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북단에 위치한 원시 세계 이른 아침에 닭 우는 소리에 잠을 깬다. 한 마리가 목청을 돋우자 여기저기서 경쟁을 하듯 울어 댄다. 선잠을 깬 상태에서도 그 소리가 제법 구수하게 느껴진다. 이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라면 잠자리에 누운 채로 머리맡의 담배를 찾아 물었을 것이지만, 나는 그냥 누워서 멍청하게 허공만 쳐다보면서 여기가 어딘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목청이 찢어져라 계속되는 그 닭들 울음소리에 그만 구수함도 사라져서 모기장을 걷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온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저놈의 닭들에게는 일요일도 없는 모양이구나' 하고 투덜대면서 창문을 열어본다. 야자수 너머로 동이 터 오고 해변의 물결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온다.
여기는 필리핀의 외딴곳 '엘니도'라는 곳이다. 요 며칠 동안 원시의 꿈에 젖어 이곳저곳을 헤맸고, 이 한가로운 어촌의 한 코티지에서 들려오는 저 물결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자리에 들지 않았던가. 아, 오늘도 그 원시의 세계에 묻혀 지낼 수 있다는 것을 그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이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엘니도의 아침을 시작한다. 오늘도 코티지 안주인이 점심으로 마련해 준 샌드위치와 바나나 몇 개만을 들고서 전세를 낸 방카를 타고 무인도들을 찾아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나선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등지고 야자수들 사이에 들어서 있는 마을의 집들에서 아침을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또 길가의 조그마한 구멍가게들이 정겹다. 어젯밤 몇몇 여행자들이 들어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던 곳은 밤늦도록 있어서인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선착장에는 간밤에 그물을 쳐 고기를 잡은 어선들이 돌아와서 마을 사람들이 분주하게 들락거리고 있다. 양손에 다랑어(Tuna) 한 마리씩을 집어 들고 물길을 걸어 나오는 소녀의 웃음이 해맑다. 그걸로 아침식사를 마련할 모양이다. 생선 값을 물어보니 물어 본 내가 죄스러울 정도로 거저나 다름없다. 아직도 이곳 엘니도 사람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이 '엘니도'라는 곳은 필리핀에서도 가장 사람의 때가 덜 묻어 자연관광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팔라완' 섬의 북단에 위치한 오지다. 이 일대는 빼어난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교통이 불편한 오지여서 세계 각국 여행자들이 이 엘니도를 방문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물론 그 덕택에 아직껏 때묻지 않은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그 어원은 스페인어의 '제비가 있는 섬'이라는 것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 옛날 스페인 모험가들이 이 땅을 방문하여 제비가 대리석 섬들 사이를 날고 있는 것을 보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태초의 모습 그대로의 무인도 소금쟁이 같은 모양의 방카를 타고 비취빛 바다 위를 달린다. 늙은 방카 주인과 조수인 그의 아들,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만 탄 방카는 통통거리며 제법 잘 달린다. 넓은 곳에 나오니 수심이 50m나 되어서 아무리 맑은 바다라지만 물밑은 보이지 않는다. 사방에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다. 그 섬들마다 한결같이 수백 미터쯤의 수직 암벽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조그마한 백사장이 하얗고 가늘게 빛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저 무인도들의 그림 같은 백사장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40여분 걸려서 어느 무인도의 백사장에 닿는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 밑에 자리한 조그마한 백사장. 눈부시게 빛나는 고요가 감돌고 있어서 찰랑되는 물결조차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 내가 이 백사장에 첫발을 내딛는 사람은 아닐진대 그 어느 누구도 다녀간 흔적이 없다. 백사장 주변의 바위들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돋아 있고 몇 그루의 야자수를 제외하곤 온통 밀림이어서 한발자국도 들어설 수가 없을 것 같다. 무늬를 그리는 투명한 물밑으론 수많은 산호들과 그 사이를 오가는 열대어들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 모든 것이 마치 태초의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이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곳은 비단 이곳만이 아니다. 요 며칠 동안 찾아다녔던 섬들의 백사장마다 이처럼 원시의 멋을 한껏 풍기고 있지 않았던가.
그림 같은 백사장에 투명한 바다를 눈앞에 두고 어찌 보고만 있을 손가. 부담 없이 이 원시의 분위기에 몸을 던져 보는 거다. 수영이야 잘하든 못하든 아무 관계가 없다. 또 굳이 수영복도 필요 없다. 보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데 알몸이라고 해서 거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쩜 이 원시적 분위기에선 수영복을 입는다는 것 그 자체가 죄악일지도 모른다. 속인들이 만들어 놓은 관습을 벗어 던져 놓고 한때라도 대자연 앞에 솔직한 내 자신을 들어내 놓는다는 것도 멋스러운 일이다. 이래서 나 자신도 원시가 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오늘날 이 엘니도를 찾아오는 여행객들은 꽤 되지만 그림 같은 무인도의 백사장이 수도 없이 많아 모두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에 몇몇 섬을 제외하곤 자신만의 시간을 침해당하는 일은 드물다.
