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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품

윤태정 | 서울 삼선초 교사


책장을 정리하다 해묵은 책 다섯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조심스레 꺼내보니 ‘七言絶句’, ‘五言絶句’라 쓰여진 두보(杜甫)의 시선(詩選)으로 증조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자주 읽으시던 것이다. 누렇게 빛이 바랜 책을 펼치니 메케한 향내가 콧속으로 폴폴 들어온다. 어릴 적 고향의 사랑채에서 맡던 바로 그 냄새가 방안 가득 쏟아져 나온다.
나는 파아란 하늘가에 단풍든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슴에 묻어나는 어머니의 젖내음마냥 고향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고향의 하늘가에 그리운 얼굴 하나가 맴돈다. 증조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어린 내게 천자문을 가르치셨다. 사랑방에서 동네 또래들과 천자문을 목청 높여 읽었다. 할아버지는 꾀를 내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하면 벽장 깊숙한 곳에서 눈깔사탕을 꺼내주셨고, 놋주발에 담긴 따끈한 약식을 내주기도 하셨다. 천자문을 떼고 책거리를 할 때면 어머니들은 할아버지께 술과 고기를 대접해 드리고, 우리에게는 팥시루떡을 해주셨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떡을 들고 행여 고물이 떨어질세라 조심스럽게 먹던 어린 가슴에는 뿌듯한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났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한시 읊기를 좋아하셨고, 가끔 구성진 시조창도 하셨다. 식구들은 낭랑한 목소리로 한시를 읊으시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아침을 열었다. 나는 사랑채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뜻 모를 한시에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긴 담뱃대를 화롯가에 탕탕 두드리는 소리도 경건하게만 들려왔다.
할아버지는 특별한 의술도 가지셨던 분이다. 독사에 물려 새파랗게 죽어 가는 사람에게 침 한 방과 약 한 첩으로 핏기를 돌게 하였고, 급체하여 숨이 넘어가는 사람도 침 한 방으로 살려내는 신통함을 보이셨다. 사랑채는 약을 짓거나 침을 맞는 사람들의 도란거리는 말소리로 늘 따뜻하기만 했다. 병이 낫게 된 사람들은 반드시 과일이나 술을 가지고 다시 찾아왔다. 의술이야 동의보감의 허준에 비길 바 아닐지라도 인술을 펼치는 할아버지의 자세만은 일맥상통하리라는 뿌듯함으로 할아버지를 존경했다.
가끔 머리를 감으실 때 망건을 풀어놓으신 모습이 참 신기했다. 여자처럼 길게 풀어진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리기 위해 거울을 보고 단장하실 때면 으레 옆에서 망건을 붙잡아 드려야 했다. 동네 아저씨로부터 할아버지의 상투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단발령이 일어났을 때 마당으로 들이닥친 일본군을 불호령으로 내쫓으셨단다. 일본인이 나타날 적마다 매번 무섭게 호통을 쳐 돌려보내셨다니 과연 할아버지의 위엄은 대단하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대단한 유교 사상을 갖고 계신 분이셨다. 아무리 추워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양반의 체통을 언제나 지키셨고, 아무리 바빠도 뛰지 않는다는 양반의 철칙을 몸소 그대로 지키셨던 분이다. 여름에도 의관을 바로 갖추고 한결같은 낯빛으로 군자의 도리에 대해 말씀하기를 좋아하셨다.
“예로부터 군자는 싫고 좋음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고 했느니, 한결같은 낯빛을 지녀야 속 깊은 사람이라 할 수 있느니라.”
진정한 선비 정신이 무엇인지 몸소 실천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신 분이다.
하루는 행랑채에서 놀다가 아래채 식솔들의 점심 때가 되어 새참으로 나온 칼국수를 얻어먹게 되었다. 나중에 그 사실이 들통나 눈물이 쏙 빠지도록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영문도 모른 채 꾸중을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서야 겨우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체면을 소중히 지키면서 넙죽넙죽 함부로 받지 않는 법을 가르치신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자기의 분수를 중히 여기고 처지에 맞게 행동하라는 걱정이셨을 것이다. 체면없이 자신의 이익만 탐하여 아무 일에나 덤비는 사람들, 체통을 버리고 자신의 쾌락에만 들떠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 때의 일이 떠오르곤 한다.
[PAGE BREAK]약장을 정리하고 골패를 두는 것 외에는 오로지 책 읽기에만 전념하셨던 할아버지! 아흔이 넘어서도 담장을 넘길 정도로 목소리가 우렁차셨던 분이 세월의 섭리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셨다. 언제까지나 꼿꼿한 자세로 살아가실 것만 같던 분께 불어닥친 노환은 혹독한 시련이었고, 매서운 바람이었다. 의관을 단정히 하고 목청 높여 한시를 읊던 분이 걷잡을 수 없이 기억력이 쇠퇴하여 주위 사람들을 안스럽게 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변해 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서럽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할아버지께서 꽃상여를 타고 돌아올 수 없는 먼 길로 가시던 날, 허수아비는 논마다 서성대고 황금들녘도 숨을 죽였다. 커다란 소나무 밑 양지바른 자리에 하관식을 하고 내려오는데 그 맑던 하늘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요란했다. 갑자기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길 가시는 거라며, 생전에 그렇게 착하게 사셨는데 당연한 일이라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생전에 쓰시던 유품들이 안마당으로 수북하게 쌓였다. 수 십 년을 함께 했던 닳아빠진 골패갑과 담뱃대, 겨울밤 훈기를 돌게 하던 화로, 밤늦도록 불 밝히던 등잔, 조그만 놋요강, 따끈한 약식을 담아 두던 놋주발, 셀 수도 없이 많은 한문 책, 때묻은 약장, 얼룩덜룩 찌든 병풍. 그 숱한 것들 중 유독 나의 시선을 잡아끈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친지들이 골동품이다 장식품이다 하여 챙겨가고 난 후 책더미를 뒤지다 유난히 낡고 허름한 두보의 시선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기상이 담긴 이 책으로나마 그 분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랴.
마음에 우후죽순처럼 자라나는 욕심으로 숨이 차 헐떡이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신다면 뭐라 하실까. 살기에 급급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양반 의식을 고집하시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반성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케케묵어 얼룩덜룩한 책을 보니 할아버지를 대한 듯 숙연해진다. 쩌렁쩌렁 담장을 넘기시던 그 목소리가 책갈피 사이사이로 들려오는 듯하다. 이 책은 앞만 보고 달려가는 내 삶을 차분하게 다독여 주는 그분의 숨결이다. 살기에 급급하여 정신없이 뛰어가는 나 자신을 향하여 태연한 발걸음 하라는 그 분의 소중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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