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6세기경 동양에서는 은나라가 갑골문자를 발명하였으며,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는 왕권 수호를 위해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한편 기원전 12세기경 서양의 메소포타미아 주변은 문명의 교차로였기 때문에 흥망을 거듭하며 잦은 구조조정을 거치게 된다. 고대의 소아시아 국가들이 눈부신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페니키아 인에 의해 알파벳이 발명되고 헤브라이 인의 구약성서는 후세에 종교적·문화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선 동양을 살펴보자. 고대 4대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그러하듯, 치수사업은 공통적인 중요 과제였다. 황하 문명의 경우, 치수사업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공로로 순 임금으로부터 임금 자리를 물려받은 우 임금에 이르러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를 ‘하(夏)나라’라 부른다.
유물로 실증된 중국 최초의 국가, 은(殷)나라 공자의 ≪시경(詩經)≫에 나오는 하나라는 기록상으로만 존재하지만 왕권이 강화되자 비로소 왕위세습이 이루어졌다. 기원전 1500년경에 이르러 제17대 걸왕(桀王)은 말희에게 흠뻑 빠져 신하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위하여’를 외쳐댔다. 군주와 신하가 똑같으니 나라가 어찌 되었겠는가!
하나라는 결국 그들과 앙숙이었던 상족(商族)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은왕조(殷王朝)’의 시작이다. 은나라는 상족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므로 ‘상(商)나라’라 일컬어지며, 470여 년을 지속해 온 최초의 고대국가라 하더라도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폭군 걸왕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 하나라와 은나라의 성격상의 차이는 하나라가 기록상으로 알려진 최초의 고대국가라면, 은나라는 유물로 실증되는 중국 최초의 국가라는 점에 있다.
470여 년의 하나라 사직을 무너뜨리고 혁명적인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한 은나라는 처음부터 국가 건설에 대한 의욕이 대단하였다. 이러한 의욕이 은나라 시대의 유적과 유물의 발굴로 이어져 국가적 존재가 여러 가지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사실로 입증되었지만 말이다.
기원전 16세기경에 시작된 은왕조는 농업과 군사문제 등 나라의 중대사를 모두 신의 뜻을 묻고 난 다음에 왕이 결정하는 이른바 신권정치 시대였으며 점을 칠 때에 사용된 것이 바로 ‘갑골문자’였다. 갑골문자는 중국 최고의 상형문자이며 한자(漢字)의 조상에 해당한다.
이러한 갑골문을 통해서 은나라의 국세를 짐작할 수 있는데, 당시 산동 반도에 자리잡고 있었던 강씨족(羌氏族) 포로 300여 명을 한꺼번에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그 당시에는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흔했다).
앞에서 하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다만 기록에 의존할 뿐 물증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저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은나라의 경우는 하나라와는 달리 유적들의 발굴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갑골문자의 탄생과 봉건제도의 시작 1899년부터 지금의 중국 하남성 안양현 소둔(小屯)의 발굴과, 여기서 출토된 갑골문자 해독에 의해서 이것이 바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은나라 수도 은허(殷墟)의 유적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은나라는 청동기 시대였으나 귀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감히 만져볼 수도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다시 말해서 일반 농민들은 아직 석기시대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석기를 이용한 농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투입되는 노동집약적 산업일 수밖에 없었으며, 생산성 향상이란 아예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은나라가 망해 가는 과정도 하나라의 경우와 똑같았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달기에게 흠뻑 빠져 나랏일을 멀리하고 폭정을 일삼았으며, 주지육림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사기(史記)≫와 ≪은기(殷記)≫에서 말하는 주지육림이란, 문자 그대로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과 같다.’는 군주들의 호화로운 주연을 그리 표현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희에게 흠뻑 빠져 주지육림의 설화를 남긴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은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이러한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부덕한 금상(今上)을 폐할 때 내세우는 명분으로 삼았다.
