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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성교육은 '버림의 미학' 없는 교육정책

‘수월성교육’이 일선 교육현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자기논리 개발에 앞서 이미 만연된 일선 현장의 과부하와 다운 현상을 최소화·최적화 하는 ?嗤??교육과정’에 대한 연구와 결단과 적용이 시급히 요구된다. 과학뿐 아니라 교육에서 ‘에너지 총량 법칙’은 여전히 유효한 법칙이 아닐 수 없다.

구본준 | 충남 천안성정초 교사


대망의 2005학년도 시작과 더불어 우리 교육의 화두는 ‘수월성교육’인 듯하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지난해 말 현행 평준화제도 하에서 학교교육의 보편성과 수월성을 조화롭게 추구하기 위한 ‘수월성교육 종합대책’을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였던 수월성교육 대상 학생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오래도록 교과서도 교실 수업도 그들을 외면해 왔던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수월성교육의 희소식에도 불구하고 많은 염려들이 앞선다. 과연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수월성교육이 우리나라 전체 교육지도에서 올바르게 좌표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스러움이 앞선다.

수월성교육 성패 여부 논의는 수월성교육 자체 논의만으로 불충분하다. 수월성교육 논의는 우리 전체 교육지도 속에서 다양한 교육 정책·시책들과 원활한 상호 소통 가능성과 협동 가능성을 생각하며 시작해야 한다. 수월성교육의 필요성, 범위, 시기, 교육기관, 주요 운영 내용, 지도교사 양성, 예산 계획 등 자기논리 개발은 수월성교육의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지 결단코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교육정책
그렇다면 수월성교육은 왜 가능하고 왜 불가능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나라 전체 교육지도 속에서 살피지 않고 독자적으로 수월성교육을 논한다면 수월성교육의 성공은 가능하다. 왜 그럴까?

첫째,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최상위권 학생들과 그들의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상위권 학생들에게 학교교육은 분명 문제가 있는 듯하다. 다인수학급에서 교사들의 강의 눈높이는 중간 수준 학생들이다. 이 중간층들을 보듬어 수업해 나아가기도 버거운 게 일선 교육의 현 주소이다.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은 상위권과 최상위권 학생들을 소외시키는 교육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수월성교육 대상자의 존재와 그들의 요구, 이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많은 교사들이 있기에 수월성교육의 성공은 가능할 수 있다.

둘째, 상위 1%의 최상위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재교육은 특히 더 성공한다. 분명히 존재하는 최상위 1%의 어떤 부모가 영재교육 수혜를 마다할 것인가? 게다가 영재학교, 영재교육원 등 기존 학교환경보다 우월한 교육과정과 교육 기자재를 통한 교육이기에 이 수혜집단의 갈채 속에 1% 초상위권 영재교육은 호황을 누릴 것이다.

셋째, 역설적이고 우회적이긴 하지만 ‘수월성교육 종합대책’으로 영재교육은 분명 활성화된다. 1%의 최상위 수월성교육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나머지 5%의 상위 수월성교육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사설학원들을 통한 영재교육이 활성화될 것이다.

수월성교육 성공보다는 실패 가능성 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전체 교육지도 속에서 수월성교육을 살핀다면 수월성교육의 성공은 불가능하다. 왜 그럴까?

수월성교육이 일선 현장에 또하나의 업무 부담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일선 현장교육은 포화용액 상태를 넘어 이미 과포화 용액 상태에 도달해 있다. 오래도록 우리 교육은 버림은 없고 얻음과 추가만으로 일관되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시·도교육청 수장이 바뀌었다. 곧바로 시·도교육청 교육지표와 중점시책 등이 바뀐다. 하부 교육청과 일선 학교도 이러한 변화에 걸맞게 교육과정을 재편한다. 별도의 부록 교육과정이 추가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누구도 이전의 교육과정을 제거하지 못한다. 새로운 수장도 이를 단칼에 단죄하지 못한다. 예컨대, 이전 수장이 인성교육을 강조하였는데 새로운 수장이 인성교육 나쁘니 하지 말라고 말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교육과정은 이렇게 몸집을 부풀려 왔다. 버림 없이 오로지 추가하는 교육과정으로 일관하여 왔다. 구체적 예로서, 수준별 교육, 수행평가, 학습부진아 지도, 통합교육 등의 교육시책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교육정책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연계하여 규모를 축소하고 통합하여 효율성을 높이는 작업들의 부재가 문제인 것이다. 또한 새로운 교육시책을 운용할 수 있는 인적·물리적·운영적 환경의 열악함이 문제인 것이다. 추가의 추가로 일관하는 교육과정의 문제점, 이를 다시 비유로 빗대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 486컴퓨터가 있다. 이 컴퓨터를 통해 학습도 하고 싶고, 게임도 하고 싶고, 통신도 하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고, TV도 보고 싶다. 다 보겠다는 욕심으로 프로그램을 하나씩 설치한다. 하드 용량이 다 찼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또 무리를 한다. 컴퓨터가 다운된다.

