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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빛과 정치적인 고대 그리스 사람들

동서양은 기록매체의 발명으로 본격적인 문명창조를 위한 발빠른 행보를 하게 되는데, 옛 그리스인들의 표현대로 빛은 동방에서 전해졌다(Lux ex Orient). 다시 말해서 소아시아에서 페니키아 문자(알파벳)와 함께 고대 오리엔트의 문명이 그리스에 전달되어 에게 문명과 고대 그리스 문명을 일으킨 것이다.

박경민 | 역사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



폴리스의 형성과 발전
에게 문명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크레타 섬이 중심이 된 BC 3000년에서 BC 1400년까지의 크레타 문명 또는 미노스 문명이고, 후기는 BC 1400년부터 BC 1200년까지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와 티린스 혹은 소아시아 트로이 중심의 미케네 문명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을 크게 이오니아인·아카이아인·도리아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후기 에게 문명은 미케네 문명으로 그 맥을 가까스로 이었으나 이미 BC 12세기 초에 이동한 이오니아인·아카이아 인과 달리 가장 늦게 남하한 도리아인들이 펠로폰네소스를 정복하면서 지중해로 진출하더니 먼저 남하한 그리스인들의 문명을 차례차례 파괴하면서 에게 해의 섬들을 차지하였다. 즉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발칸반도 일대에 흩어진 그리스인들은 BC 8세기부터 지리적 조건, 특히 교통의 요지를 골라 집단거주(시노이키스모스)를 시작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생겨난 도시를 '폴리스'라 하였다. 폴리스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서 아크로폴리스(언덕)와 아고라(광장)가 설치되었으며 주위에는 성벽과 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라고 하는 비교적 많은 소규모 도시국가를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형성하면서 고도의 창의성을 발휘하여 서양 최초의 문화를 창조하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대 동방(오리엔트)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문화를 가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창의성이 강한 그리스인들은 인간과 사회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사고하여 예술과 철학·역사·정치 등 각 분야에 활용함으로써 역동적인 문명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그리스인들의 정치·경제·사회 생활의 기본적인 요소이며 배타적 단위였다. 폴리스에는 어김없이 한 복판의 산언덕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어 유사시에는 일종의 피난처(대피소) 구실을 하였으며 성안에는 그리스인들이, 성 밖에는 외지인들이 거주하였는데 그리스 본토에만 100여 개가 넘었고 식민지의 그것까지 합치면 1000개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폴리스는 상호간 정치적 지배관계가 전혀 없는 자주 독립적 사회로 전체적인 정치적 통일성이 없었으나 같은 언어와 종교(올림포스 신앙), 그리고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념적 유대감으로 올림픽 경기 등을 통해서 그들의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그리스인들의 모험심
처음에는 귀족정치가 행하여졌지만 나중에 일반시민(자작농민)의 사회적·경제적 대두에 의한 발언권이 세어지면서 민주정치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크레타가 에게 해를 중심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이래, 아테네가 전면에 등장한 BC 8∼7세기 무렵부터 그리스인들은 식민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식민지 개발에 열을 올린 이유는 소수 귀족들의 토지독점으로 영세농민이 증가하였다는 점인데, 이 말은 귀족들이 마음을 고쳐 토지의 독점을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보는 편이 빠르다는 판단에서이다.

더욱이 폴리스 자체의 성장과 발전은 인구의 집중과 증가를 가져왔으며 따라서 적절한 인구의 이동이 불가피했으며 도시의 번창과 시장확대는 각 폴리스에서 생산된 상품을 내다 팔 대상 지역으로서 식민지가 필요했고, 정치적 불만세력이 식민지를 통해서 탈출구를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만 그리스인 특유의 모험심, 다시 말해서 배를 타고 나가면 바다 저편에 뭔가 있다는 호기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원정대 이야기'가 비록 허구적인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최초의 해외원정이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인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많은 식민지를 건설한 것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황금의 양가죽'을 바다로 진출하여 획득한 일종의 전리품이라 전제한다면 당시 의외의 성과가 황금의 양가죽이라고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식민지는 지중해와 흑해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는데, BC 600년대에는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그리스 식민지가 넓게 퍼짐으로써 그리스의 경쟁상대로는 오직 페니키아 인이 세운 식민시(植民市) 카르타고 밖에 없었다.


그리스의 정치적 변화
소위 민주정치의 원조는 그리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민주정치가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란 가능하다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흔들고 싶어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으면 독재정치를 펼 수 없다.

소위 민주정치의 원조라고 하는 그리스에도 귀족·평민·노예의 구별이 있었으며 기원전 8세기경부터 왕정이 행하여졌다. 그리스 역사에서는 이 시기(BC 1000∼800년)를 '왕정시대'라 하는데 소위 '호메로스 시대'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당시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그리스에서는 오리엔트, 또는 중국의 황하지역과 같은 치수사업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왕정시대라 하더라도 전제적 군주제는 아니었다. 치수사업을 위한 대규모 노동력과 이를 추진하기 위한 강력한 군주의 통치력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다. 농업과 목축이 주된 산업이었으며 BC 900년경에는 동방과의 교역을 통해 페니키아의 문자(알파벳)가 전해졌다.

