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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따라 고구려 땅으로

중국 동북지방의 고구려 유적을 찾아서①

조현호 l 울산 옥현초 교사


고구려로, 고구려로

지난 8월말 중국 동북지방을 다녀왔습니다. 심양을 기점으로 해서 백암산성이 있는 요양, 고구려 첫 도읍지 환인, 두 번째 도읍지 집안, 한민족의 성산 백두산, 용정과 연길 등 연변지역을 둘러보았는데요, 이번 답사의 최대 성과는 바로 고구려가 우리 역사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정신없는 사람 같으니, 그 당연한 이야기를 꼭 그곳까지 가서야 알았냐'고 핀잔을 주실지 모르지만, 저는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발자국을 남기기 전에는 확신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사회과 부도나 역사책에 있는 역사지도를 보고는 혹 '정확한 근거 없이 실제보다 좀 더 과장하여 국경선을 그어놓지 않았을까' 하는 불순한 생각을 갖는 때가 많지요.

하지만 백암산성을 시작으로 연변으로 올라갈수록 우리 땅과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우리 역사가 더 가까워졌고 고구려의 위상이 분명해졌습니다. 아울러 세 국가 국민으로 각각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민족의 현실이 마음 아팠습니다. 우리 땅, 우리 유적들이 중국 땅에 있다는 이유로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는 실상을 확인하고는 분노 이전에 국력을 안타까워 해야 했습니다.

앞으로 심양과 요양, 환인, 집안, 백두산 및 연변 등 총 4회에 걸쳐 중국 동북 지방의 우리 땅, 우리 유적지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가끔씩 교과서나 문제집을 덮어두고 싶을 때,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열하일기》를 쓴 실학자 연암 박지원 선생을 따라 심양 및 요양 일대를 찾아갑니다.

우리 땅 심양

곧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에 내려다본 심양은 며칠째 내린 비로 누런 강물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심양은 요하(遼河), 혼하(渾河), 태자하(太子河) 등 굵직한 강을 끼고 있습니다.

심양(瀋陽)은 ‘심수의 북쪽’을 의미합니다. 심양 시내를 관통하는 혼하의 옛 이름인 심수(瀋水)에서 ‘심(瀋)’을 따고, 물 북쪽에 마을이 있어 ‘양(陽)’을 붙인 거죠. 《열하일기》중 <성경잡지(盛京雜識)>에는 심양 일대의 물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놓았습니다.

요하는 구려하(句驪河)라고도 하는데 요동과 요서의 경계이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칠적에 진펄 2백여 리에 모래를 깔아 다리를 놓아서 건너갔다. 혼하는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태자하와 합하고, 다시 요수와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태자하는 요양 북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연나라 태자 단(丹)이 도망하여 이곳까지 온 것을 마침내 머리를 베어 진(晋)에 바쳤으므로 후인이 이를 가엾이 여겨서 이 물 이름을 ‘태자하’라 하였다. 소심수(小瀋水)는 혼하로 들어간다. 물 북편을 양이라 하므로 심양의 이름이 대체로 여기에서 난 것이라 한다.

연암은 또 심양을 고구려 땅이라고 말합니다.

심양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혹은 이르기를, “한(漢)이 4군을 두었을 때에는 이곳이 낙랑의 군청이더니 원위·수·당 때 고구려에 속했다.”한다. 지금은 성경(盛京)이라 일컫는다. <성경잡지> 중에서

인구 720만의 대도시로 동북 3성의 거점도시인 심양의 관문 심양공항에 발을 내디디니 과거 우리 땅이었음을 알려주려는 듯 곳곳에 한국 전자회사 광고가 눈에 띕니다. 마치 옛 땅을 찾은 후손들을 따뜻하게 환영해 주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듭니다. 경제에는 국경이 없으니 우리 브랜드가 세계 곳곳에서 통쾌한 승전보를 날렸으면 하고 염원해 봅니다.

심양에는 고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같은 거리에 탑이 네 군데 있었다는데 그 중 서탑가(西塔街) 일대는 코리아타운이 형성된 곳입니다. 중국어를 몰라도 생활할 수 있고 보따리상들의 주무대요,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만날 수도 있는 곳입니다. 이곳이 코리아타운으로 발전하게 된 기원은 일제 강점기 국밥장사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독립지사의 아내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궁엔 치욕의 역사가

심양고궁은 이번 답사일정에서 유일하게 중국풍의 유적지입니다. 청나라 초기 20년간 수도였지요. 북경으로 천도한 후에는 황제가 동북지방을 순회할 때는 이곳에서 머물게 됩니다. 고궁 인근에는 당시 분위기를 살려 청나라 거리를 조성해 놓았는데, 우리나라도 궁궐 인근에 조선시대 거리를 만들어 보았으면 합니다. 저도 어느새 연암의 ‘실사구시’나 ‘이용후생’ 정신을 배워버렸나요?

