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교육을 대학입시와 결부시킨다면 영재교육은 해서는 안 된다. 수월성교육을 받는 것이 상급학교 진학, 특히 명문대학 진학을 위한 보장권(?) 혹은 특허권(?)이 된다면, 당연히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을 수월성교육을 받는 상위 5% 안에 넣기 위해 빚을 내서라도 사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다.
흑백논리보다는 상록수의 잎갈이 같이 암울했던 1980년대의 군부정권 하에서도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사람이 있었고, 그들의 노력은 마침내 우리나라를 ‘대통령도 대놓고 비판할 수 있는 개방사회’로 발전시켰다. 아무리 사회제도가 나빠도 모든 사람이 그 제도에 순응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제도의 모순점을 이겨내는 진정한 의미의 불의에 저항하는 선각자적 영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선각자적 영재성을 발휘한 분(사회제도 개혁 면에서의 영재)들의 노력 덕분으로 우리는 오늘의 민주사회를 만끽하고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고교평준화정책을 ‘수월성 말살정책’으로 서슴없이 매도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현재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 중, 20·30대와 40대 중반 이전은 평준화 세대들이다. 그리고 40대 중반 이후부터 50~60대들이 비평준화세대들이다. 과연 이 평준화세대들이 비평준화세대들에 비해 수월성이 떨어지는가?
오늘날 중국의 계림에서도, 북경에서도, 상하이에서도 ‘쿵따리 샤바라’의 노랫소리를 듣게 만든 세대는 누가인가? 한류 열풍은 누가 만들었는가? 욘 사마는 누구이며, ‘움직이는 1인 기업’ 보아라는 가수는 어느 세대인가? 오늘날의 한국을 IT 강국으로 급부상시킨 그룹들은 어느 세대인가? 항상 외국 영화의 쿼터를 걱정하던 세상에서 1000만 명 돌파의 국산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어느 세대인가?
이들이 바로 평준화세대들이다. 평준화세대의 교육을 받았지만, 저마다의 타고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각 분야에서 창조적 영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너무 ‘평균화정책=엘리트 말살정책’으로만 매도하지 말자.
평준화정책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교육정책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순리이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잘못 중 하나가 흑백논리(黑白論理)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흑백논리에 빠지면, 과거를 전부 부정하거나 전부 찬성하는 식의 극단적 사고를 할 위험성이 높다. 오늘은 항상 어제를 근거로 태동하는 것이며, 오늘은 내일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과거를 완전 부정하지 말자. 교육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나무를 생각해 보아라. 소나무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푸름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상록수라고 한다. 그런데, 그 소나무 밑을 가 보자. 그곳에는 누런 솔잎이 수북이 쌓여 있다. 즉 항상 푸름을 간직하지만 끊임없이 잎갈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나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이다. 교육정책은 모름지기 이런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항상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더 좋은 것을 향해 개선해 나갈 때, 학생과 학부모와 국가가 희망적으로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평준화정책의 좋은 점도 인정하면서 논의를 시작하자.
수월성교육은 시대 요구이며 미래 위한 투자 교육은 사회변화와 밀접히 관련된다. 이를테면, 과거 조선왕조 때는 양반 자제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소위 말해서 계급사회에서는 특수계층에 해당하는 엘리트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우리 사회는 산업사회로 급격히 변화되었고 이에 따라 산업사회의 필요에 부합하는 민주시민양성교육이 최우선 교육목적으로 추구되어 왔다. 이러한 정신이 반영된 것이 고교평준화정책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산업사회를 넘어 지식기반 정보화사회로 발전해 가고 있다. 따라서 교육의 목적 자체가 사회의 변화에 부응하여 변할 수밖에 없다. 이를 테면, 민주시민양성이라는 절대가치는 그대로 추구하되, 개성교육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교육목적이 변화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맞춤식 개성교육을 강조하는 각 분야의 수월성교육 정책이 대두되는 것이다. 수월성교육 정책이 출현한 근본 동기가 과거 계급사회의 엘리트 교육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현재 추구하고자 하는 수월성교육은 각 분야에서 재능 있는 학생을 발굴하여 조기부터 그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이다. 만일 계급 사회적 엘리트교육이 된다면 당연히 배척되어야 할 정책이다.