주왕이 달기를 끌어안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동안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참담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즉, 은나라의 말기적 현상을 간과하지 않았던 서쪽의 주족(周族)이 들고 일어나 기원전 10세기경에 은왕조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때, 주족이 은나라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낚시꾼의 대명사가 된 강태공이 발탁되었다.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呂尙)이라는 사람이 주족의 문왕의 눈에 들었고, 문왕은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왕을 격파한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여상에게 ‘선왕 태공(太公) 이래로 기다리고 있었던 현자’라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는 호칭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 정복하지 않은 은왕조를 두고 문왕이 병사하자, 그의 아들 무왕이 왕위에 올라 부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전쟁으로 국력이 극도로 피폐해진 은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기원전 1121년 ‘주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1121년 주족의 주나라는 은나라의 영토, 즉 황하 유역의 알짜배기 땅을 차지했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막상 은나라의 땅에 왕조를 세우고 정복자로 군림했지만 망해버린 은나라 귀족들과 백성들은 ‘그래, 어디 한번 잘 해봐라.’는 식이었다. 다시 말해서 한쪽 변두리를 통치할 때와는 전혀 정치능력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통치할 땅은 넓어졌지, 인적 자원은 부족하지, 게다가 중원에는 여러 씨족들이 언제 도발해 올 지 모르는 데다가 망한 은나라의 귀족세력들이 언제 외부와 연결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일으킬 지 몰랐기 때문에, 주나라 왕실은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는 일종의 회유책, 다시 말해서 그들과의 제휴를 맺기로 하였다.
우선 주나라의 무왕은 은의 귀족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은의 왕자인 녹부(祿父)에게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였고 제사도 허용하였으며, 은 왕조 시대의 관례를 그대로 인정하였다.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도 못했으니 대리만족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호의를 베풀면 만만하게 보고 기어오를 우려가 있으므로 무왕은 자기 동생을 녹부의 감시자로 삼아 영지에 머물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주나라 봉건제도의 시작이다.
정복한 은나라의 땅을 직접 통치하지 못하고 왕자를 내세워 위임 통치케 하는 등의 여러 조치들은 비록 무력으로는 은을 멸망시켰지만, 문화적으로는 갑골문을 창시한 은에게 흡수되는 상황을 말해주는 대목이며 정치적으로는 은나라의 신권정치를 대신한 봉건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일단 제후들에게 봉토를 주어 평상시에는 제후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자치권을 주는 대신, 제후들은 정기적으로 주의 왕실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자기 지역의 특산물을 바쳤다. 이것이 바로 조공의 기원이며,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주변국의 조공을 중요한 무역수단(외교수단)으로 삼았다.
서양 문명의 교차로, 메소포타미아 주변국의 파란만장한 삶 한편, 메소포타미아 주변에는 고대의 소아시아 국가들이 눈부신 활동을 하였는데, 페니키아 인의 활약으로 알파벳이 발명되고 헤브라이 인의 구약성서는 후세에 종교적·문화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는 모두 기원전 12세기경부터 동 지중해에서 활약한 해상 교역민들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이 지역처럼 잦은 구조조정을 거친 곳도 없다. 바로 문명의 교차로였기 때문에 한 많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맞물려 긍정적인 의미로는 역사발전, 부정적인 의미로는 지역주민의 편안한 삶을 보장할 수 없었다.
지정학적 중요지역, 또는 문명의 교차로라 불리는 땅은 예로부터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내지 않은 나라가 없다. 우리나라도 그 가운데 하나지만 말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살펴보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의 동남부를 중심으로 민족과 문명이 성장과 소멸을 거듭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 소아시아에서는 여러 나라들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고대사에 중요한 역할과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나라 또는 민족으로는 해상활동과 무역을 통해서 세력을 떨친 페니키아, 유일신 야훼를 숭배함으로써 서구 크리스트 교 문명에 공헌한 헤브라이 인,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마지막으로 통일한 페르시아, 그리스 고대문명의 기틀을 놓은 에게 문명을 들 수 있다.