기원전 7세기까지는 귀족들이 군사와 국방의 중심을 떠맡는 집정관(아르콘)으로서 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과두정시대(寡頭政時代 : BC 800∼550년)라고 한다. 그 이유는 전쟁에 있어서 기병의 역할이 종전보다 강화되었다는 점과 귀족 가운데 일부는 전쟁에서의 전리품과 식민으로 재물을 끌어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식민시의 건설과 교역, 산업분야의 발전이 이루어짐으로써 귀족의 발언권이 강화된 것이다.

다음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은 독재자가 국정을 좌우하는 참주정치시대(僭主政治時代 : BC 660∼500년)가 이어졌는데, 그 배경으로 부유한 중산층의 대두와 그로 인한 계급투쟁, 기병을 대신한 중무장 보병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참주에는 물론 폭군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18세기의 계몽군주와 같았으며 대부분 귀족출신이었고 인심을 얻어 자유시민(평민)과 결탁하여 귀족세력을 억압했기에 참주=독재자=폭군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당했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최초의 참주는 BC 6세기 후반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 BC ?∼527)였다. 그는 아테네와 미묘한 관계에 있었던 메가라와의 전쟁에서 명성을 얻어 민중의 지지 속에 BC 560년에 참주가 되었다. 민중을 배경으로 소수 귀족을 억누르니 정권을 빼앗긴 귀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합법적이며 독재였던 것이다.

BC 7세기 오리엔트의 첫 통일을 이루었던 아시리아가 붕괴하고 네 나라로 나뉘어졌는데, 그 가운데에서 리디아에서 화폐가 발명되자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도 화폐를 주조하여 부를 이룬 평민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때 많은 도시국가들이 민주정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를 민주정시대(民主政時代 : BC 500년 이후)라 한다.

재산을 모은 평민들이 자신의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중무장 보병부대를 편성하자 그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되었고 사회 기득권 층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던 아테네가 가장 전형적이었지만 이러한 그리스의 정치적 발전과정은 주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아티카 지방과 트로이젠을 비롯한 폴리스 집단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와 스파르타 계열의 폴리스는 이러한 정치적 변화과정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군사 독재주의로 일관하였다.


민주정치 속의 불평등
BC 508년, 민주정치의 봄이 찾아 왔다. 아테네의 민회(民會)가 입법·사법·행정상 최고기관이 됨으로써 민주정치의 서막이 올라 페리클레스(Pericles : BC 461∼429년)시대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민회는 대의제(代議制)가 아니라, 성년 남자 자유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직접 민주정치였다. 스파르타에 비하면 개방적이며 민주적이었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치도 노예의 피땀 위에 이루어졌고 여성의 정치참여가 배제되어 있었다.

고대 모계사회에서 가부장적 부계사회로 넘어온 데다가 정치적 중심이 왕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도시국가(폴리스)체제가 되자,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주신(主神) 제우스를 폴리스의 수호신이며 각 가정에서는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도의 수호신으로 설정하여 이를 파괴하려는 자는 어느 누구도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남성 우월적 사회에서 당시의 자유 남자시민은 노동과 집안 일에 구애받음 없이 정치에 참여하고 문화활동을 즐길 수 있었으며 오직 사회에 책임을 지는 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아테네조차 남·녀의 성차별은 심각하여 아버지들이 아이의 양육여부를 결정하였다. 만약 '이 아이는 키우지 않겠다'고 하면 아이를 폐기처분하였다. 다행히(?) 선택된 자녀들은 전적으로 어머니가 맡았는데 남자아이는 7세까지, 여자아이는 결혼할 때까지였다. 일곱 살이 된 사내아이는 어머니의 손에서 떠나 교사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는데, 남자아이의 교육 중점은 '건강한 신체, 건전한 정신'이었지만 여자아이는 결혼할 때까지 '요조숙녀(窈窕淑女) 되기'에 모아졌다.

이러한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다른 폴리스에도 확산되어 페르시아 전쟁 때에는 자기 돈으로 무기를 살 수 없었던 무산계급 시민들은 몸으로 때우는 전투에 참가하여 자발적인 힘을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그들은 전투함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역할을 하였고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돈 없다고 우리를 무시하면 다시는 힘든 중노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발언권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민주사회는 의무가 있는 곳에 권리도 따른다는 점인데, 전제적인 독재국가에서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음으로써 자발적인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다. 우선 바로 눈앞에 있는 채찍만을 두려워할 뿐이다. 아무튼 남자로서 군대가고 전쟁에 참전해야 비로소 진정한 민주시민이라는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었다.


거꾸로 가는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맨 마지막으로 남하한 도리아 인들로 구성된 도시국가였으며 그들이 폴리스를 건설하기 전인 BC 1200년경에 미케네 문명(후기 에게 문명)을 멸망시키기도 하였다. 즉 도리아 일파의 정복에 의해서 탄생한 폴리스가 스파르타였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의 일반적 정치적 발전과정과는 전혀 별개의 소수 독재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스파르타의 시민들도 불만을 가졌겠지만 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고 충성의 대상인 권력에 주눅이 들어 으레 그러려니 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라코니아 또는 라케다이모니아 지방의 주요도시로서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북동쪽과 서쪽은 산악지대가 개방을 가로막아 지역적 폐쇄성이 결국 보수 과두제적 왕정에 머물러 있게 한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전제적 군사 독재로 일관하게 되었으며 참정권을 가진 시민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스파르타의 사회적 특성은 자유로운 창의성과 개성의 발휘를 억압함으로써 시민의 각성과 정치참여를 위한 대중적 투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산계층이 나오지 않았으며 이러한 군국주의적 성향은 곧 문화침체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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