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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강 유역에서는 어떤 일이

최고(最古)의 문명을 이룬 곳은 하나같이 하천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기후가 온난하다는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오리엔트 문명권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문명은 제각기 독특한 문명을 형성했지만 모두 치수사업에 큰 공헌을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


본격적인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자 지구마을에는 대충 네 개의 큰 강을 중심으로 최초의 문명이 일어났다. 즉 지혜의 산물이 문명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신석기인들이 이렇게 논과 밭을 갈고 가축을 기르면서 촌락을 형성하고 공동체를 일구며 대략 5000년 전부터 문자기록을 남기기 시작함으로써 역사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청동기 발견은 수확량 증대
최고(最古)의 문명을 이룬 곳은 하나같이 하천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기후가 온난하다는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인류가 이루어낸 최초의 산업, 즉 농경문화에 있어서 절대적이다.

여기에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치수사업과 신소재인 청동의 발견이 바로 그것이며 신석기인들은 땅 위에서 나는 소출에 만족하지 않고 땅을 파헤치고 자연을 이용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하였는데, 당시 그 작업은 노동집약적이어서 씨족에서 부족, 그리고 부족국가로의 사회구조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신석기인들이 석기를 만들기 위해서 돌을 가져다 작업을 하는데 돌이 갈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석기를 망쳐놓는 것이었다. 화가 난 어느 석기인은 그 돌멩이를 불구덩이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불구덩이에서 뭔가 붉은 물이 흘러나오더니 땅 위에서 굳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아무 쓸모 없다며 불구덩이에 던져버린 돌에서 뭔가 흘러나와 굳더니, 돌보다도 훨씬 단단하며 경우에 따라 그 모양을 변형시킬 수 있는 이상한 물질이 생겼다. 바로, 인간이 청동을 발견해 낸 것이다.

하지만 청동으로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맞는 직업의 분화를 가져왔다. 다시 말해서 대장장이라는 인류 최초의 엔지니어 집단이 탄생하였다. 그들은 청동을 다루면서 축적한 노하우를 이용하여 나중에는 철은 물론 여러 가지 광물을 이용할 수 있는 첫 계단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간단한 제품이라도 정교한 석기를 만드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힘이 많이 들었으므로 일상생활에서 쓰는 도구나 무기를 처음부터 청동으로 만들 수 없었다. 따라서 청동기 시대의 유물 가운데 청동제 도구보다 간석기가 많이 발견된 것도 석기가 계속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의 석기는 신석기 시대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욱 정교해지고 종류도 다양해짐으로써 농경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땅을 더욱 깊게, 그리고 넓게 팔 수 있었으므로 자연히 농경지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작업도구의 발달은 수확량의 증대로 이어졌다.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출현
이와 같이 농경이 발달하고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안정된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복잡해졌다. 즉 인간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다. 농업혁명으로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자 곡물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문제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신석기 시대에는 사유재산 개념이 생기고 계층이 분화되자 힘 있는 자가 곡물을 사유화하고 그것을 자기의 곳간에 쌓아두고 분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여나갔지만,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단순한 지도자가 권력을 가진 지배자로 바뀌게 되었으며, 4대 강 유역의 통치자들은 주민들을 고분고분하게 길들일 필요가 있는 데다가 마구잡이로 노동력을 착취할 대상이 절실해졌다.

힘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시기였던 만큼 힘 있는 부족이 약한 부족을 무력으로 흡수통합하면서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어 가는 과정에서 다수의 피지배층, 즉 노예들을 양산하게 되어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이라는 극단화된 사회계급은 나중에 계급투쟁의 불씨를 일으켰으며 피를 먹고 사는 민주주의 쟁취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 불평등’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단순논리가 아닌 사회구조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혁명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두고두고 대물림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하에서 4대 문명권에서 지배계층에 속했던 극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절대 다수의 민중들을 쥐어 짤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병 주고 약주는 식’으로 치수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이번 공사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함이니 불평하지 말고 노역에 나와라!”

당시로서는 치수 관개사업 등이 최대의 현안문제여서 얼마 만큼의 소출을 거둘 수 있느냐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말로 해서는 아무도 자발적으로 공사장에 나서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최고 지배층은 대규모의 공사에 지도 감독자를 내세우는 한편, 노역에 동원된 사람들을 관리하는 중간 지배계층을 세워 놓았다.

다시 말해서 ‘규모가 큰 사업을 지휘하고, 관리해 나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전제권력과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관료구조가 필수적’이었으며 4대 강 유역의 고대사회에는 전제권력과 신권정치가 공통적이었다.

