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네요. ‘시간은 화살처럼 난다’는 서양 격언이 실감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학기를 시작합시다.
이번 호와 다음 호는 옛 절터를 찾아갑니다. 절터란 절이 있던 곳입니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퇴락하여 망한 절도 있고, 외침으로 스러진 절도 있으며 이념에 의한 탄압으로 종적을 감춘 곳도 있습니다. 회암사터나 미륵사터, 청룡사터처럼 웅장한 규모의 절터도 있고 초석 몇 개만 달랑 남은 작은 규모의 절터도 있습니다.
황량한 들판이나 우거진 숲속에서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며 줄곧 그 자리를 지키는 그곳에 가면 ‘아, 내 속에 내가 있었구나’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유물이나 유적은 나그네로 하여금 옛 모습을 상상하게 하고 흔한 들꽃 하나도 보물이 되어 다가옵니다. 그럼, 절터로 떠나볼까요?
호국사찰 금당엔 소나무가 주인으로 - 원원사터
원원사는 안혜, 낭융 등 네 대덕이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안혜와 낭융의 제자였던 광학과 대연 등은 고려 건국시 해적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명랑법사의 법맥을 이어받았는데 명랑은 신인종(神印宗)의 시조였습니다. 그 자신 또한 문무왕때 당나라를 비법으로 물리쳐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원원사는 법(法)으로써 외침을 극복하고자 했던 호국사찰로 창건되었습니다.
높은 축대 가운데에는 돌계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 계단을 오르면 쌍탑과 석등이 나타납니다. 쌍탑은 윗기단에 십이지신상을, 1층 몸돌에는 사천왕상을 고부조로 새겼습니다. 통일 이후 탑에서 인왕상을 대신하여 사천왕상이 등장하고 윗기단에서처럼 십이지신상이 처음 등장하는 점이 인정되어 최근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동탑과 서탑을 오가며 12지 동물을 맞춰보는 재미가 쏠쏠한데 안타깝게도 양쪽 탑 어디에도 뱀을 볼 수 없습니다.
아직 문화재 안내판조차 세워지지 않은 이 탑은 대표적인 ‘초고속 승진형’문화재입니다. 이전까지 이 탑은 사적에 뭉뚱그려 포함될 뿐 국가나 시·도로부터 지정 유형문화재로는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문화답사 붐을 일으킨 한 교수가 문화재계 수장이 되면서 국가지정 유형문화재인 보물로 격상한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지위가 격상했으니 사람으로 치면 복권에 당첨되어 소위 대박 맞은 경우라 하지 않을까요. 시대를 잘 타면 사람도, 문화재도 출세하나 봅니다.
탑은 역사성을 인정받아 국가지정 보물이 되었지만 제 마음속 보물은 두 탑을 바라보고 있는 금당터입니다. 금당 주인인 부처는 사라졌고 그 자리엔 초석을 비껴가며 굵직하게 잘 자라준 소나무들이 새 주인이 되었습니다. 원원사의 폐망과 함께 흙이 덮이고 그 위에 작은 씨앗들이 날아와 금당의 새 주인으로 정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어떤 역사가 펼쳐졌을까요. 그래서 감히 그 연륜에 존경하는 마음을 보태고 싶은 것입니다.
나를 묻으러 가는 길 - 무장사터
'무장사'라 하면 저는 개구리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니까 지난 3월 경칩이 막 지났을 때였습니다. 절터로 가는 길은 갓 겨울잠에서 깨어난 연갈색 개구리들로 지천이었습니다. 막 땅을 헤집고 나온 놈들이라 사람을 피하지 않아 행여 밟을까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떼며 계곡으로 들어갔었지요. 지난 7월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제 제 색을 입고 건강하게 자란 놈들이 곳곳에서 퍼덕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미타조상사적비가 서있었을 비좌 안에는 무당개구리 몇 마리가 둥지를 틀고 있어 마치 이 절터를 지키는 금와보살인듯 했습니다.