교육정책이 입안되어 적용될 때는 반드시 ‘교육기회의 공평성(educational equity)’과 ‘교육의 수월성(educational excellence)’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교육 받을 기회 면에서는 공평해야 한다. 이것은 헌법에도 보장된 권리이다. 또한 보통교육을 받음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과 기능, 지식을 반드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정한 교육목적과 교육목표에 관한한 모든 학생은 공평하게 교육을 받아야 하며 받을 권리가 있다.
한편, 모든 학생에게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잠재가능성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국가의 책무이다. 수월성교육이란 상위 몇 %의 학생만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라기보다는, 학생 개개인의 잠재가능성 중에서 자신의 재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분야를 탐색하여 그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학생들은 수월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 면에서 공평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학생이 같은 분야(예컨대, 과학, 예술, 정보, 인문 분야 등)에서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과학 분야에 재능 있는 학생은 과학 분야에서, 언어 분야에서 재능 있는 학생은 언어 분야에서 각기 자기의 재능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 진정한 교육기회의 공평성이다. 베토벤에게 물리학 분야의 재능을 계발하는 기회를 부여하기보다는 음악적 재능을 계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수월성교육 정책은 현 정부의 최고 정책
수월성교육은 21세기 교육패러다임에도 부합된다. 20세기 산업사회의 교육목적이 지식전수에 있었다면, 21세기 지식기반 정보화사회의 교육목적은 새로운 지식의 창출과 공유에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땅에서 걸을 수도 있고, 물에서 수영할 수 있고, 급하면 조금은 날 수도 있는 오리형 인재양성이 주된 목적이었다. 반면에 지식기반 정보화사회에서는 돌고래같이 수영을 잘하거나, 타조같이 잘 달리거나, 독수리같이 잘 날 수 있는 반(反)오리형 인재양성이 주된 목적이다.
우리가 오리형 인재양성을 통해 1만 불 국민소득을 올렸다면, 반 오리형 인재양성을 통해 2만 불 소득을 추구해야 한다. 영화 분야에서, 신약(新藥) 분야에서, IT 분야에서, BT 분야에서…. 다른 나라보다 먼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창출하는 길만이 우리가 세계 속의 선진국과의 생존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이다. 화이자 제약회사는 비아그라를 개발함으로써 연간 수억 달러의 순수익을 올리고 있고, 퀄콤 회사는 휴대전화의 핵심기술로 천문학적 로열티를 우리나라에서 받아가고 있으며, 빌게이츠는 윈도우 소프트웨어를 팔아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국가적 목적의 달성 여부는 인재양성에 있으며, 인재양성을 위해서는 각 분야에서 재능을 보이는 학생들을 조기에 발굴하여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수월성교육체제가 마련되어야 한다.
일찍이 중국의 덩샤오핑(登小平)은 복권되면서 제일 먼저 중국 전역에서 1000명의 초상아(超常兒, 우리말로는 영재아)를 선발하여 세계 각국으로 유학을 보냈으며, 그 세력들이 현재 중국의 발전을 주도하고 있는 후진타오(胡錦濤) 세대들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眞僞)를 떠나, 국가(혹은 국가의 지도자)가 선견지명을 갖고 국가의 번영을 위해 미래를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는 노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국가에서 수월성교육을 천명한 것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현 정부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본다.
수월성교육은 사교육비를 부추긴다? 일부에서는 수월성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반대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반대하는 측은 ‘지나친 입시경쟁풍토가 조성될 것이고, 학력의 대물림 현상이 심화될 것이며, 이로 인해 사교육비가 엄청나게 증가할 것이고, 국민혈세 2000억을 소수 학생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공평성의 원리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하면서 수월성교육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수월성정책을 입안하고 적용하는 정부는 이러한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되, 그들의 비판이 얼마나 타당한지도 깊게 생각해야 한다.