지금 일선 현장은 다운되는 486 컴퓨터 모양과 흡사하다. 다시 제7차 수준별교육의 한 시간 수업 상황의 예를 살펴보자. 수준별교육이란 가능한 학생 개개인의 목표 도달 정도(개별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에 대한 알맞은 수준별학습 과제를 부여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제7차 수준별교육을 시도할수록 성취감보다는 좌절감이 앞서게 된다. 왜 그럴까?

여기 서너 개의 학습 내용이 있는 한 시간 수업이 있다. 수준별 정신에 부합하려면 교사는 서너 개의 학습 내용을 30명 이상 학생들이 ‘이해하나, 이해하지 못하나’를 파악해야 한다. 가능할까? 산술적으로 교사는 한 시간에 4(학습 내용)×2(이해함, 이해못함)×30(학생수)= 240가지의 학생 수준을 파악해 내야 한다. 교사가 파악할 변인은 더 있다. 교사는 학생들의 학습태도를 일일이 살펴야 하며, 어떤 학생은 쉽게 또 어떤 학생은 느리게 문제를 해결한 학생의 수준을 어떻게 가를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교사가 파악해야 할 학습 상황은 대개가 확정인이 아니라 변인들이기 때문에 고차원적 사고를 요구한다. 비유하면 교사에게 486이 아닌 팬티엄급의 프로세서 상황을 요구한다.

수준별교육을 추구할수록 교사는 다운된다. 실제로 수준별 교육과정 도입과 함께 일선 초등 교사들의 공통된 인식은 제6차 교육과정 이전보다 학생 수준 파악은 더 안 되고 있음을 느낀다. 가능한 학생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걸맞는 후행 수준별학습을 하자는 제7차 수준별교육 정신과 반대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에 대한 최종 결과보고서인 학생생활기록부를 진술할 때 더 느낀다. 6차에 비해 가르친 것과 시행한 것은 더 많은데 개별 학생 수준 파악이 덜 된다. 그래서 쓸 내용이 없다. 과부하로 인한 다운 현상 때문인 것이다.

산소결핍증에 시달리는 학교 구성원들
‘수준별교육’과 동일한 일들이 ‘학습부진아’, ‘수행평가’, ‘통합교육’ 등의 교육 시책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학습부진아의 경우 해마다 구제되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산술적 조작과 허위 운영 결과물들 투성이다. 수행평가 역시 실적을 보여 달라면 방대한 규모의 실적물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인상주의 평가가 앞서고, 수행평가의 과정과 결과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의심스럽다. 통합교육 역시 선진교육의 교육지표일 수 있지만, 많은 일선 학교 교사들은 그 효용성에 회의적이다. 특수교육 학생들을 맡은 담임으로서 이래도 될까 하는 자괴감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이제 새롭게 출발하는 수월성교육 정책 역시 수준별교육, 학습부진아, 수행평가, 통합교육 등의 교육정책과 동일한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유의할 일이다. 학생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알맞은 수준별학습을 할 수 있는 학교, 학습부진아가 없는 학교, 문제풀이만의 머리 큰 학생들이 아닌 움직이고, 만들고, 조작하고, 실행할 수 있는 수행형 학생들이 있는 학교, 팔다리가 없어도, 지능이 떨어져도 행복하게 놀고 공부할 수 있고 친구와 교류할 수 있는 학교를 꿈꾸는 이는 그 누구보다도 교사들이다. 또한 뛰어난 학습능력과 사고력과 문제 해결력을 갖춘 영재아들에게 알맞은 교육을 누구보다도 교사들이 소망하면서도, 현실 안착이 더딤에 대한 살핌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문제는 과부하이고, 용량 과다 투입이다. 486 용량의 교육환경 속에서 팬티엄급에서 돌아갈 프로그램을 선별 없이 투입한 들 그 운용이 가능하겠는가? 일선 학교는 이미 비대해진 교육과정의 과부하로 신음하고 있다.

