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이 내리는 날이면 내 어릴 때 추억들이 긴 환상의 필름으로 뇌리를 스친다.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하던 시절의 추억이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였다. 온 세상은 은빛으로 새하얗게 옷을 갈아입고 나무들도 흰 꽃을 피워 한층 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운동장에는 함박눈이 탐스럽게 내려 우리를 마냥 즐겁게 해 주었다. 우리는 바둑이처럼 좋아서 날뛰며 눈싸움, 눈지치기, 눈사람을 만들며 신나게 놀았다. 몇몇 아이들은 양지쪽에 웅크리고 앉아 추위를 이겨내느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한동안 신나게 놀던 아이들은 날씨가 너무 매섭게 추워 앞다투어 교실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르며 입김을 호호 불며 추위를 녹이느라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짓궂은 남자 아이들은 선생님의 허락도 아랑곳 없이 휴지조각을 모아서 난로를 피우겠다고 아우성들이었다. 그 당시 난로는 무쇠덩어리로 만든 것이 고작이었다. 성냥으로 휴지에 불을 붙이니 휴지가 탈 동안은 불기운이 있어 교실이 제법 훈훈하였지만 불기운이 사라지면 창 틈으로 스며드는 매서운 바람은 교실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우리들은 또 다시 난로를 피우려고 교실 주위를 맴돌며 나무토막, 휴지들을 주워 모았다. 나무토막, 널판지, 휴지 할 것 없이 모두 눈 속에 묻혔던 것들이라 불이 잘 붙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난로에 열기가 되살아나도록 서로 번갈아 가면서 입김을 호호 불었다. 입김을 불 때마다 불은커녕 매캐한 연기만 모락모락 피워 올랐다.
지독한 연기에 모두들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입김을 호호 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입김을 불어도 불이 붙지 않으니 무척이나 속만 상했다. 어느새 교실은 매캐한 연기에 휩싸이게 되어 앞도 잘 안 보이고 아이들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울고불고 야단법석이었다. 견디다 못한 아이들은 허겁지겁 교실 밖으로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철부지인 우리는 서로 먼저 나오려고 밀고 당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연기만 모락모락 뿜어대던 난로에서 그제서야 불기운이 교실을 휘감았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시뻘건 불이 교실에서 치솟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난로를 넘어뜨린 것이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만 있었다. 울음소리가 온 교정에 메아리쳤다. 불길은 금방이라도 교실을 삼켜버릴 듯이 넘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란 선생님들께서 허겁지겁 달려 오셨다. 유리창문이 쫙쫙 갈라지면서 산산조각 부셔지고 있었다. 우리는 겁에 질려 가슴을 조이며 선생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끄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불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교실 마루바닥과 책걸상 몇 개를 태우고서야 겨우 불은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선생님들의 얼굴은 온통 숯검댕이가 되어버렸다. 위기의 순간을 모면했다는 안도감에 사로잡힌 우리들은 시무룩한 표정들이었다.
“허락 없이 난로를 피운 사람은 팬티만 입고 운동장에 모엿!” 청천벽력 같은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며칠 전에 눈이 내린 운동장은 찬바람만 쌩쌩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모두들 너무 추워서 옷을 벗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라고 하면서 다시 호통을 치셨다. 그제서야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면서 옷을 벗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화가 난 선생님은 막대기를 탁탁 내리치면서 다그치셨다. 앞다투어 속내의까지 벗고 운동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더구나 여자 아이들 앞에서 이런 꼴은 상상만 해도 겸연쩍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매서운 눈바람에 오들오들 떨면서 맨발로 눈 위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조금의 용서도 아랑곳 없이 운동장을 뛰라고 하셨다.
맨발로 눈 위를 달리니 유리조각을 밟는 것처럼 발이 따갑고 아려서 엉엉 소리내어 우는 아이들이 늘어만 갔다.
운동장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차츰 횟수가 거듭될수록 운동장은 울음소리로 메아리쳤다. 온 몸은 땀과 진흙 투성이로 흠뻑 젖고 말았다. 눈으로 덮힌 새하얀 운동장은 삽시간에 진흙 범벅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 추위는 달아나고 얼굴과 온 몸은 홍당무처럼 빨갛게 얼어버렸다. 우리가 달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여자 아이들이 킥킥거리고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아스라이 귓전을 스칠 때마다 얄밉기까지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에 힘은 점점 빠져 흐느적거리고 온 몸은 파김치가 되어 헉헉 쓰러지는 아이들이 늘어만 갔다. 그 당시 선생님은 군대에서 막 제대를 하고 복직을 하셨다. 선생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운동장을 뛰셨다. 운동장 열 바퀴를 돌고나서야 선생님은 ‘그만!’이라고 외치셨다. ‘그만’ 이라는 소리에 모두들 숨을 몰아 쉬면서 운동장에 벌렁 누워버렸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가누면서 누구하나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우리들이 걱정되셨는지 아이들을 하나씩 손수 일으켜 세우셨다.
툭툭 털고 일어난 우리들은 우물가로 가서 몸을 씻고 교실로 들어갔다. 그 당시 시골 학교에는 수도가 없고 우물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종이를 나누어주시면서 반성문을 쓰라고 하셨다.
빨갛게 달아오른 손을 호호 불며 난생 처음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다.
“자, 반성문은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는 마음으로 쓰는 거야.” 하시면서 머리를 어루만져 주셨다.
선생님께서 우리들이 쓴 반성문을 한 장씩 읽어 주시면서 미소를 짓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때 선생님께서 ‘잘못을 했으면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셨다. 요즘도 잘못을 하면 그 때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되새기면서 반성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열성이 넘치신 선생님의 사랑의 매가 내 마음에 한 줄기 빛으로 남아 있다.
‘눈 위에 뿌린 맨발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제 교단에서 내 정성을 뿌리고 있다. 교육애의 열성이 넘치신 선생님께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려던 다짐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