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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녹인 칼날

최홍숙 | 충남 공주 학봉초 교사


20여 년 전, 6학년 담임을 하던 때의 일이다. 학생들을 하교시키기 직전 교무실에서 우리 반 철수를 호출해 갔다. 사전에 아무 연락을 받은 적이 없어 그 애가 왜 불려 갔는지 몰랐다. 철수는 금방 돌아왔다. 책가방을 챙겨 보내려고 하는데 녀석의 가방 속에서 닳고닳아 짤막해진 부엌칼이 교실 바닥으로 뒹굴어 나왔다. 어딘가에 갈고 갈아 자기 손안에 들어올 만하게 만든 것 같았다. 시선이 철수한테 집중된 터라 나와 반 애들 모두 한순간 흠칫 놀랐지만 캐묻지 않았다. 녀석은 흘끗 눈을 치떠 담임인 나의 눈치를 한순간 살피더니, 얼른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 날은 아무 말 없이 하교시켰다.
그 때, 내가 다니던 그 학교는 전통(?)적인 좀도둑 조직이 있었다. 중간놀이나 운동회 연습차 운동장에 나가면 돈을 잃어버리는 선생님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예 핸드백을 갖고 나가거나 교무실에 맡기고 나가곤 했었다. 교실에 잘 둔다는 것은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캐비닛의 자물쇠 장치를 뜯어내고 선생님들의 지갑을 털어 갔다.
모두가 운동장에 나가 있었으니 재학생을 의심하긴 어려웠다. 근처 불량배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분명 내부에도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 가정환경이 안정되지 못하거나 부모님이 생업에 종사하느라 바빠 방임상태의 학생들이 불량친구의 꾐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어수선한 환경 속에 있었던 한 녀석이 철수였다.
교무실에서 전해준 이야기는 여러 명이 남의 집 창문을 타고 넘어가 저금통 훔치기, 목욕탕 엿보기 등의 좀도둑질을 했단다. 저금통은 한두 집이 털린 것이 아니라 꽤 여러 집이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경찰관이 조사하러 와서야 모두가 알게 됐지만, 당장 내일 그 녀석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하였다. 녀석은 비쩍 마르고, 작고, 내성적이고, 말이 없었다. 이튿날 하루 일과는 숨가쁘게 팽팽 돌아갔고 녀석은 흘끔거리며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마땅히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 무렵엔 모두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던 때였다.
나는 도시락을 녀석의 책상에 갖다 놓고 마주 앉았다.
“철수야 선생님하고 점심 같이 먹자.”
녀석은 꼼짝없이 숨을 죽이며 할 수 없이 도시락을 내놓고 같이 먹기 시작했다. 침묵이 싫으니까, 나는 당연히 이것저것 물었다. 어제 일만 빼고….
식구는 몇이니? 부모님은 뭐하시니? 네가 좋아하는 과목은? 뭘 잘 먹니? 커서 뭐가 될래?
부모님은 시장에서 옷가게를 한단다. 누나가 하나 있는데 중2란다. 도시락은 누나가 싸주었단다. 아마 밤늦게 들어오신 부모님이 도시락까지 챙겨주진 않으셨나 보다. 그래도 반찬이 맛있다며 내 꺼 한번, 녀석 꺼 한번, 번갈아 가며 도시락을 비웠다. 반찬은 짜디짠 무 장아찌였지만 참 맛있다고 해 주었다. 그 때 맛있다고 했을 때, 녀석이 살짝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나는 장아찌 반찬을 먹으며 녀석과 친해졌다. 좀도둑 사건은 발설하지 않았으므로 반 친구들도 몰랐고, 그 녀석도 나도 그 사건을 모르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PAGE BREAK]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그 해 크리스마스날이었다. 우리 집 편지함에 우체국 마크가 찍히지 않은 편지가 꽂혀 있었다. 보니까 녀석이었다. 선생님의 사랑에 고마워하며 나쁜 짓 하지 않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때 무렵엔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 집에 무척이나 놀러 오고 싶어했었다.
그 뒤로 몇 해가 바뀌는 동안 걸어와서 넣어 놓고 간 편지가 들어 있었다. 4∼5년 계속되다가 아주 끊어졌다. 보낸 이의 주소가 없으니 답장을 할 수 도 없고 그렇게 녀석은 내 가슴속에 지금도 남아 있다.
철수야 어디 있니? 떳떳하게 선생님 앞으로 나오렴, 선생님 집까지 왔으면서 왜 들어오지 못하고 도망치는 거니? 너 중·고등학교 다닐 때 몰래 와서 편지 넣어 놓고 갔었지?
그리고 너 군대 갔을 무렵부터는 편지가 없더라. 휴가 올 때 들어오지 그랬어. 작고 말랐던 네가 무지하게 컷을 거야. 지금 애 아빠가 되어 있거나 여자 친구가 있겠구나? 데려와 같이 들어오너라. 네게 딸린 식구들에게 선생님한테 사랑 받고 학창시절을 보냈노라고 자랑하렴.
벨만 누르면 되는걸…. 철수야 네 모습이 정말 보고 싶다. 기다릴게. 나는 그 때 그 철수가 보고 싶어 이렇게 수신인 없는 편지를 허공에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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