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떻게 선정하게 되었나
처음에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권해 줄 만한 ‘성장소설’을 권해 보고자 하였다. 청소년기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성장기’라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여기에 지난 세기에 우리 나라는 농업화와 산업화, 정보화라는 세 개의 커다란 사회 변화를 단숨에 경험했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사회와 자신이라는, 겹으로 다가오는 변화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해 가기가 매우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장소설’이란 말을 간단하게 쓸 수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성장소설이란 서구 소설에서 정착된 개념과 용어로서 근대시민사회의 출현과 맞물려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서구의 경우 성장소설이란 근대시민사회의 도덕과 윤리가 저변에 깔려 탄생한 소설 형태로서 통용되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성장이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가며 그려진다는 성장소설의 특성을 고려할 때 근대화 시기에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역사의 파행을 심각하게 경험한 우리 현실에서 서구적 의미의 성장소설들을 찾기란 힘들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만나게 되는 고민과 갈등, 혼돈이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노력”
많은 논의 끝에 일단 서구의 성장소설들에 해당하는 작품들, 이를테면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나 노발리스의 <<푸른 꽃>>,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디킨즈의 <<데이빗 커퍼필드>>, <<위대한 유산>> 등의 성장소설들은 제외하고자 한다. (별 고민 없이 권장도서목록의 자리에 서구 고전을 손꼽는 것은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 주제이며, 이런 소설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읽혀질까 신중하게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또한 입시 지옥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의 아픔과 상처를 그리며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도 제외하였다. (왜 이런 류들 있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등등. 열악한 현실을 호소하는 차원에 머물렀을 뿐 자아의 온전한 성장을 보여 주지 못하였지요.) 덧붙여 <<연어>>와 같이 동화의 구조에 기대어 성장을 다룬 소설들도 제쳐놓았다. 책/따/세 내부에서 이런 소설들이란 적당한 교훈과 달콤한 언어로 기묘하게 뒤섞은 ‘성장소설(?)’에 불과할 뿐이라는 비판이 소수지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우리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만나게 되는 고민과 갈등, 혼돈이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또 실제로 해결에 도움을 받을 만한 소설들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책/따/세 선생님들이 머리를 맞대고 찾아 본 작품 가운데서 대표작들을 몇 개 고르고 지도 방법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책/따/세 선생님들의 개성이 담긴 문체와 글의 형식을 따로 손보지 않았다. 형식과 문체도 내용을 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책을 권하는 일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PAGE BREAK]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로버트 뉴턴 펙 지음 / 김옥수 옮김 / 사계절출판사 / 중1부터
“어려운 현실을 수용하고 자기 몫의 삶을 감당해 내려는 소년의 의젓한 모습 돋보여”
시대적·사회적 배경이 달라서 아이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염려스러웠는데 의외로 아이들이 좋아한 책이다. 190쪽 분량에 활자도 빡빡하지 않아 금새 읽힌다. 주인공인 로버트는 셰이커교도라서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는 데다가 집안도 가난하다. 주인공과 50살 정도 나이차가 나는 아버지는 성실하고 노련한 돼지 도살꾼이지만 문맹이라서 투표조차 할 수가 없다. 아이는 한 집안의 일꾼 노릇을 톡톡히 해내면서 살고 있다. 12살이 된 로버트는 우연히 이웃집 암소의 출산을 돕고 암소 목에 있는 혹을 떼어주기까지 한다. 그 대가로 어린 돼지 핑키를 받아서 씨받이돼지로 키울 꿈을 키우며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핑키와 함께 뒹굴며 자라난다. 그러나 핑키가 새끼를 낳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로버트는 혹독한 가난 때문에 유일한 친구였던 핑키를 아버지가 도살하는 것을 쓰라린 마음으로 돕게 된다. 다음 해 봄이 오면서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아이는 이제 13살의 가장으로서 자기 앞의 삶에 대해 맞서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이란 도살꾼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면서, 힘든 경험을 통해 이제는 정신이 부쩍 커버린 로버트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려운 현실을 수용하고 자기 몫의 삶을 감당해 내려는 소년의 의젓한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놀랍다.