연암 또한 고궁에 들린 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봉천부윤이 백성을 다스리고 봉천장군 부도통이 팔기(八旗)를 통할하며, 또한 승덕지현이 있는데… (중략) …장군부(將軍府) 앞에는 큰 패루(牌樓) 한 채가 서 있다. 정문인 태청문을 들어서 전전(前殿)에 이르렀다. 현판에 숭정전이라 하였고 그 뒤에는 3층 높은 다락이 있는데, 이름은 봉황루이다. 이층 여덟 모난 집을 대정전이라 하였고, 태청문 동쪽에는 신우궁이라는 건물이 있어서 삼청(三淸)의 소상을 모셨는데, 강희황제의 어필로, 소격 옹정황제의 어필로서 옥허진제라 써 붙였다.<성경잡지>중에서

심양고궁의 내부는 동로(東路), 중로(中路), 서로(西路)로 크게 나뉩니다. 동로에는 황제와 신하들이 정무를 보던 대정전(大政殿)이 있습니다. 박지원이 ‘이층 여덟 모난 집’이라고 묘사하였듯이 팔각 2층 건물입니다. 특이한 형태의 팔각 건물은 청나라의 군사조직인 팔기병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대정전 좌우로는 팔기병을 상징하는 여덟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팔각지붕입니다. 이는 청나라의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번지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중로에는 황제가 집무를 보던 숭정전(崇政殿), 회의나 연회를 열던 봉황루(鳳凰樓), 처소인 청령궁(淸寧宮) 등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봉황루의 ‘재기동래(載氣東來)’라는 편액은 청나라가 그들의 발상지인 만주지역을 신성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외 한자와 만주어를 병행한 현판, 푸른빛의 청기와 등에서 청나라가 만주 여진족이 세운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에는 황제의 도서관이나 무대, 문소각(文遡閣) 등이 있습니다.

북경 고궁 다음으로 잘 보존된 고궁이라지만, 이곳은 청나라에 유린당한 우리 민족의 슬픔이 배인 곳이기도 합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1636년에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명나라를 옹위하던 조선을 침략합니다. 왜란의 여파가 진정되기도 전에 호란을 맞아 조선은 1937년 1월, 결국 삼전도에서 청 태종을 큰 임금으로 인정하고야 맙니다.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친명배금을 주장하던 삼학사, 대신들의 자녀, 조선 여인들이 줄줄이 청나라로 보내집니다. 그들은 심수나루를 건너 남탑을 지나 심양성내 관소(館所)에서 머물렀습니다. 삼학사들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1645년 2월 한양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죽임을 당하고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왕위를 잇게 되지요.

고궁에는 우리 궁궐과 닮은 것이 많은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드무(큰 가마솥처럼 생김)도 보이고, 경복궁 아미산에서 볼 수 있는 괴석도 있으며, 십장생과 유사한 그림들, 지붕 위 잡상들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반면 우리 궁궐과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숭정전 앞에는 해시계와 측우기 같은 측량도구가 놓여 있고 건축물 곳곳에는 우리 사찰에서 많이 보이는 도깨비나 만(卍)자 문양이 숨어 있습니다. 황금색으로 치장된 용상, 황룡의 화려함, 어도에 새겨진 생동감 있는 용조각 등이 황제의 궁임을 실감나게 합니다. 봉황루 뒷문 쪽에 세워진 신간(神竿)은 만주족의 토템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천혜의 요새, 백암산성

심양에서 요양에 있는 백암산성 가는 길에 백탑(白塔)이 우뚝 서 있습니다. 연암 역시 이 탑을 보고는 공교롭고 화려하며, 웅장함이 가히 요동 넓은 벌판에 알맞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관제묘를 나와 5 마장도 채 못 가서 하얀 빛깔의 탑이 뵌다. 이 탑은 모는 여덟, 층은 열 셋, 높이는 일흔 길이라 한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당의 울지경덕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에 쌓은 것이다.” 한다. 그저 백탑이라 함은 우리나라 하정배들이 아무렇게나 부르기 쉽게 지은 이름이다. 탑 꼭대기에는 구리북 셋이 높였고, 층마다 처마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는데, 그 크기가 물들통 만하고, 바람이 일 때마다 풍경이 울어서 그 소리가 멀리 요동벌을 울린다. <요동백탑기> 중에서