《삼국유사》 <무장사 아미타전> 편에는 신라 38대 원성왕의 아버지가 숙부 파진찬을 추모하여 무장사를 세웠고, 소성대왕의 비 계화왕후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 위쪽에 아미타전을 짓고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장사(?藏寺)란 이름은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후 이 깊은 골짜기에 병기와 투구를 감추어 둔 곳이라 해서 유래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절이 입지했던 곳은 경주 동북쪽 암곡리 북쪽으로 골짜기가 깊고 험준한 곳입니다. 암곡(暗谷)이라는 지명에서 예상하셨겠지만 지금도 비포장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는 걸어가야 하는 오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급한 사람은 절터를 찾기도 전에 포기하고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여유 있는 마음으로 걸으면서 활엽수 가득한 숲을 감상하고, 계곡을 열 번 남짓 가로지르면서도 물이 옷에 젖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어야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속세에서 알게 모르게 습득한 사악함을 모두 버려야만 나타나는 절터, 그래서 이곳은 나를 묻어 감추러 가는 길입니다.
현재 아미타조상사적비의 이수와 귀부, 삼층석탑이 남아있습니다. 사적비의 비신은 없어졌지만 일부 비편을 통해 이곳이 무장사임이 밝혀져 기록과 유물이 일치하는 곳입니다. 귀부는 창림사터의 그것과 같이 특이하게 쌍귀부입니다만 목이 절단되는 등 파손상태가 심합니다. 특히, 비좌 둘레에 십이지상을 조각하여 희귀한 경우를 보여주네요. 현재 여덟 종류의 십이지가 확인되지만 나머지는 파괴되어 볼 수 없습니다. 두 물줄기가 만나는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삼층석탑은 2층 기단에 3층 몸매를 가진 전형적인 통일 후 석탑입니다. 탑 윗기단엔 안상(眼象)이 두 면석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나눔의 미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왕실의 원찰로, 통일 후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무기와 투구를 묻어두었다는 이 절은 고려 중기 경에 폐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자가 우주를 받들고, 극락조가 날아다니고 - 영암사터
저는 경남 합천 삼가란 곳에 초임발령을 받았습니다. 영암사는 초임지에서 가까이 있었는데 직원연수로 처음 다녀온 후로는 그 절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학교 아저씨 오토바이를 타고 산길을 달려 절이 나타날 쯤이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기다리듯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해야 했습니다. 특히 가는 길에 만나는 오래된 이팝나무가 하얀 꽃을 피울 때면 그 아름다움에 취했고, 모산재 깊숙한 땅속에서 나오는 약수는 감로수와 같았지요.
초임이라서 불미스런 일들이 일어나 힘들었을 때면 이곳에 와 쌍사자석등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심기일전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영암사터는 내겐 발령동기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던 막역지우(莫逆之友)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 친구는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제 찾아도 한적한 느낌이 좋았었죠. 하지만 이제는 황매산과 모산재를 등산하려는 사람들에겐 명물이 되었고 특히 절터를 답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답사1번지가 되었습니다.
이 친구가 가진 매력이 무엇이냐고요? 한둘이 아닙니다. 우선 절터를 들어섰을 때 잘 다듬어진 석축이 눈에 들어옵니다. 돌못으로 석축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고 치성과 같이 요철을 두어 조형미가 풍깁니다. 특히, 쌍사자석등이 자리한 석축은 자칫 사각이 주는 밋밋함을 보완하기 위해서인지 돌출한 석축 좌우에 무지개 모양의 둥근 계단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계단 폭이 아주 좁아서 겸손하라는 계시를 던집니다.
쌍사자석등은 석축 아래에 서서 바위산인 모산재를 배경으로 올려다 볼 때 최고의 멋을 부립니다. 석등을 한가운데 두고 내 몸뚱이를 좌우로 조금씩 이동하면 모산재의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과히 영암사 답사의 절정이라 하겠습니다. 이 석등은 풍화에 의한 상처를 보이지만 매끈한 속리산 쌍사자석등보다는 인간적이고 박물관에 갇혀있는 중흥사터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젖살 오른 사자 두 마리가 모산재의 절경을, 푸른 하늘을, 우주를 받치는 모습이 지금도 아련합니다.
금당터를 지키는 역할은 여섯 마리 사자가 맡았습니다. 사자의 형상이 확실한 놈들도 있지만 개와 같이 귀를 반쯤 접은 넉살좋은 놈들도 있습니다. 삼면에 두 마리씩 자리하고 있는데 북쪽 면에는 새기지 않은 것이 이색적입니다. 아마 신령스런 바위들이 있기에 권속이 필요 없나 봅니다. 금당터 사면 계단에 만들어진 난간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가릉빈가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극락정토에 산다는 이 새는 사람의 형상인데 날개를 가지고 있어 극락조라고도 하지요. 이 금당이 곧 극락정토임을 의미합니다.