못 배우고 가난한, 그러나 성실한 아버지의 모습은 수필 <<아버지의 손>>을 떠오르게 한다. 이 글을 읽은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아버지의 삶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유의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 보게 하면 좋겠다. 또한 이 글이 자전적인 것임을 일깨우면서 이 가난한 13세의 아이는 그 뒤 어떤 과정을 거쳐 작가로 성장하였을까 상상하여 써 보게 할 수 있다.(이 때 일확천금이나 후원자 등의 우연적 요소가 너무 부각되지 않도록 유의한다.) 가난한 시골아이가 작가로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손춘익이 쓴 아동소설인 <<땅에 그리는 무지개>>(창작과비평사)를 더 권해 줄 수 있다.
홍진숙 (석관중 국어교사 keunf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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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터 카터 지음 /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 / 중2부터
“인디언 조부모의 지혜를 통해 한 인간으로 자라는 소년의 섬세한 내면이 잘 그려져”
이 책의 원제는 주인공의 인디언식의 이름을 빌린 ‘작은 나무의 교육’인데, 번역하면서 붙인 멋진 제목으로 인해 읽기 전부터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언제였을까? 혹은 언제일까. 의심을 품지 않고, 이해와 배려 속에서 조화로운 삶을 꿈꾸던 시절이 있기나 한 걸까. 감수성이 예민하기는 했지만 조숙했던 나에게 성장기는 잘 견뎌내야 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어야 했던 시기였다. 그때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나는 지금, 불안한 마음으로 삶의 길 입구에서 서성이는 성장기 친구들에게 이 ‘좋은 책’을 권하는 기쁨이 크다.
이 책은 미국 체로키 인디언의 후예인 저자가 일찍이 부모를 잃고 인디언이던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일화식으로 서술한 일종의 자서전적 소설이다. 세상의 모든 헛똑똑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인디언의 자연철학을 생활로 풀어내시는 작은 나무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 지혜로운 어른들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였다. 탈콘 매가 무리에서 처진 메추라기를 잡아채는 것을 보며 자연의 이치를 일러주시고, 그 이치가 혹독한 겨울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더욱 튼튼히 자라게 하는 것임을, 주변을 위해 거름이 되는 삶을 말해주시는 할아버지는 나에게도 성장의 본이 되는 어른이었다.
이 책의 끝부분에 미국 인디언의 강제이주의 역사가 담겨있어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었을 때의 충격으로 읽었다. 그러나 이 책은 사회 역사적인 인간으로서의 성장보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지혜를 통해 한 인간으로 자라는 작은 나무의 섬세한 내면이 잘 그려진 소설이다. 자연 속에서 풍요로워지는 대목에서는 시튼의 <<작은 인디언의 숲>>(두레)과 산 속에서 야생생활을 한 소년 이야기 <<나의 산에서>>(비룡소)가 겹치기도 한다.
밑줄 그을 부분이 참 많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는 딸아이의 동화책 <<할머니가 남긴 선물>>(시공주니어)에서 죽음에 임박한 할머니돼지가 잔치를 벌여야겠다며 손녀돼지와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과 따스한 흙냄새를 맡는 장면이, <<여름이 준 선물>>(푸른숲)에서는 우연히 만나게된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한층 성숙해지는 세 소년의 얘기가 생각났다.
그러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나에게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중반 이후에 잠깐 나오는 학교 풍경이었다. 인디언의 가치관과는 대척점에 선 교사의 몰이해, 학대받는 섬세한 내면의 소유자 작은 나무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동녘)의 제제와 <<당나귀귀>>(문원)의 레이몽이었다. 이 책을 선생님과 아이들 모두에게 권한다.