현재 시리아·레바논·팔레스타인 지역은 바다와 사막에 끼어 있어 커다란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지만, 동 지중해의 입구이면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통로이며 먼 옛날부터 해륙무역의 요지였기 때문에,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민족사의 흥망도 그만큼 변화무쌍했다. 그만큼 이 지역은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침략 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 지역은 각각 동진과 서진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가야 할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원래 이 지역에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가나안’이라는 민족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13세기 말부터 계통이 불명확한 해양민족이 침입함으로써 당시에 이곳에 진출하여 있었던 이집트와 히타이트 세력이 쇠퇴하고, 그 뒤를 이어 페니키아 인·아람 인·헤브라이 인으로 일컬어지는 셈족 계통의 민족들이 활발한 교역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 세 민족은 모두 문화사적으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중요한 지역에서 살았다는 죄 아닌 죄로 한 많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알파벳을 발명한 페니키아 인 서양 세계에 알파벳을 전해준 페니키아 인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레바논 산맥 서쪽에 정착하여 시돈·티루스·베이루트 등을 중심으로 나라를 건설하여 지중해의 무역을 독점하고 많은 식민도시를 건설한 셈어계의 해양민족이었다. 지중해는 물론, 멀리 흑해까지 진출하여 엄청난 재물과 부를 끌어 모아 크게 번성하였으며 그들의 해상활동은 나중에 그리스인과 카르타고 인에게 견제를 받을 때까지 왕성하였다.
페니키아 인들이 건설한 시돈은 현재 레바논의 사이다(Saida)인데, 그들은 쌓아둔 재물로 온갖 사치와 퇴폐적이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성서에서는 시돈을 ‘부와 악덕의 도시’라 하여 여기서 ‘시도니즘(Sidonism)’이라는 말이 나왔다.
페니키아 문자는 이집트·바빌로니아 및 크레타의 문자를 기초로 한 표음문자이며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발전하는 동안에 오늘날의 알파벳으로 만들어졌다. 앞에서 이야기한 가나안 사람들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자기들의 셈어 발음을 끼워 맞추어 ‘시나이 문자’라고 하는 표음문자를 만들어 냈다. 가나안 사람들이 만든 시나이 문자를 배운 페니키아 인들은 그것을 페니키아 문자로 사용하였고, 해상활동을 통해서 다시 그들의 문자를 그리스에 전함으로써 그리스 문자가 생겨났고, 마지막으로 로마에 전해져 로마 문자로 정립되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알파벳’이 생겨난 것이다. 소위 최초의 서양인이라 일컬어지는 그리스의 전설에 의하면 테바이(테베)의 창업자 카드모스 왕이 처음으로 페니키아 문자를 도입하여 보이오티아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중계무역의 독점자, 아람인 가나안 사람들이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시나이문자를 만들어 냈다면, 아람인들은 ‘아람 문자’를 만들어 내었다. 기원전 1300년경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시리아로 이동하여 많은 도시국가를 세운 아람인들은 말과 글이 서로 맞지 않아 아람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람인들은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하여 내륙의 중계무역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쓰는 아람어가 상업상의 국제 공용어로 확산되었고, 나중에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나중에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 어가 공용어가 되다시피 하였다.
기원전 10세기로 추정되는 비문이 실제로 쓰였던 최고(最古)의 자료이며 나중에 헤브라이 문자와 아라비아 문자 등 서 아시아 여러 지방의 문자 성립의 조상이 되었다. 아람 문자는 멀리 몽골과 티베트·위구르·만주에도 영향을 끼쳤지만 사실은 가나안 사람들이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자신들의 발음을 끼워 맞춘 시나이 문자에서 파생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페니키아 인들은 해상무역을 통해서, 아람인들은 내륙의 중계무역으로 동서양에 그들의 기록매체(문자)를 전파했으며, 중국의 갑골문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기록매체로서 한자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