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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통일과정과 종교의 업그레이드

기원전 7세기 중엽 아시리아 인에 의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 세계가 최초로 통일된다. 그러나 아시리아 인의 무자비한 핍박에 무장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612년에 오리엔트는 네 개의 나라로 분열된다. 그 후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 인이 재통일을 하나, 수많은 전투 끝에 멸망하여 역사의 축은 서방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 역경의 과정 속에서도 헤브라이 인은 신앙 차원에 머물러 있던 것을 종교로 승화시킨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M/


아시리아 인, 오리엔트 최초 통일
내륙 교역의 중심지로서 변화무쌍한 메소포타미아 지역, 그리고 아라비아를 가로질러 조용하게 딴 살림을 차리고 있는 이집트에 이르는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아시리아 인이었다. 그들은 소아시아에서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면서 상대방이 강하거나 힘이 비슷하면 정상적인 교역을 하지만 만약에 세력이 약한 도시를 만나면 힘으로 정복하는 셈어계의 유목민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소아시아 지역은 민족수 만큼이나 생각하는 것도 다른 모자이크 형 지역이어서 아시리아 인들은 교역과 정복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과정에서 막강한 전투력과 우수한 철제 무기와 전차, 그리고 기병 등을 확보하여 기원전 7세기 중엽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 세계를 최초로 통일하였다. 그런데 아시리아가 정복한 그들의 영토 내에 서로 다른 이질적 민족을 떠안았지만, 무조건 힘으로만 억누르는 강권통치로 피정복민의 목숨을 건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 유일하게 일신교를 믿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종교적으로 혹독한 탄압으로 신음하였고, 살마네셀 왕 때 많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포로로 끌려가 수많은 고초를 당하였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11세기에 다윗 왕이 대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영화를 누렸으나 솔로몬 왕이 죽자 나라는 북부의 이스라엘과 남부의 유다 왕국으로 나뉘어져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마침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민족들이 들고일어나 무자비한 정복자 아시리아에 대한 무장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 통일제국을 무너뜨린다. 이는 피지배 민족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든 결과였다.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신바빌로니아
기세등등했던 아시리아가 붕괴되자 오리엔트는 네 나라로 분열되었다. 통일 이전에는 여러 민족과 도시가 난립하였으나, 이제는 크게 네 나라로 구조조정이 되었다. 즉, 이집트의 신왕국, 소아시아 지방의 리디아, 메소포타미아의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였는데, 신바빌로니아는 칼데아라 부르기도 한다. 이때 남부의 유다 왕국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후에 한동안 아시리아에 예속되어 왕국 자체는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이제는 그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

신바빌로니아의 네브가드네사르 2세가 기원전 586년 오갈 데가 없는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대규모의 유대인들을 그들의 수도 바빌론으로 끌고 갔는데 이를 ‘바빌론의 유수’라 한다. 그는 부왕이 추진하였던 거대한 태양신의 성탑을 세웠는데 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재건이었으며 19세기에 독일의 탐험대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신앙을 종교로 승화시킨 헤브라이 인
그럼 아시리아에 정복당한 북부 이스라엘, 그리고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한 남부 유다 왕국의 백성들, 즉 지금의 유대 인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그들이 이룩한 종교가 서양문화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되니 말이다. 고대에는 유대 인을 헤브라이 인이라 불렀다. 셈어계 유목민에 속하는 그들은 기원전 1850년경 아브라함의 영도 하에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섰는데 그들은 주변 각지를 전전하다가 심한 기근을 피하여 이집트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들어갈 때는 이집트 조정에서 봉직한 요셉 덕분에 환영을 받았지만, 나올 때는 노예의 신분으로 갖은 박해를 받다가 모세의 영도로 목숨을 건 민족의 대탈출이 이루어졌다. 이때가 기원전 1250년 무렵이었다. 모세의 뒤를 여호수아가 이어받아 기원전 1220~1200년 사이에 야훼가 약속한 땅 ‘가나안’을 정복하였다고 하는데, 여호수아가 죽은 뒤인 기원전 1200~1025년의 시대적 상황은 고대국가 형성 이전의 부족동맹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다른 민족과 같이 부족 동맹체에서 발전하여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을 밟게 되는데, 이때가 기원전 1025~586년까지의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사이다. 원래 부족동맹 체제였던 이스라엘이 서부 해안의 블레셋 족과 동부 요르단 산악지대의 암몬 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원함에 따라, 이웃나라의 왕정체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그곳을 통합왕국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삼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였다.

부왕(다윗)이 죽자 왕위를 계승한 솔로몬은 기원전 970~933년까지 통합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렸지만 여러 가지 실정으로 인심을 잃어 그가 죽자 통일왕국은 남·북, 두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북 왕국은 ‘이스라엘’이란 국호로 기원전 933~721년까지 유다와 베냐민의 일부 지파를 제외한 10지파가 모인 왕국을 이루고 후에 ‘사마리아’가 수도가 되었으며, 정통 다윗 왕가를 계승한 남 왕국 유다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다윗의 손자이며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함으로부터 약 346년간 20명의 왕들이 통치하게 된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완충지대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리엔트 세계의 패권다툼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말한 참담했던 바빌론의 유수,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는 한편, 신앙 차원에 머물러 있던 것을 종교로 업그레이드 하기 시작하면서 유대교 경전의 뿌리가 되는 모세 오경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모세 오경이란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를 가리키며 천지창조로부터 이집트 탈출과 40년간의 방랑생활 가운데 야훼의 백성이 되기 위한 모든 규범과 율법이 기록되었으며, 모세 이후의 여러 예언자의 예언서와 역사서·교훈서가 합쳐져 구약성서를 구성하고 있다.