서미선 (서울사대부속여중 국어교사 lechat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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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박상률 지음 / 사계절출판사 / 중1부터
“섬마을 소년 훈필이가 성숙을 위해 겪는 희망과 좌절, 떠남과 돌아옴을 다뤄”
따스함이 실린 봄바람이 불 때면 대지에서는 겨우내 잠들었던 만물은 두터운 껍질을 힘겹게 벗으며 새싹을 틔우고 한살이를 시작한다. 이 점에서 봄이라는 계절과 그 때 부는 바람은 생명력이고 희망인 셈이다. 우리 인간도 인생에서 10대 청소년기를 봄의 계절로 간주한다. 10대의 별칭인 청춘이나 성숙 단계를 일컫는 사춘기라는 단어에서도 여지없이 봄이 들어있다. 결국 인생에서 10대 청소년기는 희망과 생명력이 넘치는 시기인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싹을 틔우기 위해 껍질을 깨고 허물을 벗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듯이 우리 인간도 모든 면에서 무지하고 미숙한 10대 청소년기에 성숙을 위한 고통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
<<봄바람>>은 섬마을 소년 훈필이가 성숙을 위해 겪는 희망과 좌절, 떠남과 돌아옴을 다룬 이야기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어지는 2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작품은 13살 어린 훈필이가 보고 느끼는 사랑과 그리움, 세상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반감과 도전의 의지를 과장 없이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내용 전개가 1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린 오영수의 <<요람기>>와 유사한데, <<요람기>>를 수업하면서 함께 읽고 내용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래서 이 작품은 누구에게나 쉽게 읽힌다. 그 만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좌절과 방황 속에 조금씩 성숙하는 훈필이의 모습이 아니다. 이보다는 부조리한 현실과 자신이 꿈꾸는 이상과의 괴리에서 방황하며 어딘가로 떠나야만 하는 어린 영혼들의 순수한 열정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의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과 의지가 이 사회의 생명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도 훈필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했지만 교사로서 학생들의 고뇌와 방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가출했다가 돌아온 아이에게 실제로 표현은 안 했지만 ‘부족한 것 없는 녀석이 이러는 건 사치야!’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난 봄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 훈필이처럼 꿈이 깨지고 현실의 무게에 힘들어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 그들에게 무모한 일탈이 아닌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떠나는 순수하고 건강한 일탈을 유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침 지난 여름 학기말 고사기간, 사춘기를 힘들게 보내고 있던 우리 반 중현이가 바람을 쐬겠다고 잠시 가출을 했다. 강촌 강가에서 텐트를 치고 혼자 지내던 중현이는 이상하게 여긴 그 곳 관리인 아저씨의 연락으로 3일만에 귀가했다. 가출에서 돌아온 중현이에게 나는 ‘바람 괜찮았어?’라고 물었고, 중현이는 그냥 빙그레 웃는 것으로 답했다. 방학을 몇 일 앞두고 나는 그에게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했었다. 여름방학 개학날 나는 중현이에게 ‘별 일 없었지?’하고 물었다. 이때도 중현이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중현이는 그 날 이후 말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효석 (숭문중 국어교사 CHEKTTAS@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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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인생》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중1부터
“70년대를 살아온 주인공 여민이가 삶에서 건져 올린 교훈이 돋보이는 작품”
