세기 또는 수세기가 걸려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 발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가 국가간의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다. 그리고 경제성장을 비롯한 모든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수한 인적자원의 개발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우수한 인적자원의 육성은 당연히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교육의 효율성은 국제경쟁에서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경제성장과 국제경쟁에서의 교육의 중요성은 우선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교육은 그 나라 기술수준 제고를 위해 결정적인 기여를 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는 앞에서 언급한 경제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 ‘바람직한 제도와 공정하고 효율적인 그 운영’을 뒷받침 해 주는 국민문화를 보급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체제의 장점과 활력은 공정한 자유경쟁에서 생긴다고 우리 모두가 믿고 있다. 그런데 공정한 경쟁이란 공정한 평가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공정한 평가란 평가를 하는 사람과 평가를 받는 사람과의 사이에 필요한 사회적이며 법적인 관계가 확립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그 평가 결과를 사회가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만 가능하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공정하고 건전한 평가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사회에서만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다는 결론이다.[PAGE BREAK]되풀이하면 바람직한 평가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사회에서만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며, 공정하고 활발한 경쟁이 보장된 나라가 경제성장을 비롯한 모든 분야의 국제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국제경쟁에서의 우위는 물론 또한 나라발전의 중요한 요인인 효율적인 교육의 발전도 건전한 평가문화에 기반을 둔 활발한 자유경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교육 분야에서의 공정하고 건전한 평가문화란 피교육자에게도 중요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자, 교육행정가 그리고 교육을 직접 간접으로 관장하는 각급 교육기관에서 더욱 더 중요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수 년 전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있었던 한 강연에서 인도인 원로교수는 미국문화를 인도문화와 대비해서 성공지향적(成功指向的)인 문화라고 규정하면서 양국 문화의 차이를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필자가 가 있는 미국대학 내의 영어교육원의 교사도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미국문화를 소개할 때 “미국의 학교교육은 어릴 때부터 서로 경쟁하면서 자라고 경쟁결과를 존중하도록 일관된 경쟁유도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전해들은 바 있다. 미국의 힘의 근원은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고 보장하되 경쟁결과는 공정한 평가를 통해서 사회가 존중해 준다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다른 분야뿐만 아니라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평가와 경쟁과의 관계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경쟁지향적인 문화와 공정한 평가문화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미국문화란 한 종합적이며 통일된 문화의 양면을 이루면서 서로 보완해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평가를 존중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조직체 내의 상하간의 관계가 엄격하고 또한 장유유서를 존중해 온 동양사회에서는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서는 물론 연장자와 연하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존대(尊待)말과 하대(下待)말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관습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동양문화권의 사람들이 문화가 확연하게 다른 미국사람들의 언어관행과 행동거지를 보고 미국사회의 실체(實體)를 오해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는 것이다.
동양 사람들의 오해를 자아내기 쉬운 그들의 관행 가운데 우선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관습을 꼽을 수 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바와 같이 미국사람들의 이름은 보통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있다. 첫째이름(first name) 가운데이름(middle name) 그리고 마지막이름(last name, 즉 성)으로 나눠져 있으며 처음의 두 부분이 우리의 이름에 해당하며 마지막 부분이 우리의 성에 해당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딱딱한 분위기가 아닌 사적인 모임 등에서 미국사람들은 친근감이나 친밀감을 표시하기 위해서 자기의 상사나 연장자를 첫째이름 그것도 애칭(愛稱)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즉, 로버-터(Robert, 남자이름)를 밥(Bob), 수-잔(Susan, Susannah, 여자이름)을 수-지(Suzy, Suzie)라고 부르면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곤 한다. 