교역 발전으로 성문법 탄생

서양사의 모태가 되는 지중해 동남쪽에 지금으로부터 약 9000년 전(기원전 7000년~5000년 경) 인류 최고의 문명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났다. 그곳은 일찌감치 신석기시대를 졸업하고 금속기를 사용하였으며 같은 오리엔트 문명권이지만 이집트와는 달리, 여러 민족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줄기를 따라 도시를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한 것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특징이라면 ‘바빌론’은 그들이 건설한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오리엔트 세계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지리적 특성이 개방적이었으므로 주민들은 농사를 짓는 일 이외에도 다른 지역과의 교역을 통해서 국제무역을 중개하였으므로 그들의 도시는 자연히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래서 물물교환의 교역형태가 아닌 화폐경제 시대를 다른 문명권에 비해 일찍부터 맞이하였다. 도시간의 교역은 활발한 인적교류를 가져왔는데,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자 사회구조가 복잡해지기 시작하였다. 걸핏하면 이해관계로 다투기 일쑤였다. 특히 다변화된 주변 여러 지역과의 교역은 관련법 제정을 서두르게 함으로써 법제가 발달하여 최초의 성문법이 나왔고 종교적으로는 자연물을 숭배하는 다신교적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더불어 오리엔트의 한 축으로서 그리스 문명을 꽃피우게 한 이집트 문명은 알파벳의 기원이 되는 상형문자를 발명하였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피라미드를 세우고 그들의 영화를 파피루스에 기록하였으며 생명의 불멸을 믿어 미라를 만들었다.

같은 오리엔트 문명권이지만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와 여러 면에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4대 문명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이는 기원 전 3100년 경부터 기원 전 331년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연속성이 이어졌기 때문이며 메소포타미아의 흥망사와 인더스 문명의 분열사, 그리고 중국의 왕조교체 등을 비교해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일강의 지리적 특성이 외부의 범접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일강의 혜택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구약성서에 있다. 즉 셈어계 유목민에 속하는 헤브라이 인들이 전 오리엔트 지역을 강타한 대기근을 피해서 이집트로 들어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잘 정비된 계획도시로 유명한 인더스 문명은 서북방에서 들어온 아리아인에게 파괴되고 말았다. 아직도 해독되지 못한 문자를 남기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선주민이 과연 누구였는지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있지만 새롭게 인더스의 주인이 된 아리아인은 계속해서 인도에 고대 문명을 전개해 나가면서 힌두교의 뿌리인 브라만교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 갔다.

인더스 문명이 다른 문명권에 비해서 특이한 점은 까마득한 고대의 사회제도와 종교가 오늘날까지 인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달리 앞에서 이야기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유물과 유적으로만 존재할 뿐, 종교나 사회제도는 모두 이슬람화가 되고 말았으며 중국의 황하 문명도 고대와 현대의 연결선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인도 대륙은 여전히 브라만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힌두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종교로 자리잡고 있으며 아리아인들이 선주민을 정복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만든 신분과 계층분화가 지금도 인도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카스트 제도로 남아 있다.

인도의 국토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구 소련을 제외한 전 유럽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며 그 곳에는 유럽 인구의 거의 두 배인 9억 수천만 명이 살고 있다. 더욱이 인종적으로는 네 가지 계통이며 언어는 수백 가지나 된다. 다시 말해서 인도는 유럽과 같은 작은 세계를 이루고 있으며 유럽이 크리스트교 문화권을 형성하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이슬람 문화권을 이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는 오늘날에도 인더스 문명과 브라만교, 그리고 카스트 제도라는 힌두 문화권을 이루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뿌리 깊은 힌두 문화권이 싫어 영국에서 인도가 독립할 때 이슬람 교도들이 파키스탄으로 따로 독립하여 나왔지만 말이다.

동북아시아에도 기원전 5000년에서 4000년경부터 중국 최초의 농경문명이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일어나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신화로 시작되는 중국의 역사가 이때부터 열리게 되었으며 치수사업은 역대 중국 왕조의 현안 사업이었다.

중국의 건국신화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으로 받들고 있는 황제(黃帝) 이전에 천황씨(天皇氏)·지황씨(地皇氏)·인황씨(人皇氏) 또는 복희씨(伏犧氏)·신농씨(神農氏)·수인씨(燧人氏)라는 삼황(三皇)이 있었는데, 이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적인 존재였고 각기 역할을 분담하여 중국의 문명적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그들의 조상으로 황제(黃帝)를 받들고 있다. 황제는 동이족(東夷族)과 싸워 중원(황하의 중류)의 비옥한 평원을 정복하여 중국 최초의 농경사회를 열었으며 문자와 역법, 화폐와 수레 등을 발명·보급한 당대의 영웅이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느 개인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지배집단 전체가 황제라는 특정인물로 묘사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렇게 당시의 중국인들은 소수 지배집단의 지도로 황하강을 수리(水利)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면서 문명을 일구어 나갔다.

아무튼 황제(黃帝)의 뒤를 이어 소호→전욱→ 제곡→요→ 순으로 이어지는 다섯 명의 임금이 중국을 다스렸으며 이를 오제(五帝)라 한다. 사기(史記)에서는 소호를 빼고 그 자리에 황제(黃帝)를 넣기도 하지만 학자들은 삼황을 신화로 보는 데에 일치하면서도 오제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즉 오제를 실존인물로 보는 사람과 단지 신화적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생각했던 공자가 ‘요·순’으로 대표되는 선양의 미덕을 높이 평가했지만 요(堯) 임금이 혈통에 상관 없이 덕망이 높았던 순(舜) 임금을 발탁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순 임금 역시 우(禹) 임금에게 왕위를 넘겼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세습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왕권이 약했다는 점 이외에 그들 모두 치수사업에 큰 공헌을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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