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차 교육과정에서 정식으로 도입한 수준별 교육과정이 단계형과 심화·보충형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과정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는 사람들조차 단계형과 심화·보충형이 완전히 별개의 것이며, 이 둘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교육부에서 2001년에 학부모, 학생 대상 홍보용으로 만든 7차 교육과정 자료에도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3. 수준별 교육과정에는 어떤 종류가 있으며, 어떤 교과에 적용됩니까? ☞ 수준별 교육과정은 학생의 개인차에 따른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합니다.
단계형 수준별 교육과정은 수학, 영어(중등) 교과에 적용되며, 충실한 기초·기본 교육을 통하여 해당 단계의 학습 결손을 방지함으로써 다음 단계의 학습에 도움을 주게 됩니다.
심화·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은 국어, 사회, 과학 교과와 초등 영어 교과에 적용되며, 기본 학습 결과에 따라 심화·보충 학습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이 개인차에 따라 공부할 수 있게 됩니다.
<교육부 홈페이지 2001. 1. 13 등재 제7차 교육과정 학부모 홍보자료 5쪽>
심화·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을 국어, 수학, 과학 등 3개 교과에만 한정하고 수학, 영어 등 2개 교과는 단계형으로만 운영하는 듯한 이 홍보 자료는 물론 7차 교육과정 고시 총론 부분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2) 국민 공통 기본 교과 중 다음의 교과는 수준별 교육과정을 편성, 운영한다. ㈎ 수학 교과는 1학년부터 10학년까지 10단계, 영어 교과는 7학년부터 10학년까지 4단계를 두고, 각 단계별로 학기를 단위로 하는 2개의 하위 단계를 설정하여 단계형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 국어 교과는 1학년부터 10학년까지, 사회와 과학 교과는 3학년부터 10학년까지, 영어 교과는 3학년부터 6학년까지 심화·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 <초·중등학교 교육과정>(1997. 12. 30) 12쪽 -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교과별 교육과정 각론 부분의 ‘교육내용’, ‘교수-학습 방법’에는 수준별 5개 교과가 일제히 똑같은 형태의 심화·보충형 방식의 교육과정을 가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선 5개 교과의 학년별 교육과정 내용의 일부를 예시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 국어 1학년 [말하기] 영역 교육과정 내용(33쪽) (1) 말하기가 인간의 삶에서 필요함을 안다.
【기본】
입을 다물고, 손짓과 몸짓만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심화】
말이 없었다면 인간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이야기한다.
[PAGE BREAK]□ 사회 4학년 교육과정 내용(121쪽) ㈏ 지역의 자원과 생산 활동
① 우리 지역의 경제에서 비중이 큰 몇 가지 생산 활동을 선정하여, 각각의 생산 활동과 자원 간의 관계를 조사한다.
② 우리 지역의 생산물 중에서 외국에 수출되는 것을 조사하여 우리 지역과 외국과의 관계를 이해한다.
③ 공공 서비스의 사례를 조사하여 지역 경제에서 자치 단체의 역할을 설명한다.
[심화 과정]
① 우리 지역에서 나는 자원이 우리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본다.
□ 국사 10학년 교육과정 내용(181쪽) ⑴ 중세의 세계
① 동양의 중세를 당말 5대로부터 몽고 제국에 이르는 시기를 중심으로 이해한다.
② 서양의 중세 사회를 서유럽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 비잔틴 문화권으로 나누어 파악한다.
[심화 과정]
① 동양과 서양의 중세에 대한 시대 구분 이론의 차이를 이해한다.
② 동양과 서양의 중세 사회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수성과 차이점을 추론할 수 있다.
□ 수학 8-나 단계 교육과정 내용(228쪽) ㈎ 확률과 통계
확률과 그 기본 성질
① 간단한 경우의 수 또는 상대도수를 이용하여 확률의 뜻을 안다.
② 확률의 기본성질을 이해하고 간단한 확률을 계산할 수 있다.
[심화학습]
① 확률이 이용되는 간단한 문제 상황을 조사한다.
□ 과학 9학년 교육과정 내용(256쪽) (6) 전류의 작용
(가) 전압과 전류가 일정할 때 발생하는 열량(온도 변화)을 측정하며, 전기 에너지가 열에너지로 전환됨을 이해한다.
(나) 전류가 흐르는 도선 주위에 생기는 자기장의 특성을 확인하고, 자기장 속에서 전류가 흐르는 도선이 받는 힘에 대하여 이해한다.
[심화과정] 가정에서 소비전력 구하기
스피커 만들기
□ 영어 7-a 단계 [쓰기] 영역 교육과정 내용(328쪽) (1) 학습한 문장을 듣고 받아 쓴다.
(2) 자신에 관한 사실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쓴다.
(3) 문장을 읽으며 적절한 구두점(쉼표, 따옴표, 느낌표 등)을 표시한다.
(4) 알파벳 필기체 대소 문자를 쓴다.
[심화 과정]
(5) 일상 생활에 관련된 쉬운 내용의 그림이나 도표를 보고, 문장으로 풀어쓴다.
(6) 가족에 관한 사실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쓴다.
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각 교과의 내용을 기본학습 부분과 심화학습 부분으로 나누어 기술했다는 점은 단계형으로 분류되어 있는 수학, 영어나 심화·보충형인 국어, 사회, 과학이 모두 같다. 물론 현재 나와 있는 이 5개 교과의 교과서도 모두 같은 편제로 되어 있다.(이 5개 교과 모두 보충과정 내용 기술이 안 된 것은 보충학습이란 것이 “기본 내용의 요약 정리 및 복습”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매 단원마다 반복하여 기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PAGE BREAK]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국어, 사회(국사), 수학, 과학, 영어 등 5개 과목의 세부 교육과정 및 교과서가 모두 심화·보충형으로 되어 있는데, 총론 부분에서만 심화·보충형이 국어, 사회, 과학 등 3개 교과로만 기술되어 있다는 말이다.