우선 사교육비가 천문학적인 숫자로 증가할 것이라는 비판이다. 사교육비 증가에는 허약해진 공교육이 한 몫을 했다. 공교육의 경쟁력이 약화된 데에는 물론 정부의 정책이 주원인이 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연 사교육비의 책임이 정부에게만 있는 것일까? 이 책임에서 학교와 교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사교육비 경감은 교육의 주체인 교사들의 사명감과 소명감, 신념과 노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교육비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정부 정책이나 학부모의 공교육에 대한 신뢰회복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공교육을 정상화시켜 사교육의 도움이 필요치 않게 만들겠다는 우리 교사들의 적극적 참여가 가장 필수조건이라 본다. 따라서 수월성교육정책으로 인해 사교육비가 증가할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적다.
흔희들, 평준화정책을 깨뜨리면 마치 사교육비가 천문학적인 숫자로 증가할 것 같이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 반문을 해보자. 평준화정책이 실시된 이후 사교육비는 줄었는가 아니면 정말로 천문적인 숫자로 늘어났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지출되고 있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현 부모들의 경제력과 부모의 욕심이 사교육비의 증감을 좌우하는 제 1요인일 것이다. 오히려, 제도는 제도로서 당위성을 갖고 추진되어야 할 것이며, 제도는 시대의 조류와 필요에 따라 능동적으로 도입되고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수월성교육은 대학진학과는 철저히 무관하게 운영돼야 한다.
수월성교육정책과 대학입시는 결코 연결시키지 말자 수월성교육의 한 방안으로서, 영재교육 대상을 현 2만5000명에서 2010년에는 8만 명 수준으로 늘린다는 정책을 내 놓았다. 이에 대해, 전교조는 “상류계층 출신이 명문대 입학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어 ‘학력 대물림 현상’이 고착될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많은 언론들은 2008학년도 이후 대입제도와 수월성교육정책의 관계를 우려하면서 ‘영재교육을 받은 학생에 대한 평가를 대학입시와 어떻게 연계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교육부 정책보좌관은 “2008학년도 새 대입제도와 함께 각 대학에 도입을 권장하고 있는 입학사정관제가 정착되면 대학별로 영재교육 등 수월성교육을 받은 우수인재들을 선발하는 방안이 시행될 것”으로 말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재교육을 대학입시와 결부시킨다면 영재교육은 해서는 안 된다. 수월성교육을 받는 것이 상급학교 진학, 특히 명문대학 진학을 위한 보장권(?) 혹은 특허권(?)이 된다면, 당연히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을 수월성교육을 받는 상위 5% 안에 넣기 위해 빚을 내서라도 사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다. 만일 이처럼 수월성교육을 받는 것이 상급학교 진학에 어떤 형태로든지 혜택으로 작용한다면, 수월성교육을 받지 못하는 모든 부모들은 들고 일어나서 이 제도를 반대해야 한다. 국민의 혈세를 특정 집단 자녀의 대학진학 보장권 내지 특허권 취득비로 사용하도록 놔두어서는 결코 안 된다.
교육부는 수월성교육정책, 특히 영재교육정책은 대학입시와 결부시키지 말아야 한다. 수월성교육은 철저히 대학진학과 무관하게 운영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과학에 재능 있고 재미있어서 과학영재교육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학생이 그 교육의 영향으로 대학을 가든 못가든 그것은 순전히 그 학생의 문제이다. 창의성 중심으로 영재교육을 받는 것이 오히려 대학진학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한다. 수월성교육은 수월성교육 그 자체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단, 대학진학 후에도 영재교육을 연계시키려는 노력은 각 대학에 권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학에 입학한 후의 일이다.