여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학생들에게 책을 권하면서도 늘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곤 한다. 혹시 아이들의 코드와 나의 것이 엄청 차이가 나지나 않나 싶어서이다. 그래서 곧잘 활용하는 방법이 딸아이를 활용(?)하는 것이다. 다음의 글은 딸아이가 최근에 적은 독후감이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고작 중 1때라 몰랐지만, 다시 찬찬히 책을 훑어보려니 제목부터 맘에 걸린다. 아홉 살이란 말 뒤에 인생이라니, 어쩐지 이상하지 않은가? 인생이란, 모름지기 성인이 되어서의 신산함 같은 게 밴 말이 아닌가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 의문은 곧 풀렸다. 책 속에서, 아홉 살 아이 역시 어른처럼 세상에 부대끼며 나름대로 심각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여민이는 산동네 아이다. 그리고 ‘숲에 살지 않는 사람이 숲을 가지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른스런 아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소설에서는 가난한 아이를 매질하는 교사나 악랄한 집주인, 혹은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떠밀려지는 소년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조숙하다고는 해도 주인공이 아홉 살 아이인 만큼, 이 이야기들도 큰 틀에서 보면 여민이의 아홉 살 인생 중에 일어난 일의 하나로 처리될 뿐이다. 이 소설의 빛나는 점은 오히려 여민이가 삶에서 건져 올린 교훈에 있을 것이다. 소설 앞자락에서 여민이의 어머니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다’같은 것이 그런 교훈이다. 때때로 내 처지를 필요 이상으로 비관적으로 보곤 하던 나에게는 가슴이 뜨끔한 말이었는데, 비단 이 부분뿐이 아니라 허영심에 가득 찬 여민이의 짝 우림이나 우연찮게 받은 미술상 때문에 거짓된 그림을 그리게 된 여민이의 모습도 내 자신 이렇게 되지도 않게 나를 포장하고 산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딱딱한 이야기는 제쳐두고서라도, 아홉 살 인생은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음에도, 그 시절 9살 아이와 주위 사람들의 모습을 내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비교해가며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다. 아무쪼록 이 책이 널리 읽혀져서 많은 사람들이 내가 선망해 마지않던 여민이의 힘세고 정의로운 아버지, 나를 무서움(?)에 떨게 했던 골방 철학자, 그리고 여민이와 그 친구들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덜너덜해진 딸아이의 책 <<아홉 살 인생>>을 보면서 우리 학교 도서실에서 이것을 구입해도 아깝지 않겠다 싶어서 책을 구해 놓았다.
서경은 (중앙여고 사서교사 snose@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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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 문예출판사 / 고1부터
“현대 사회의 허위와 위선을 증오하는 주인공 홀든의 소박한 꿈이 돋보여”
정말이지 학교에 다니기가 싫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출을 꿈꾸고 실제로 가출도 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도 없이 다시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졸업 말고는 학교를 벗어나는 길이란 영영 없는 것 같았다. 교실 뒷자리에 웅크리고 닥치는 대로 외국 소설들을 읽어 댔다. 늘 마음은 외롭게 외국을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국어 교사가 되어 우리말과 글, 우리 생각과 느낌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 이 책은 내 영혼의 푸른 초상화 같다. 그래서 나는 문제아 홀든을 사랑한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문제아들을 따스하게 감싸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문제아들은 홀든의 또다른 분신들이다. 그리고 나의 젊은 분신들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문제아 홀든 콜필드가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집에 돌아가기까지 2박 3일 동안의 방황의 기록이다. 네 번째 고등학교에서도 쫓겨난 홀든의 퇴학 사유는 성적 불량. 물론 성적 불량이란 표면상의 이유일 뿐, 그 심층에는 성년의 삶으로 성장하는 젊음의 위태로운 방황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방종과 훼탕으로 젊음을 소진하는 쓰레기 인생이 아님을 방황의 틈틈이에서 보여 준다. 이를테면 수녀들의 봉사에 감동하고, 연못이 얼어붙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걱정하는 등 따스한 인간적 면모를 보여 준다. 또한 그는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진정으로 좋아한다.
그는 현대 사회의 허위와 위선, ‘허식, 무신경, 약육강식, 비속함’등을 증오한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 뾰족히 해결할 능력도 아직 없는 그는 여동생 피비에게 말한다. 법률가가 되는 대신, 호밀밭에서 노는데 정신이 팔려 벼랑에서 떨어지는 줄도 모르는 아이들을 붙잡아 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에 그려 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 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바보 같은 짓일 줄은 알고 있어. 그러나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그것밖에 없어.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말야.