총론 부분에서 1학년부터 10학년까지 단계형 수준별 교육과정이라고만 기술되어 있는 수학 교과도 교과별 교육과정, 즉 각론 부분에 들어가면 전 학년(1~10학년) 전 단계(가, 나 단계)에서 다른 심화·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의 교과와 마찬가지로 일제히 심화·보충형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울러 각론 부분의 [수학과 교수-학습 방법]에도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마. 보충 과정, 심화 과정 학습을 효율화하기 위해 다음 사항에 유의한다. (1) 보충과정의 내용은 기본 과정의 내용 중, 최소 필수가 되는 내용요소들을 추출하여 구성한다. 여기서의 최소 필수는 내용의 기본 요소, 연계성, 다음에 학습할 내용과의 관계 등에 중점을 두되 학생, 단원에 따라 또는 보충과정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
(2) 보충과정의 내용은 기본과정의 내용을 더 낮은 난이도로 하향 초등화하여 구성한다. 예를 들면, 어떤 정리와 이에 대한 증명이 기본과정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때, 형식적인 증명은 난이도가 높으므로 생략하고 몇 개의 수치를 대입해 봄으로써 정리가 성립함을 확인해 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3) 심화과정의 내용은 기본과정에서 습득한 수학적 지식을 실생활에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보게 하고, 문제 해결을 배양하는 데 그 중점을 둔다.
(4) 심화과정의 내용을 다룰 때에는 상위 단계에서 학습할 수학적 개념, 원리, 법칙을 도입하거나 탐구하게 해서는 안 된다.
- <초·중등학교 교육과정>(1997. 12. 30) 237쪽 -
그리고 영어 교과에서도 총론 부분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다.
“3학년부터 6학년까지는 심화·보충형으로 운영하고, 7학년부터 10학년까지는 단계형으로 운영한다.”고 분명히 해 둔 것이 결정적인 오류였다. 종합적인 상황으로 보건대, 이 부분은 “3학년부터 10학년까지 심화·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으로 운영하되, 7학년부터 10학년까지는 단계형 수준별 교육과정을 병행하여 운영한다.”로 해야 옳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교과별 교육과정 내용 및 교수-학습 방법, 그리고 교과서까지 일관되게 수학, 영어 교과가 국어, 사회, 과학과 똑같은 형태의 심화·보충형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총론 부분에만 그러한 상황이 반영이 안 되어 있는 까닭으로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는 것이 된다.
이제 총론 부분을 사실에 맞도록 제대로 기술한다면 아래와 같이 고쳐야 한다.
(2) 국민공통기본교과 중 다음의 교과는 수준별 교육 과정을 편성, 운영한다.
㈎ 수학 교과는 1학년부터 10학년까지 10단계, 영어 교과는 7학년부터 10학년까지 4단계를 두고, 각 단계별로 학기를 단위로 하는 2개의 하위 단계를 설정하여 단계형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 국어, 수학 교과는 1학년부터 10학년까지, 사회, 과학, 영어 교과는 3학년부터 10학년까지 심화·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2. 지침상 오류에 이어지는 또 다른 오류들
심화·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이 “기본학습이 끝난 후에 기본학습의 정도를 참작하여 심화 그룹, 보충 그룹 중 하나를 학습하도록 하는 교육과정”이라는 것에 대한 대 국민 연수, 홍보는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PAGE BREAK]그러나 학습 내용의 위계상 단계로만 나누어졌을 뿐인 수학, 영어의 단계형 수준별 교육과정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 결정적인 오해는 이 단계형을 6차 교육과정까지 그토록 논란이 되어 왔던 상, 중, 하 우열반 편성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교육부나 교육과정평가원 또는 한국교육개발원에 비싼 예산을 들여 출판한 연구 보고서에서마저도 적지 않게 보여지고 있다.
수준별 교육과정 운영실태 보고서의 대부분은 단계형 운영 현황표에서 ‘단계’를 상, 중, 하 또는 A, B, C 단계 등으로 구분해 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7차교육과정 고시의 어느 부분에도 ‘단계’를 상, 중, 하로 나누라는 말은 없다. 고시에서의 ‘단계’는 어디까지나 ‘1-가’ ‘6-나’ ‘8-a’ ‘10-b’ 등과 같이 학습 내용상의 단계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혼란은 ‘단계’란 용어에 대한 설명에 실패했거나 수학, 영어도 국어, 사회, 과학처럼 구체적인 교수-학습 방법에 들어가서는 똑같은 심화·보충형 수준별 수업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제대로 홍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점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수준별 교육과정에 대한 교육부의 후속적인 각종 연구물에서는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의 한 부분일 뿐인 수준별 교육과정의 개념을 11, 12학년의 선택중심 교육과정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대 해석하여 많은 사람들을 더욱 혼란에 빠트렸다. 분명히 7차 교육과정 고시문에는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 부분에서만 수준별 교육과정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고시문에는 선택중심교육과정이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과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연구자료나 보고서 수준에서 머물던 이러한 혼란은 2004년도에 들어서는 또다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일환이라면서 선택중심교육과정의 고등학교 2, 3학년 보충수업까지 수준별로 운영하라는 교육부 학교정책과의 지시가 또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일부 학교에서는 그 지시를 따르지 않고 7차 교육과정 고시문의 원래 지침대로 운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교육부나 교육청의 지시를 당장은 불복하는 모양새가 되어 상당히 불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