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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비단길

김민정 | 서울 장평중 교사·시조시인


기차는 계속 유원을 향해 달린다. 서서히 찾아오는 황혼. 차창으로 바라보니 열차 뒤쪽으로 초승달이 지고 있다. 옛날 천축(인도)을 가기 위해 말을 타고 타박타박 걷던 사막의 서역 만리, 그 긴긴 평원을 나는 지금 기차를 타고 달리고 있다.
밤이 되니 하늘엔 별이 초롱초롱 빛난다. 건조하고 맑은 사막의 밤하늘엔 은하수도 길게 흐른다. 이렇게 많은 별을 바라보기란 실로 오랜만이다. 어렸을 때 고향 강원도 산골에서 여름밤이면 쑥을 꺾어 모깃불을 피워놓고 돗자리 위에 누워 어머니께 옛날 얘기를 해 달라고 졸랐고 어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별을 쳐다보곤 했었다. 또, 언니들과 ‘별 하나, 나 하나….’하며 별을 헤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열심히 외우기도 했었다.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북두칠성도 보이고 북극성도 보인다. 알퐁스 도데의 ‘별’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프로방스 지방의 아름다운 산의 모습과 목동의 아가씨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목동이 아가씨에게 들려주는 별에 관한 이야기. 사랑은 순수할 때만 아름다운 것이겠지. 이렇게 별빛이 찬란한 밤이면 사랑하는 그 누구에게 내가 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연을 담아 별빛처럼 영원히 반짝일 수 있는 긴긴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다.
사막 지대에서 천문학이 발달한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 안개가 끼는 날도, 흐린 날도 거의 없기 때문에 별이 잘 보여 관측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리라.
차안에서 세수도 하고 화장도 하면서 유원역에 도착한 시간은 다음날 아침 7시 40분, 서안으로 가는 차표를 구할 수 없어 포기하고 9시 30분, 드디어 돈황행 버스를 탔다.
지붕에다 짐을 싣고 밧줄로 묶은 후, 사막을 달리는 마이크로버스. 끝없는 지평선이 가물대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뜨거운 땅위를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다. 사막의 공동묘지도 보인다. 열려진 창문으로는 더운 바람이 훅훅 들어오고 햇살은 뜨겁다. 똑같이 삭막한 풍경의 2시간 반이 지나자, 돈황에 다 왔다고 한다.
우리는 가능한 싼 곳을 택해 숙소를 정하고 나서 여행사에 들러 서안행 기차표 6인승 침대 상·하를 예매할 수 있었다. 유원에서 서안까지는 기차로 40시간, 그 긴 시간을 서서 갈 수도 없어 웃돈을 주고 표를 구해야 했다.
저녁에는 명사산(鳴沙山)과 월아천(月牙泉)을 구경하러 갔다. 낮엔 너무 모래가 뜨거워 해가 질 무렵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기다리는 도중에 화장실을 갔는데 남녀 구별 칸은 되어 있었지만 아예 문이 없어 민망했다.
명사산은 고운 모래로 되어 있는 산이다. 그야말로 그림에서만 보던 진짜 아름다운 모래 사막이다. 모래산 위에서 밑으로 모래를 타고 내려올 때 나는 소리가 아름답다고 하여 명사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입구에선 입장권을 팔고, 낙타를 타고 모래산의 낮은 부분을 돌게 하려고, 많은 낙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운없어 보이는 그들을 타고 싶은 생각이 없어 걸어서 모래산의 능선을 오르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순례자처럼 모래산의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낮에는 너무 뜨거워 해가 질 무렵에야 오를 수 있다. 모래는 무척 아름답고 부드러웠다. 푹푹 빠지는 모래를 밟으면서 능선까지 오르면 아무도 밟지 않은 모래 능선이 참으로 곱고 오랜 바람에 시달려서인지 아래와는 달리 아주 단단하다. 발자국을 내기조차 미안한 고운 모래능선의 곡선은 뉘엿한 햇살을 받아 더욱 묘하고 아름답다. 명사산 밑에는 정자가 있고, 월아천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초생달 모양의 연못이다. 연못 자체로는 신기할 것이 없지만 사막 속의 연못이라 신기했다.
돈황은 비단길(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천산북로와 천산남로의 교차로에 있었으며 처음부터 이 여행의 목적지였다. 우리는 돈황의 천불동(막고굴)을 가기 위해 투어를 이용했다. 즉석에서 팀이 이루어지는 마이크로 관광버스였으며, 막고굴 관람 외에도 몇 개의 코스가 더 들어 있었다.
[PAGE BREAK]처음에 본 130호 석굴의 부처님은 길이가 30미터쯤 되었는데 발 하나의 길이가 4∼5미터쯤 되는 것 같다. 석굴의 겉은 사암으로 자갈과 모래로 되었으며, 부처님은 나무로 심을 만들고 겉은 진흙에다 짚을 섞어 이겨 바른 것이었다. 벽면도 진흙과 짚을 이겨 바르고 평평히 다져 회칠을 한 다음 그림을 그렸다. 천장과 사면벽이 모두 벽화로 되어 있어 신기했다. 약 4세기경부터 1000여 년 동안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그토록 긴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색상이 무척 선명한데, 그 이유는 아마도 19세기까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개발이 제대로 안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형태와 표정도 가지가지이다. 부처님의 입적하실 때의 모습인지, 옆으로 누워있는 와불도 무척 재미있다. 우리 나라 석굴암의 부처님처럼 화강암을 깎아 만든 것도 아니고, 8등신의 섬세한 구성도 아니라서 만드는 데 힘은 덜 들었겠지만 대단한 집념으로 만들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계속 만들어졌기에 하나의 돌산에 이토록 많은 부처님동굴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1000여 개의 부처님 동굴이 있다고 천불동이란 이름이 붙었으나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492개라고 한다. 이민족의 침략을 피해 이곳에 와 살면서 그들의 평화를 염원하느라 그토록 많은 부처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곳은 우리의 신라승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인도여행기)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사막 가운데의 깎아세운 듯한 작은 절벽에 있는 동굴이라 문화 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어두컴컴한 굴속에 전등조차 설치되지 않아 어두워서 자세히 구경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사전지식이 없던 우리는 손전등조차 준비하지 않았기에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비치는 손전등을 따라가며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부처들은 대체로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는 편이지만, 어떤 동굴에서는 벽화를 떼어간 모습도 보이고, 이교도들의 짓인지 부처님의 얼굴이 짓이겨지고 팔이 망가지기도 했다. 귀중한 예술품들을 훼손한 얄팍한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거부감이 일었다.
이곳 벽화에서 보면 여자의 얼굴은 한결같이 둥굴다.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미인은 어른들이 복스럽게 생긴 얼굴이라고 말하는 둥근 얼굴인가 보다. 중국의 미인 양귀비도 둥근 얼굴에다 지금으로 치면 비만형의 여자라고 한다. 이곳 벽화에서 동양미인의 기준을 볼 수 있었다.
돈황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유원을 향해 오는데 멀리 파도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사막에 웬 바다. 착시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가까이 오니 그것은 사막 속의 오아시스 마을 ‘유원’의 초록색 나무들이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비로소 뜨거운 사막을 왕래하던 옛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었을 오아시스가 매우 소중함을 느꼈다. 교사로서 제자들이 믿고 의지하는 오아시스가 되려고 노력해 왔는데 많이 부족한 것 같다.
10년 전에 다녀온 돈황이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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