우리 사회가 아주 잘못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무언가 혜택을 받으면 그것을 이용하여 다음의 무엇을 보장하라는 아주 이기적인 주장을 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과학영재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훌륭한 과학영재교육을 받았으면 국민의 혈세로 좋은 교육을 받은 것 그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과학영재학교를 다녔으니 KAIST 진학을 보장하라고 요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다. 이런 억지 주장이 어디에 있는가? 과학영재학교에 자발적으로 왔으면, 그리고 그곳에서 타 학생들이 받지 못하는 교육적 혜택을 받았으면 그 자체로 감사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그 다음 단계의 진학을 위해 스스로 노력할 일이지, 왜 그 학교에 다니는 것이 특혜의 조건이 되어야 하는가! 이런 식의 정책운영은 반드시 타파되어야 한다.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학생은 선발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얼마든지 훌륭한 과학적 재능을 가진 학생이 많으며, 그런 학생을 국가에서 기르는 것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더 좋다.
이기적인 영재를 길러봐야 나중에는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할 뿐, 국가를 위한 애국심은 기대하기 힘들다. 아무리 능력 있는 영재라 해도, 국가에 해가 되는(예를 들어, 핵심기술이나 몰래 팔아먹는) 영재양성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영재교육의 기본과목으로 애국심, 향토애, 민족혼을 심어주어야 한다.
수월성교육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는 진정한 의미의 창의력을 배양하는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공부를 더 잘하도록 하는 교육이다. 전자를 일러 ‘영재교육(英才敎育)’이라 한다면, 후자는 ‘수재교육(秀才敎育)’이라 부른다. 만일 우리가 수재교육형 영재교육을 추구한다면, 그리하여 대학진학에 도움이 되는 교육으로 운영된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하다. 사교육비의 폭발적인 증가는 물론이요, 수월성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부모들로부터의 저항이 엄청나게 될 것이며, 마침내 그런 류의 수월성교육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문을 닫아야 한다.
수월성교육을 받은 학생을 대학에서 받아들이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대학의 자율에 일임할 문제이다.
예를 들어, 2003년도 미국의 하버드대학 지원자는 2만 986명이었는데, 이들 중 재학하던 고등학교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학생이 3100명이었고, SAT I 시험(우리나라의 수능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도 수두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56명만이 합격하고, 나머지 1만8930명은 탈락했다. 이처럼 비슷한 학생들이 몰리는 경쟁에서 어떤 기준으로 합격자가 결정되었을까? 이런 경우, 학업적인 요인보다는 학업 외적인 요인을 통해 합격생을 결정한다. 부연하면, 일차적으로는 학업적 능력으로 배수 정도를 선발한 후, 학생 개개인에 관한 서류심사를 통해 최종합격자를 결정한다. 즉, 현재의 성취수준보다는 앞으로의 성취 가능성을 더 중요시한다.
영재 판별과 선발은 one-shot test로 이뤄져선 안돼-전문적·장기적 관찰을 기초로 이뤄져야 영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또 다른 사교육을 시킬 것이라는 견해는 매우 타당하다. 영재교육을 받을 학생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선수학습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영재성을 판별하여 사교육과는 거의 무관하게 선발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재교육전문가들이 해야 할 역할인 동시에 책무라고 본다. 단순히, 성적이 좋다거나 한 번의 지필검사나 변변치 못한 캠프를 차려놓고 단순·단기·단번 평가나 관찰에 의한 영재 선발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초등학교 전 학년 과정에서 영재선발전문가가 개입되어야 하고, 모든 학년, 모든 선생님의 전 학생 하나하나에 대한 관찰과 기록이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학생기록을 철저히 잘한 교사에게 승진 가산점을 주는 제도도 도입되어야 한다).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이러한 여러 교사 및 전문가들의 장기간에 걸친 관찰과 기록, 그리고 평가 자료가 우선시 되어 영재학생의 선발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영재교육의 내적 조건과 외적 조건을 갖추자
영재교육의 내적 3대 조건이란 영재판별, 영재교육과정, 영재교사양성을 가리킨다. 외적 조건이란 영재교육을 포함한 수월성교육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다.