<<호밀밭의 파수꾼>>을 아이들에게 소개해 주는 날은 참 기분이 좋다. 우선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주거나 앞서와 같이 읽을 만한 대목들을 타이핑해서 나눠준다. 국도를 가로지르는 홀든의 행동과 심리 묘사, 예수께서 진정으로 좋아할 사람은 오케스트라에서 작은북을 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목의 진정성, 마지막으로 가출을 꿈꾸는 홀든의 혼잣말 등등 아이들에게 직접 권해 줄 만한 대목은 많다. 직접 찾아보라는 것도 좋다. 제임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 정우성 주연의 ‘비트’, 또 최근 영화인 ‘눈물’ 등의 영화와 엮어서 지도해 보는 것도 좋겠다. 무엇보다도 좋은 방법은 10대 때의 얘기를 하면서 ‘나’를 솔직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홀든을 읽고 나를 읽는다. 나도 아이들을 읽는다! 우리들 모두는 어느새 <<호밀밭의 파수꾼>>이 된다!!
허병두 (숭문고 국어교사 wisefree@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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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고1부터
“비극적 역사를 씨줄 삼고 모성의 자연을 날줄 삼아 짠 소년의 서정적 성장사”
오래전부터 ‘성장소설’하면 으레 헤세의 <<데미안>>을 들었다. 본디 삐닥이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저는 그런 평가에 부정적이었다. <<데미안>>의 문학적 미덕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에 의구심이 많은 편이다.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이 작품이 형상화하고 있는 메시지가 너무 추상적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도대체 알을 깨고 나와 비상하는 삶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지 않은 이 작품을, 성장소설의 간판스타로 추켜세우는 것은 무리라 싶었던 것이다. 고작 <<데미안>>만을 추천하는 관례에 불만이 많았던 나에게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는 그야말로 가뭄 끝에 만난 단비 같다. 아! 드디어, <<데미안>>보다 더 뛰어난 성장소설이 나왔구나. 봐라! 친구들이여, 내가 그동안 왜 <<데미안>>을 비판했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목소리가 저절로 터져나왔다.
<<지상의 숟가락 하나>>는 4·3이라는 비극적 역사를 씨줄로 삼고 제주도의 자연을 젖줄 삼은 한 소년의 서정적 성장사를 날줄로 삼고 있다. 외형상의 얼개는 초로의 주인공이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간을 거슬러 유·소년기를 회상하는 성장소설 형태로 이뤄져 있다. 그의 회상은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질곡의 시대를 견뎌 온 아버지에게 죽음은 “실패자가 쟁취한 최후의 승리”인 것이다. 소설은 물로 갇힌 섬 땅, 그 수평선을 뚫고 세계로 나아갈 꿈을 키우던 소년, 그리고 그 문턱에 장애물로 서 있는 아버지를 박차고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소년과 죽은 아버지와의 화해로 끝을 맺는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두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하나는 제목이다. 왜 지상의 숟가락 하나일까? 나는 그것이 숟가락 하나만 있어도 먹여주고 키워줬던, 마치 어머니 같았던 제주도의 자연을 돋을새김하기 위해서였다고 결론지었다. 다른 하나는 왜 이 작품이 장편소설이면서도 마치 조각보를 잇듯 잘게 쪼개진 에피소드 묶음으로 씌어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나는 그게 자신의 기억에 오랫동안 침전돼 있던 추억을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싶었던 작가의 배려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설사, 소설적 완성도가 떨어지더라도 그 소중했던 빛나는 이야기들을 작품이라는 그릇에 다 쏟아 붓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아이들이 <<데미안>>만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작품보다 더 빼어난 우리의 소설이 있음을 아이들이 알았으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곤 이 땅에 숟가락 하나만 들고 있어도 충분히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영혼이 성장한 아이들이 됐으면 좋겠다.
이권우 (도서 평론가 lkw101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