안타깝게도 정작 이 친구 이름이 영암사였는지는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일대에 수많은 절들이 있었는데 이곳이 영암사임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이죠. 서금당지에 남은 귀부 두 점의 주인공도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영암(靈巖)이라는 이름마냥 사력 또한 신령스러운 곳이라 봐야겠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사랑 - 만복사터
생육신이었던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 아래 용장사에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썼습니다.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남원 땅 만복사터입니다. 만복사저포기는 노총각 양생과 왜란 통에 죽은 처녀귀신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애틋한 사랑을 한다는 줄거리입니다.
김시습이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만복사는 퇴락하였던가 봅니다.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해서 이긴 양생에게 드디어 천생배필이 등장하고 두 사람이 절에서 사랑을 나누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때 만복사는 이미 퇴락하여 스님들은 한쪽 구석진 방에 머물고 있었다. 법당 앞에는 행랑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고, 행랑이 끝난 곳에 아주 좁은 판자방이 있었다.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판자방으로 들어가자, 여인도 어려워하지 않고 들어왔다. 서로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보통 사람과 한 가지였다.
양생은 그녀가 혼령임을 알게 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을 접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여인이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는데도 말입니다.
장례를 치른 뒤에도 양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밭과 집을 모두 팔아 사흘 저녁이나 잇따라 재를 올렸더니, 여인이 공중에서 양생에게 말하였다.
"저는 당신의 은혜를 입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승과 이승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신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도 이제 다시 정업을 닦아 저와 함께 윤회를 벗어나십시오."
양생은 그 뒤에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었는데, 언제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사랑과 영혼’이란 제목의 영화가 있었지요? 그 영화의 원조격인 시공을 초월한 사랑이야기는 오늘도 만복사 넓은 터에 애잔하게 전해오고 있답니다.
이름 잃은 그대여
사료가 남아있어 그나마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곳도 많지만 대부분의 절터는 이름도 없이 그 지역의 지명을 따서 붙여진 경우가 많습니다. 장항리절터가 그러합니다.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 한 자락에 우뚝 솟아있는 절터인데 불대좌와 쌍탑, 금당터가 남아있습니다. 장항리(獐項里)라는 지명답게 국보 236호로 지정된 서탑이 고개를 쑥 내민 듯 우르러 보입니다.
이곳 쌍탑 배치는 독특합니다. 금당터 중심에 자리한 불대좌를 중심으로 해서 두 탑이 일직선상에 있습니다. 이웃한 감은사탑이 금당을 뒤로 두고 쌍탑으로 서 있는 것과 같이 일반적인 쌍탑 배치 형식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죠. 그 이유는 훼손이 심한 동탑이 제자리가 아닌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절터가 서 있는 곳 양쪽으로 계곡물이 흐르는데 물난리를 맞으면서 절터가 유실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동쪽 절터의 유실이 심해서 동탑이 계곡에 떨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동탑 부재를 모아 비교적 안전한 서탑쪽으로 옮겨 두었던 겁니다.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은 여성스러운 이미지가 강합니다. 아래기단에는 비천상을 새겨 두었고 윗기단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두었습니다. 관덕마을이란 어감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아기자기함이 이 절터에서 느껴집니다. 이정표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 한참을 헤매다가 마을뒷길을 따라 절터에 올랐을 때 저는 이미 감상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감상은 과거에 만났던 옛사랑에 대한 기억을 자꾸만 끄집어냅니다. 자그마한 탑이 비천상으로, 사천왕으로, 돌사자로 치장을 하고는 혼자서 절터를 지키고 있는 모습에 한참동안 걸음을 떼지 못했죠. 이름마저 잃고 동네 마을 이름을 갖다 붙여 놓았지만 분명 이 절도 분황사처럼 향기로운 이름이 있었을 터입니다.
그대, 관덕동 석탑에게
그대 / 안으면 쏙 안길 듯 / 어이해 홀로 골바람 맞고 서 계신가 / 몸서리치는 내 사랑아 / 그대 / 사천왕으로, 보살로 예쁜 화장을 하고 / 돌사자로 하여금 너를 돋우게 하여 / 맘껏 멋 부리려는 구나 / 천녀들이 날개 달아 / 부처의 나라로 데려갈 듯하구나……. / 그대, 자네 / 그 자리 잘 지키고 계시게나 / 첫사랑에 목멘 사람 있거든 / 그를 데리고 꼭 찾아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