그리고 가정에서 내외간에도 서로가 이 애칭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PAGE BREAK]그리고 사적인 모임에서는 부하들이 앉는 자세에서부터 대화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상사와 연장자에 대한 그 행동거지가 동양 사람들에게는 불손하게 보일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호칭의 사용이나 상사에 대한 태도 등은 아직 전통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이상과 같은 표면상에 나타난 미국사람들의 생활문화를 처음 보게 되는 외국인은 미국이야말로 자유분방하고 상하관계란 제약이 전혀 없는 진정한 자유평등의 나라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조직체나 사회의 운영실태를 면밀히 관찰하면 ‘누가 방침을 결정하고 또 명령을 내리며, 누가 그 정한 방침에 따르고 명령을 준수해야 하는가는 분명한 것’이 미국사회이란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이 같이 일을 위한 상하간의 역할분담과 구분 그리고 그 권능(權能)의 명확한 구분은 현재의 우리 사회보다 더 분명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미국제도나 문화를 모방하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도 잘못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겉보기와는 달리 미국 사회의 모든 조직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격한 상하간의 역할분담과 함께 구성원간에 권능과 책임의 구분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와 같이 구성되어 있는 조직체 안에서는 엄정한 평가와 이를 존중하는 평가문화가 정착되어 있어 이것이 바로 그들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사회에는 지도자가 있고 그에 따르는 일반대중이 있는 것처럼 모든 조직체는 의사를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는 사람과 이에 따라 집행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와 같이 다른 권능을 기반으로 한 상하간의 인간(사회적인) 관계는 조직체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떤 조직체가 생산적으로 발전하려면 구성원의 업적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이를 존중해주는 바람직한 평가문화가 정착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활발한 자유경쟁을 통해 발전의 활력을 지속해 가려면 건전한 평가문화가 자유경쟁을 뒷받침해 줄 수 있어야함은 물론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하여 평가해주지 않으면 경쟁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공정한 경쟁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는 인간사회의 현실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되풀이해서 강조하면 조직사회의 바람직한 상하관계, 공정한 평가문화의 정착, 공정한 자유경쟁의 보장, 생산성과 국제경쟁력의 제고 등이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경쟁력도 공정한 평가서 출발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국제경쟁에서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인 교육의 발전과 효율성도 바람직한 평가문화에 바탕을 둔 공정한 자유경쟁의 보장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 학교교육의 평가문화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 나라 교육의 깊은 문제점을 확인하는 것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미국 유타 주의 인구 약 6만 정도의 작은 도시의 공립고교 졸업식을 참관하고 우리 나라 교육문제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PAGE BREAK]같은 시내에 있는 유타주립 대학의 실내체육관을 빌려 오후부터 진행된 졸업식은 축제처럼 진행되었다. 계단식 관람석에 앉자마자 무엇보다 첫눈에 특이하게 보인 것은 단상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한국에서처럼 학교장, 육성회회장단, 참석한 각급 기관장이 아니라 학생회 간부와 성적이 우수한 졸업생들이란 것이었다. 단상의 좌측 좌석은 학생들이 차지하고 단상의 우측 좌석에는 학교장 교육구청장과 그 간부가 앉아 있고 졸업식도 학생 주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배부된 졸업식 관련 유인물의 첫 페이지는 식순이며, 둘째 페이지에는 졸업반의 학생회 간부이름이 맨 위에 있고 그 다음에는 성적최우수자(top scholar), 그 아래에 졸업식에서 고별연설을 하는 졸업생 총대표(valedictorian)의 두 사람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이어서 성적평균 4.0이상을 취득한 우등생(4.0 scholars) 8명의 성명이 잇달아 적혀져 있는데 모두 크고 진한 글씨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는 개근상, 졸업생 명단, 다른 상의 수상자 이름의 순으로 실려 있었다. 학교장은 졸업장만 수여하고 한국처럼 회고사(回顧辭)는 하지 않고 그 대신 교육구청장이 축사를 했다. 그리고 식순의 마지막에 있었던 사은사(謝恩辭)는 학생회장과 개근상을 받았든 두 학생이 각각 담당하는 것을 보았다.
졸업식 안내장에 대서특필로 기재된 성적이 우수한 학생 세 명이 졸업식의 다른 행사를 사이사이에 두면서 각자가 연사(speaker)란 이름으로 영광스러운 연설을 하게 한다는 것은 이들이 더욱 돋보이도록 한 것으로 우리 졸업식과는 전혀 달랐었다. 신기한 생각이 들어 며칠 후 교육위원회를 통해 학생들의 연설원고를 전해 받아 보았더니 내용이 교훈적일 뿐만 아니라 졸업 후에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계속 열심히 노력하자는 다짐과 서로를 격려하는 좋은 내용이었다. 우리 나라 고교졸업식에서도 우등상이 있고, 최우수 학생은 전체 졸업생을 대표해서 학교장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으러 연단 앞으로 나가기도 하고 사은사를 읽기도 한다. 그러나 졸업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상에 자리를 하면서 연단에 서서 연설을 할 수 있는 영광에 비길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 같이 성적이 가장 우수한 졸업생이 졸업식장에서 연설할 기회를 가지는 것은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유경쟁을 거쳐 우수한 성적을 얻은 학생들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학교교육에서도 평가의 문화가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최근에 와서 성적이 가장 우수한 졸업생을 가능하면 너무 크게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우리 나라 고교의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는 두 나라 사이의 평가문화의 차이에서 온 현상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 고등학교는 입학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하지 않고 해당 지역의 모든 입학희망자를 성적에 관계없이 모두 받아들이는 일반 고등학교란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따라서 학생들의 성적 격차가 심할 것으로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일부 우수한 학생은 대학에 진학했을 때 이수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과목을 미리 고교 재학 중에 이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우리 나라 고교에서는 위화감을 조장시켜 교육적으로 나쁘다는 이유로 능력별 반편성은 물론 난이도가 다른 교과목을 능력과 적성에 따라 선택하는 제도를 채택하는 것까지도 어렵게 되어 있는 우리의 사정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타고난 재능과 각자의 노력이 자유경쟁을 통해 공정하게 평가받고 그 결과를 서로가 인정하고 존중하는 평가문화가 사회전반에 정착하지 않으면 능력에 맞고 적성에 맞는 교육을 한다는 말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PAGE BREAK]군(county) 교육구청에서는 매년 업적보고서(performance report)를 작성하여 공개하고 있었다. 