우리의 교육은 가르칠 무엇이 없어서 가르치지는 못하는 게 아니다. 다만 적절한 선택과 배제 원리가 적용되지 않은 채 턱까지 차올라 숨 막히는 교육환경을 조성시키는 끊임 없는 교육정책의 펼침이 문제인 것이다. 학교와 교사가 숨 쉴 틈을 주자! 이러한 여유로움으로 가르치고, 해야 할 그 무엇을 차근차근 꼼꼼하게 수행하게 만들자! 선택과 배제의 원리, 버림의 미학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제 교육은 체질을 개선하고 체중을 줄일 때인 것이다.

국정감사 자료 요구 때문에 도교육청 자료가 트럭으로 운송되었다고 한다. 질보다 양, 내용보다는 형식의 소통방식으로 쌍방은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였단다. 이러한 과시적이고, 문서적이고, 결과 중심적인 교육평가가 학생과 학교교육을 ‘교육 없음’으로 몰고 간다. 여유를 갖고 학생 눈을 마주 대할 때, 학습 부진아가 보이고, 영재아도 보이며, 그 수준에 맞는 수준별교육도 가능한 것이다. 밀어붙이기 식으로 얻을 수 있는 일이 없음은 우리 교사들에게는 매우 상식적인 경험적 지식이 아닐 수 없다.
‘수월성교육’의 시행으로 우선 염려되는 점은 영재기관에 맡겨지는 1%의 영재교육이 아니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나머지 4%의 영재교육이다. 과부하에 걸린 일선 학교는 운영 교사의 부재, 운영 교재의 부재, 운영 프로그램의 부재, 운영 여력의 부재로 시작부터 그 추진동력 확보가 쉽지 않음을 주지할 일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는 2003학년도 도지정 영재교육 연구학교 업무를 시행한 바 있다. 1년 동안 최선을 다해 운영하였지만 연구학교가 끝난 뒤 영재교육 강좌는 자동 폐쇄되었다. 영재교육 마인드로 무장한 학교가 이런 상황일진데 지원과 인센티브 없이 영재교육에 역량을 투입할 학교는 현재 없는 듯하다. 또한 1년간 영재교육을 받은 본교 학생들이 시에서 운영하는 영재교육원 입학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전원 탈락하였다. 본교가 지도한 프로그램이 문제인지, 영재교육 선발 방식이 문제인지 검증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사실 하나는 8학군이라 불리는 특정 지역 학교의 학생들이 대다수 선발되었다는 씁쓸한 결과뿐이다. 누군가가 “영재교육 어떻게 할까” 물어온다면 “1%의 영재교육 수혜자가 되려면 경시대회처럼 준비해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버리는 교육과정’ 필요한 때

이러한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수월성교육은 시행될 것이다. 하지만 ‘수월성교육 성공’의 키워드는 ‘버림의 미학’임을 명심할 일이다. 이제는 교육정책의 나열이 아니라 각 정책의 체계화, 소통화, 최적화가 필요할 때이다. 교육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과정은 지난한 여정이며, 따라서 시간과 기간을 필요로 한다. 목표(정책)가 많아지면 여정이 줄고 과정이 축소된다. 반대로 목표가 줄면 여정이 늘고 과정이 충실해진다. 따라서 부득이 추가된 새로운 교육정책 ‘수월성교육’이 일선 교육현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자기논리 개발에 앞서 이미 만연된 일선 현장의 과부하와 다운 현상을 최소화·최적화 하는, ‘버리는 교육과정’에 대한 연구와 결단과 적용이 시급히 요구된다. 과학뿐 아니라 교육에서 ‘에너지 총량 법칙’은 여전히 유효한 법칙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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