영재판별은 전문적·장기적인 관찰에 근거해야 함을 언급했다. 영재교육과정은 영재의 특성을 계발하는 프로그램과 영재의 품성을 계발하는 프로그램으로 구분될 수 있다. 특성계발 프로그램이란 창조적 사고력, 도전정신, 논리적 사고력, 탐구력, 협동학습능력, 질문능력, 정보이해능력 등을 배양하는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품성계발 프로그램이란 애국심, 양보심, 자신감, 행복감, 정의감, 도덕성 등을 배양하는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현재의 영재 프로그램은 주로 교과와 관련된 문제해결력 배양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앞서 언급된 제반 특성과 품성계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이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애국심과 같은 품성교육 프로그램을 정규교육과정으로 설치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영재교수(교사)는 전액 국비로 양성되어야 하며, 기존의 초·중등 교사개념을 넘어선 전문적 영재교육 담당교수(교사)를 양성해야 한다. 현재와 같이 기존 초·중·고 교사의 재교육을 통한 영재교사양성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영재교육을 담당할 교사는 기존의 초·중등 교사개념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각 분야의 전문가인 교수, 연구소 연구원, 직업 외교관, 국방 관련 전문가, 일반 과학자 등을 영재교사로 임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사자격증제도에 너무 얽매이는 것은 국가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장기적으로는 각 분야에서 영재교육을 전공자를 교수 급으로 임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농아·맹아·정신지체아 등의 특수교육을 위해 특수교육 전문가가 교사로 임용되듯이, 영재교육도 특수교육임을 이해해야 한다. 과거 중등학교에서 기존 교사를 재교육하여 상담교사로 활용한 경험이 있다. 그러한 프로그램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 영재교육의 선진국에서 영재교육 전문교사를 초빙하여 활용하는 것도 초기 단계에서는 고려해 볼 만하다.
수월성교육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내적 조건을 준비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국민 대다수가 수월성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 대의적으로 판단하도록 캠페인을 벌이는 일은 매우 중요하며, 그런 면에서 언론의 수월성교육에 대한 역할과 책무를 기대한다. 사회적 공감대 형성은 수월성교육에 대한 행·재정적 지원을 원활하게 할 것이다.
수월성교육비는 현 교육부 예산으로 충당하지 말고, 대통령/국무총리 사업비로 확보해야 한다 전교조는 “축복받은 상위 5%를 위한 영재교육보다는 95%를 위한 보편교육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며, 국민혈세 2천억 원을 들여 교육차별 심화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국민혈세 2천 억(2005~2010년 : 6년간 총경비) 원을 들여 상위 5% 교육에 투자하는 것은 교육의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상당히 일리 있는 비판이다. 이 비판은 겸허하게 수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부는 수월성교육을 위한 특별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현재의 교육부예산에서 영재교육비를 떼어내려 하지 말고, 추가 재원을 확보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영재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피해가 가는 것은 안 되기 때문이다. 교육부 예산의 파이를 키우는 일이 우선이다. 또한 앞으로 과학영재, 예술영재, 정보영재, 언어영재 등의 양성을 위해서는 국방부, 문체부, 과기부, 정통부 등의 재정적 지원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종합적·장기적으로는 영재교육을 위한 재원은 대통령 혹은 국무총리 산하의 재원으로 확보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수월성교육은 국가의 제 1정책으로 추진하고, 교육부 사업이 아닌, 대통령사업/국무총리사업으로 승격시켜 예산과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사실상, 2005년부터 2010년까지 6년간 수월성 교육대상자수는 약 112만 명(‘05-’06: 32만 명, ‘07-’08: 40만 명, ‘09-’10: 40만 명)이다. 이들을 위한 총 교육비를 2079억 원으로 잡고 있다. 학생 1인당 영재교육비는 약 18만6000원이다. 직접교육비 1232억 원만을 고려한다면, 학생 1인당 영재교육을 위한 직접경비는 11만 원이다. 이 정도 금액을 갖고 수월성 교육이 과연 가능한가를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