관내 모든 초·중·고교의 각종 표준화된 시험성적의 연도별 대비, 주 전체의 평균과의 대비 등 학부모들이 자기 학교의 교육활동의 성과와 수준을 다른 학교 또는 지역과 대비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자료가 되어있다. 또 이 보고서에는 학교시설 및 교원 현황, 학생 현황, 교육과정, 성적, 재정실태와 지원업무(support services) 등이 상세히 실려 있다. 그리고 군 전체에서 선발된 군의 그해 우수교사(teacher of the year) 한 사람과 각 학교마다 선정된 1명씩의 우수교사 성명이 이 보고서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최근 보도된 바에 의하면 이웃 일본 동경의 어느 교육구청에서도 불원간 이 제도를 시행한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보고서가 학교간의 과열경쟁을 부추기게 된다고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면담한 군 교육구청의 부구청장에게 업적보고서를 공개하면 학교간의 과열경쟁을 유발하게 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군민(郡民)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교육이니 만큼 당연히 군민에게 평가결과나 실태를 보고해야 되지 않으냐”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이 업적보고서는 이 교육구청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어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미국 교육의 활력소는 공정한 평가와 이를 철저히 공개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좋은 기회가 되었다.

공정한 평가와 철저한 공개는 필수

다음으로 평가문화와 관련하여 필자가 가있는 대학의 실태를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대학은 학생 수 약 2만 3000명의 주립대학으로서 졸업식에서는 고교의 경우처럼 각 단과대학별로 그해의 우수교수(professor of the year)가 발표되고 그 결과는 교무처 앞 복도에 액자에 넣은 사진과 함께 연도순으로 게시하고 있다. 그리고 수상자 본인의 연구실에도 같은 사진(상패)을 게시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평가결과를 모든 사람들이 존중하고 수상자 자신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대부분의 우리 나라 대학은 이와 같은 교수 표창제도에 관한 의식 내지 문화가 미국 대학과 다르고 실제로 평가에 대한 냉소적인 분위기가 있어 그 실시가 불가능하다고 한 한국인 교환교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도 대부분의 대학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과목의 강의는 학기말에 학생들의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 평가의 요약이 대학의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공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할 때 참고토록 교무처 앞에 비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평가문화가 얼마나 깊게 정착되어 있는가를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학의 학과장은 소속 교수를 평가하며 또 소속교수는 자기 학과장을 평가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단과대학장도 5년마다 업무수행에 관한 종합평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더욱 놀랄만한 사실은 자기 대학의 평가결과도 철저히 공개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발견하고 평가에 관한 의식이 우리와 너무 다르다는 것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입학희망자들이 가장 많이 참고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대학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유에스뉴스앤월드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지의 연례 전국대학 평가에서 이 대학이 3등급(삼류대학이란 판정)을 받았다고 명확하게 기록 공개하고 있다는 것이다.[PAGE BREAK]더욱이 같은 사이트에는 제휴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대학들 가운데는 2등급인 대학과 또는 4등급의 평가를 받은 대학의 이름도 게재하고 있는 것을 보고 평가문화가 우리와 판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대학이 3등급에 속한다는 것을 인터넷에 공개하면 지원자가 줄어들지 않으냐”고 한 미국인교수에게 물어 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만약에 3등급에 속하는 대학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한다면 사람들은 이 대학을 더욱더 불신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이 점이 공정한 평가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은 또는 미국과는 다른 형태의 평가문화를 가진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대학은 정착된 평가제도에 따른 평가결과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수요 공급에 따라 상품의 시장가격이 결정되는 것처럼 교수의 봉급도 전공 분야의 수요 공급에 따라 연봉이 달라지는 것을 감수하고 있다. 동일한 경력의 회계학 교수의 연봉이 사회학과 교수의 꼭 2배가 되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학과 교수보다 봉급이 더 적은 영문과 교수와 회계학과 교수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 공과대학 교수의 연봉 차이는 더 클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는 양국간의 문화의식의 차이라고 넘기기보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대학에서도 공정한 평가와 자유경쟁 하의 수요와 공급의 시장원리가 교수들의 보수체계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는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한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정서로서는 이런 현상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할 것이나 미국사람들은 이를 잘 참고 실천해 가고 있는 것이다.