즉,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의 모체가 되었으며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에게도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쉽게 말해서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에 신약성서를 추가하여 성전으로 삼은 종교가 그리스도교,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에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편집한 ‘코란’을 성전으로 삼은 종교가 이슬람교이다. 이렇게 성립된 유대교는 유대인의 생활을 근본부터 규정하고 있는 독특한 사고방식이고 인생관 그 자체이며 신앙생활의 중심은 모세를 통해서 유대 인에게 계시된 율법(토라)이다.

유대 인들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오래된 율법을 각 시대적 상황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해석과 주석을 달아 왔는데 이것이 ‘미슈나(반복)’이며, 다시 미슈나의 해석을 정리한 것이 ‘게마라(보완)’이고, 이 두 가지(미슈나+게마라)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탈무드(연구)’인데, 보통 유대인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탈무드이다.

탈무드 정신으로 이스라엘 공화국 재건
헤브라이 판 명심보감이 바로 탈무드이며 세계인들은 유대인을 일컬어 ‘가장 교육적인 민족’이라 하였다. 때문에 3000여 년의 핍박과 2000년의 무국적 민족, 심지어는 아돌프 히틀러의 민족말살정책(홀로코스트)의 대상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유대인의 비극은 이미 서기 70년대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AD 79~81)가 로마 황제에 즉위하기 전에 시작되었다. 티투스는 로마의 통치에 거세게 반발하는 유대 민족주의자들과 그의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말살작전을 감행하였고 그 이후 유대 민족은 디아스포라, 즉 나라 없는 유랑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유수시대’를 거치고 헬레니즘이라는 이민족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개한 시오니즘 운동을 근세기에 이르러서는 제2의 건국운동으로 전개하여, 결국 서기 1948년 옛 이스라엘의 영광을 구현하기 위해 다윗의 별을 그들의 국기에 그려 넣고 이스라엘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무려 2000여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유대인들은 멸시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그들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종교를 지켜왔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주변을 포위한 절대 열세의 아랍 민족들과의 수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르면서도 꿋꿋하게 영토를 지켜내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거듭되자 오히려 가자·골란 지역 일대로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유대인의 저력은 그들의 교육, 다시 말해서 ‘탈무드’에 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탈무드를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을 거듭하면서 다음 세대에 물려줌으로써 교육과 행동규범의 지침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마 유대교 랍비들이 경전의 시대적 해석을 게을리 했더라면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해 그들은 수용소 가스실에서 모세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절규했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오리엔트 재통일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인도·이란어족에 속하는 민족이 페르시아만(걸프만) 동부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메디아(Media)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메디아는 기원전 8세기 말에 이란 고원의 북서부에 메디아 인들이 세운 왕국이며, 신바빌로니아와 함께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이란 전토에 걸친 땅을 차지했던 나라다. 기원전 500년경 키로스의 지도하에 반란이 일어나 메디아를 멸망시키고, 새로 나라를 건국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페르시아(Persia)이다.

사실 페르시아 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페르시아라고 하지 않았다. ‘페르시아’란 이름은 고대 그리스 인들이 이란의 서부지역을 ‘페르시스(Persis)’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즉 ‘페르시아’란 말이 그리스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라 한다면, ‘이란’이란 그들 스스로 이름을 붙인 ‘고귀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리안’에서 유래한다. 페르시아는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525년에는 제26 왕조의 이집트도 멸망시켜 오리엔트를 통일한 최대 최후의 통일국가였다. 페르시아는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했던 아시리아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복지의 관습을 존중하고 자치를 인정하는 관대한 정책을 폈다. 덕분에 바빌론에서 집단적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특히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BC 522~486)의 치세에 화폐의 주조와 교통망의 정비로 광범위한 교역과 문화교류가 이루어지는 한편, 수사에서 사르데스에 이르는 ‘왕의 길’을 닦고 새 도읍지로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지만, 나중에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와의 ‘이소스-가우가메라 전투’에서 패하여 멸망함으로써 역사의 축은 오리엔트에서 서방세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
고대 페르시아 인들의 종교에 대한 지식은 주로 ‘젠드 아베스타’, 즉 페르시아 인의 경전으로부터 얻은 것이며 창시자인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는 탁월한 종교 개혁가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조로아스터교의 교의가 키로스 시대(BC 550년)부터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정복까지 서아시아 지방의 주된 종교가 되었음은 확실하다. 마케도니아 왕정 치하에서 외국의 여러 사상이 들어왔기 때문에 조로아스터의 교의도 많이 변질되고 퇴색하였지만 나중에는 다시 교세를 회복하였다.

조로아스터교 역시 원래 하나의 창조주를 가르치고 있지만 다른 두 신을 창조하고 자신의 본성을 그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이원론적 교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우주의 역사는 ‘창조·혼합·분리’라는 3단계로 구분되는데, 현재의 세계는 ‘혼합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선신과 악신의 싸움이 천국과 지옥의 중간인 이 우주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대의 조로아스터교는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바빌론의 유수시대에 유대교에도 많은 영향을 줌으로써 신학적인 발전과 조직화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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