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2024.11.16 (토)

  • 맑음동두천 10.9℃
  • 구름많음강릉 16.0℃
  • 맑음서울 14.0℃
  • 맑음대전 13.2℃
  • 맑음대구 13.6℃
  • 구름많음울산 17.4℃
  • 맑음광주 14.1℃
  • 맑음부산 19.2℃
  • 맑음고창 11.3℃
  • 맑음제주 19.9℃
  • 맑음강화 12.4℃
  • 맑음보은 11.3℃
  • 구름조금금산 7.5℃
  • 맑음강진군 15.9℃
  • 구름조금경주시 14.7℃
  • 맑음거제 17.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자신을 만나는 법

문경보 | 서울 대광고 교사


참 맑은 하늘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더니,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맑은 하늘 속에 먹구름이 있었고, 비와 바람이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아이들은 한순간 멈칫하다가 장대처럼 굵어진 비 사이를 뚫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땀과 비로 온 몸이 범벅이 되었지만 흥겨운 표정을 지으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속에 고개를 숙인 채 운동장을 천천히 걸어가는 범진이가 있었습니다. 비에 흠뻑 젖어 체육복 위로 쇄골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범진이의 모습이 안쓰러워 담임 교사는 우산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범진이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사춘기의 열병을 앓기 시작한 친구입니다. 여러 모양으로 어른들의 흉내를 냈고, 소위 몹쓸 짓은 다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뒷감당은 모두 부모님의 몫이었습니다. 구세주는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범진이에게 푯대를 보여주셨습니다. 조각을 전공하기도 했던 미술 선생님인 담임 선생님은 범진이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시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는 전국미술대회에서 비록 뒷부분이지만 입상을 하는 성적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그림을 그릴 때 범진이의 눈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과 같았습니다. 교과 과목의 성적도 상승하여 전과목에 걸쳐 전교 최상위권으로 진입했습니다.
사건은 담임 교사의 국어 수업 시간에 벌어졌습니다. 고전 작품을 현대어로 해석하고 그것을 수행 평가에 반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범진이는 고전 작품에 나오는 단어의 뜻을 자세히 해석하지 않고 그냥 단어와 단어를 이어서 해석했습니다. 이미 수행 평가에 대한 기준을 알려 준 상황이었기 때문에 담임 교사는 범진이에게 최고 점수를 주지 않고 중간 점수를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범진이는 항의를 하였고, 담임 교사는 차분하게 기준표를 보여주었습니다. 범진이는 책상까지 손으로 치며 일방적으로 담임 교사가 제시한 기준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담임 교사는 학생들에게 발표를 한 뒤 동의를 얻어서 결정한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범진이는 그것이 바로 일방적인 것이라고 더욱 흥분하며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담임 교사는 범진이를 교실 밖으로 나가라고 했고, 범진이는 복도에서 무릎을 끓고 앉아 있었습니다. 담임 교사는 범진이가 반항하는 것이 미워서가 아니라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길 원했습니다.
“선생님이 너에게 복도로 나가라고 한 것이 그렇게 마음이 상했니?”
“아닙니다. 사실 제가 점수 때문에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복도로 나오셨을 때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 때문에 저는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내가 한 말?”
“예. 왜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고 있냐고 선생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 중학교 때보다 모든 것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PAGE BREAK]그런데 어느 날부터 선생님께서 자꾸 저보고 자신을 그만 괴롭히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 중학교 때 비해서 지금 저 자신을 사랑하며 살고 있고, 이기적인 생활은 중학교 때 충분히 해서 이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
“그래, 해답은 얻었니?”
“ …….”
“범진아! 너는 정말 중학교 때 방황했던 네 삶이 무조건 던져 버려도 될 만큼 가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긴 하지만 중학교 시절에 네가 방황했던 것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 않았니? 아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겉멋에 들떠서, 또는 호기심 때문에 막 살았다고 치자. 그래도 네 삶의 한 부분임은 분명한 사실 아니니? 껴안고 가야지. 버릴 수 없는 삶이잖아. 지금의 너를 있게 한 네 삶이잖아. 그런데 자꾸 과거의 너를 괴롭히고,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살기 위해 현실의 너를 자꾸 괴롭히고 있는 네가 불쌍해서 선생님이 자신을 사랑하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란다.”
“…….”
“범진아, 너의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은 내가 생각하기에 존경스럽고 고맙기까지 한 분이다. 너의 방황을 멈추게 하기까지 선생님이 얼마나 마음을 쓰셨는지 누구보다 같은 교사인 내가 잘 알거든. 그런데 말이야, 혹시 다른 사람이 너를 인정해주니까 더 큰 인정을 받기 위해 더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니? 그 열심 속에 너라는 존재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있니?”
“선생님,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세요.”
“넌 지금 삶을 즐기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해. 체육 점수를 따기 위해 늦도록 운동장에서 슛 연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점심 시간에 아이들과 즐겁게 축구를 할 수는 없니? 쉬는 시간에 공부하지 말고 매점에 가서 아이들과 빵 한 조각이라도 나눠 먹으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니? 너 자신에게 자유를 선물할 수는 없을까? 잠깐 멈춰서 심호흡을 해. 그리고 주변을 둘러봐. 그러면 즐거운 일들이 많고, 그것을 즐길 수 있도록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너를 보았으면 좋겠어.”
“선생님,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실 저도 언제부터인가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성적이 올라가고 그림이 좋아지니까 주변에서 많은 기대를 하시고, 그게 처음에는 즐거웠지만 조금씩 부담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저에게 분명하게 미래를 보여주신 것처럼 선생님께서 저를 가르쳐 주실 수 없으신가요?”
“범진아, 그건 너 혼자 해내야 할 거란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싸움이란다. 그러나 선생님이 방법은 알려주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이 두 가지를 갖고 한 번 시작해 보렴. 하루아침에 이뤄지리라 생각하지 말고, 이런 저런 방법을 시도해보고, 많은 친구들과도 이야기를 해 보고, 무엇보다 너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보렴.”[PAGE BREAK]다음 날부터 범진이는 점심 시간에 공부 대신 아이들과 뛰어놀기 시작했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즐겁게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가끔은 텅빈 화폭을 바라보다 방울방울 눈물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범진이는 자신과 대화를 하고, 진정한 자신을 만나기 위해 빈 도화지에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오늘도 범진이가 진정 자신을 찾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범진이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