뉴스위크(Newsweek)지는 2003년 6월 2일자에서 ‘미국 내의 가장 우수한 100개의 고등학교’ 명단과 그 순위를 대서특필로 보도하면서 학교간의 경쟁과 높은 수준의 시험에 도전하는 고교생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보도를 문제 삼는 사람들은 없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는 이 같은 평가는 생산적이며 긍정적인 경쟁을 촉진시킨다고 받아들이는 반면에 우리 나라에서는 우수한 학생 우수한 학교를 높이 치켜세우는 것을 마치 사회에 위화감을 조장시키는 반사회적인 행위로 보는 경향이 있다면 이는 나라 발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교육현장의 공정한 평가문화 절실

한국 유학생에 관한 추천서를 믿지 않는 미국대학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리고 한국학생의 토플(TOEFL)점수도 믿지 못해 전화 인터뷰를 요구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고 걱정하는 한 한국인 교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일부 한국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작성해 오는 추천서에 교수가 서명만 해서 그 추천서를 바로 학생 본인에게 교부하게 되며 또한 추천의 대상인 본인이 자기가 희망하는 미국대학에 제출 내지 송부하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추천을 받는 사람이 자기 추천서의 내용을 작성한다는 것과 그것을 바로 본인에게 다시 교부한다는 것 모두가 미국의 관례에서는 비정상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소위 ‘족집게 토플 학원’의 훈련을 받아 취득한 고득점은 그 점수에 상응하는 영어구사능력이 없다고 미국대학 당국이 감지한 것 같다고 씁쓸한 이유를 말해 주었다.[PAGE BREAK]한 사회의 사람들이 자기가 속해 있는 장소(거주 지역 포함), 직업, 계급 등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난이도(難易度) 즉 사회이동성(social mobility)이 경직되지 않고 유연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그 사회는 건전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교육의 자유경쟁을 통해 상위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즉 계층간의 이동이 쉬워야 사회정의 구현의 기반이 선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이 속해 있는 가정의 사회경제적인 사정이 학생의 교육성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많이 논의되어 왔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개인의 적성과 능력을 무시한 획일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본말을 전도한 처사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자유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하는 이상 다소의 빈부격차는 있게 마련이며, 학교교육에서 공정한 평가를 통한 자유경쟁을 유도하지 않고 오히려 제도적으로 이를 억압 내지 획일화함으로써 빈부의 격차를 막으려 하거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빈부의 차를 교육현장에서만은 가리려고 하는 것은 모순된 논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빈부격차의 문제는 사회경제적 정책의 문제인 동시에 정치적 결단의 문제이지 교육현장에서 이를 지나치게 문제 삼는 것은 모순된 사리일 뿐만 아니라 문제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음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아울러 우리 나라 학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과열현상과 사교육비의 과다지출 및 대학입시경쟁의 과열 등은 좀 더 깊이 생각하면 공정하고 올바른 평가문화가 정착되지 못한데 그 원인의 일부가 있으며 나아가서는 자유경쟁의 부재 내지 그 결과를 존중하지 않는데서 오는 부분도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래 자기의 편안함, 이득, 권리 등은 곧잘 주장하되 남으로부터 평가받는 것은 싫어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직체에는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과 이를 집행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정한 평가가 없으면 자유경쟁이 불가능하며 자유경쟁이 없으면 열심히 일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의 지배적인 경향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전 인류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이상경(理想境)을 갈구해 온 인간의 몸부림에서 보면 유감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서글픈 현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사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현실에 바탕을 둔 인간의 꿈을 이루어 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교육현장에서 공정한 평가문화가 정착하여 합리적인 자유경쟁이 이루어져야만 국가발전의 원동력인 교육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특히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나라 교육에서의 평가문화의 정착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이며 공정한 평가에 바탕을 둔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풍토가 정착해야 교육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란 인류가 끊임없이 추구해온 자유와 평등이란 소중한 두 개의 가치를 구가하는 한편 다른 한편에서는 공정한 평가문화에 바탕을 둔 합리적이며 활발한 자유경쟁을 보장한다는 것이 그 체제의 요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재삼 새겨야 한다. 달리 말하면 미국 체제의 강점은 엄정한 평가와 냉엄한 자유경쟁을 통해서 인류의 오랜 꿈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데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 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 교육의 발전도 교육 그 자체뿐만 아니라 교육을 직접 간접으로 담당하는 사람과 기관 모두가 얼마만큼이나 공정한 평가문화를 정착시키며 또한 자유경쟁을 활성화해 가는가에 달려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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