어촌에서 빌려 온 장비로 스노클링을 하면서 원시의 투명한 바다에서 형형색색의 산호들을 들여다보거나, 손에 잡힐 듯한 열대어들과 친구가 되면서 마음껏 즐긴다. 특히 알몸으로 물속을 헤치고 다니거나 백사장을 거닐다 보니 더없이 홀가분하다. 이때의 기분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알몸일 때 가장 솔직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부부간의 갈등, 아니면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이런 곳에 와서 서로 알몸으로 한 며칠 지내면서 대화를 나누어 보도록 추천하고 싶다. 모든 것이 절로 풀려서 서로 잃었던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낙원 한켠에 공존하는 세속의 모습… 자외선이 강해서 피부가 금방 그을린다. 물놀이에 지치면 비취 파라솔을 대신하는 야자수 그늘에서 가져온 점심을 먹고 낮잠을 한숨 멋들어지게 자도 방해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가 다른 무인도의 원시의 낙원을 찾고 싶어 다시 방카를 타고 열대의 바다를 헤쳐 나간다. 한 무리의 물고기 떼가 짙푸른 해면 위로 연달아 뛰어 오른다. 다랑어인 듯싶다. 섬이 가까워지면 물빛이 다시 비취빛이 되면서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 보석처럼 맑은 물을 보면 그 어떠한 청량음료도 이렇게 맑지는 못할 것 같아 그냥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인다.
이 엘니도의 모든 섬들이 무인도인 것만은 아니다. '미니록'과 '팔랑가시안'이라는 두 섬에는 고급 리조트 시설이 되어 있다. 일본과 필리핀에 있는 두 기업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이 두 리조트 시설은 최고급이어서 서민들이 이용하기는 좀 벅찬 곳일 뿐만 아니라 투숙객이 아니고서는 허가없이 이곳에 상륙도 못하게 한다. 투숙객들에게 최대 안락한 분위기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사전에 엘니도 어촌에 있는 사무소에 들려서 무선으로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지만, 원시의 낙원 한 곳에 세속의 모순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잠깐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하고 얼른 그 자리를 떠나온다.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그곳이 좋을 것이다.
이 리조트의 프로그램에도 신혼부부를 무인도에 데려다 주는 것이 있다. 모든 것을 준비해서 백사장의 야자수 그늘에 내려놓고 방카를 비롯한 그 어느 누구도 약속 시간까지는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해서 둘만의 밀월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를 연상케 하는 아주 기막힌 시간이 될 것이다. 꼭 신혼부부가 아니더라도 투숙객이 원하면 점심 식사를 비롯하여 하루를 무인도에서 보낼 수 있도록 식탁까지도 운반해 주고 목이 마르다면 직접 야자수에 올라 야자도 따 준다. 좀 사치스러운 것이기는 해도 그러한 서비스에 젖은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낙원에 온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원주민의 흔적은 텅 빈 오두막 뿐 이곳의 모든 무인도가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곳에는 바나나 잎으로 엉성하게 만든 텅 빈 움막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무인도에 표류해서 살다가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지만, 알고 보니 제비집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기거한 곳이다. 이곳 엘니도의 이름에서 보듯 이곳에는 제비들이 많다. 그래서 제비집도 당연 많다. 예로부터 중국요리에서는 '제비집 스프'를 최고급으로 치고 있기 때문에 그 제비집들이 아주 고가로 팔린다. 그래서 이곳 원주민들은 철이 되면 이 섬 저 섬을 옮겨 다니면서 몇 날이고 절벽에 붙어 있는 제비집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철이 아니어서 이렇게 텅 비어 있는 채로 두 마리의 고양이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원히 간직해야 할 원시의 멋 발길을 어디로 돌려도 비취빛 맑은 바다와 인적없는 눈부신 백사장이 있어 꿈속 같은 곳이기는 하지만 이곳 엘니도는 분명 천국의 섬은 아니다. 단지 원시의 멋이 살아 숨을 쉬고 있는 이 시대의 숨겨진 보물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온갖 것에 잔뜩 찌들어 지친 몸을 쉬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래서 결국 엘니도는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곳이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이 좋은 곳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라고 한다면 뭇사람들이 뭐라고 말할까. 그것은 단지 엘니도의 원시적인 멋이 영원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엘니도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봤던 열 가지 주지사항 중 마지막 문구가 잊히지 않는다.
"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그 어느 것도 건드리지 말라"
"발자국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남기지 말라"
"추억 외에는 그 어느 것도 가져가지 말라"
"시간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죽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