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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노래

이명언 | 공주대 교수


추운 어둠의 계절 겨울은 가고 다시 새 봄이 도래했다. 허나 화사한 처녀의 여심(女心) 같다는 이 봄이 어쩐지 하늘에 낮게 드리운 구름처럼 을씨년스럽고 쌀쌀하기만 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나 할까?
그리운 님이 찾아오는 반갑고 넘치는 기쁨 대신 어쩔 수 없는 사시(四時)의 순환이라는 사이클을 타고 그냥 우리에게 회색 빛 하늘처럼 다가온 느낌이다.
오늘도 우리들은 도처에서 싸우고 있다. 싸움이 우리의 삶인 양 서로 네 편, 내 편 갈라서 죽기 살기로 싸우고들 있다. 무슨 미움과 한이 마음속에 그리도 많을까? 조선조의 유생들처럼 ‘나는 희고 너는 검다’는 식의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서로 목청을 높여가며 싸우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 정말 우리를 슬프게 하는 모습들이다. 남의 말에는 귀를 막고 그저 나만 옳고 잘 낫다고 우기는 모습에서 무슨 가능성이 나올 수 있을까? 좋게 말하면 ‘독불장군’이요, 솔직하게 말하면 ‘우물안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들 거개가 자신의 이해와 편익만을 위해서 재주껏 팽이처럼 돌아가면서도 우리는 왕왕 ‘남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산다’고 치장들을 한다. 그래서 결백성향 말의 유희가 바람처럼 시세를 탄다.
생각하고 책을 읽는 일이 거의 쓸모 없어진 사회,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찰라적 한탕주의와 같은 물신주의에 빠져서 허우적대면서 우리는 정녕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 걸까? 그 지겹던 ‘보리 고개’가 우리들을 생존의 최저선에서 전율케 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건만 이제 우리들은 그 처절했던 배고픔의 아픔을 거의 잊은 듯하다. 허나 둘러보면 아직도 우리들 주변에는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딱한 노인들이나 결식아동들이 적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반세기가 넘도록 ‘이팝과 고깃국’이라는 신기루에 홀린 듯 살아온 저 북한 주민들보다는 우리가 먹고사는 일은 월등히 잘 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물질적으로는 많이 좋아졌건만, 우리들의 정신적 가치나 모랄(moral)은 왜 나날이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을까? 슬픈 일이지만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을 할 수 있을까를 시험하듯 우리는 ‘좁은 문’대신 저 나락의 ‘넓은 문’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민족이 생래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일본인들은 그래도 나름대로의 ‘사무라이’ 기질이 있다. 원래 백제의 전사를 뜻하는 ‘싸울아비’가 일본으로 넘어가서 ‘사무라이’라는 검객을 뜻하는 말이 되었건만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책임감은 그들의 무사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50배 이상 책을 읽고 메모를 생활화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PAGE BREAK]내가 미국 유학시, 여름에 머리가 하얀 남녀 노인네들이 대거 조지아주에서 플로리다 주립대로 비행기를 타고 여름학기에 등록하려고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노인네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공부하러 왔느냐?”고 그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나를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체질화된 한국식 사고 방식에 나도 모르게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다. 평생교육이라고 일평생 책을 읽고 공부하는 미국인들, 천혜의 땅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늘 웃으면서 자기 일을 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남을 도우려고 애쓰던 미국인들, 나는 홀로 미국 대륙을 짧은 방학동안 돌아다녔어도 외롭지 않았다. 달리는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 속에는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미국 국가가 사운드 트랙으로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평소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다가도 위기가 닥치면 하나같이 일심(一心)으로 단합하는 그들의 ‘화이부동(和而不同;unity in diversity)’ 정신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허나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국민은 어쩌면 개성과 자아가 강해서 잘 단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를 잘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특히 오천년 역사 동안 근 1000회의 외침과 내우외환 속에서 시달려오고 주변 강대국에 둘러 쌓여서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아왔기에 우리의 국민적 에너지는 늘 밖으로 뻗어나가기보다는 내재화(內在化)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같은 국민끼리 서로 싸우고, 가슴속에 숙명처럼 한을 품고 ‘화병’이란 특이한 마음의 병을 앓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머리와 재능이 있음은, 더구나 한 번 시동이 걸리면 엄청난 저력을 보이는 뛰어난 국민임은 거의 공지(公知)의 사실이 아닌가 한다.
다만 어둡고 추운 겨울도 새 봄이 오면 봄눈처럼 물러가듯이 우리도 가슴속에서 미움과 부정과 한을 버리고, 긍정과 희망의 심상(心狀)으로 새 봄을 맞이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있는 것이라곤 사람밖에 없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그저 먹고, 마시고, 뛰지만 말고 성(誠)으로 일하고, 책을 읽고, 생각하는 국민이 되어보자. 가슴속에 시기와 미움이라는 어둠의 마음을 버리고 워즈워드나 버지니아 울프처럼 꿈과 희망이라는 빛을 가슴속에 안고 애써 살아가 보자. 그러다 보면 우리도 진정 잘 살게 되고 선진국으로 다가설 수 있지 않겠는가?
양수리 근처 운길산 꼭대기에 세조대왕이 왕명으로 세웠다는 수종사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두 한강물이 서로 한데 몸을 섞는 그 벅찬 감동의 풍광처럼 우리들도 이제 서로 돕고 화합하는 상생의 새 봄을 고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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