백탑마을을 지나 심양에서 한 시간여를 달리면 백암산성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산성 일대 마을의 집들은 태자하가 자주 범람하는지 기단을 대폭 높인 일종의 2층집이 흔합니다. 벽체는 동북지방 어디를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벽돌집입니다. 연암은 청나라 여행길에 만나는 벽돌집도 예사로 보지 않았는데 벽돌만 구워 놓으면 집이 손쉽게 만들어진다는 데 대해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네 집은 많은 흙과 나무를 필요로 하고 특히 두껍고 무거운 우리 기와의 비효율성을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산성으로 가기 위해 마을길을 들어서니 먼지투성이의 길 위에 소똥, 염소똥이 지뢰처럼 깔려 있고 백암성에서 가져온 성돌이 여러 용도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고구려 유적을 이렇게 방치해 놓고도 세계문화유산 지정받을 때는 또 얼마나 보호하는 흉내를 냈던가요. 어느 민가 담장 위에서 초등학교 1학년 정도 됨직한 아이가 일행을 맞이하더니 ‘안녕하세요?’ 하며 우리말을 건넸습니다. 누군가가 가르쳐준 모양입니다.

연암은 <도강록(渡江錄)>에서 안시성은 원래 봉황성이었고 백암성은 원래 사성(蛇城)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합니다. 연암 자신 또한 들은 이야기라고 단서를 붙이고 있지만 고구려의 옛 방언에 황새와 같은 큰 새를 일러 안시(安市)라 하고 뱀을 일러 배암(白巖)이라 한 데서 그 근거를 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백암성의 위용이 드러납니다. 중국 정부는 백암산성을 현급 지정문화재, 우리로 치면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였습니다. 성 북쪽에 고려채(高麗寨)라는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음이 증명하듯 이 성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고구려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굳이 우리 역사에 기록된 백암성으로 부르지 않고 연나라와 관련시켜 연주성으로 부르거나 고구려가 당나라에 정복된 이후 백암성이 암주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여 암주성으로 부릅니다.

백암성은 고구려성으로는 잘 남아 있는 편이라지만 실상은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우려가 되는 것은 인근 100여 미터 지점에 자리한 거대한 채석장입니다. 그곳에서 하루도 쉼없이 돌들을 캐내고 있어 미관상의 문제는 둘째치고라도 언제 성이 무너질지 몰라 아찔합니다. 조금 더 시선을 멀리하면 군데군데 연기를 내뿜으며 석회석을 채취하는 곳이 보입니다. 채석장에서 ‘쿵’ 하며 돌 깨는 소리와 함께 석회석 채취장에서 연기가 뿜어 올라오면 이곳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터로 바뀝니다. 그 전쟁은 지금껏 계속되어 역사왜곡이니 동북공정으로 불거져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채석장 채굴작업이 3년만 지나면 성이 다 무너져 버릴 지도 모른다는데 어떻게 이렇게 방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고구려 석성의 웅자가 눈앞에서 허물어지고 있는데 중국 측에 모든 걸 맡겨야만 하는 현실이 애달프기 짝이 없네요.

백암성의 성돌은 경사진 지형에도 완벽하게 수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든든한 아랫부분에 있습니다. 높이가 10미터 정도였다고 볼 때 성의 아랫부분은 성의 견고함과 직결되므로 조금씩 성돌을 들여쌓기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들여쌓은 모서리 부분은 둥글게 다듬어 조형미 또한 뛰어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성돌이 빈틈없이 성벽을 채우고 겉은 방형이고 안은 삼각형인 성돌을 서로 어긋나게 배치하여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위 이빨쌓기식 축성법 또한 고구려성의 특징입니다.

내성(內城)에는 망대(장대. 점장대)와 우물터가 남아있습니다. 특히, 망대는 북벽의 치성과 함께 백암산성의 대표얼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노라면 고구려 장수의 우렁찬 목소리, 고구려인들의 이야깃소리, 광야를 달리는 말발굽소리가 아련하게 들립니다. 그 망대를 남겨두고 내려오려니 너무나 애잔하여 수십 번을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대와 언제 다시 만나리오…….

치성은 북벽 네 군데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성 안팎으로 겹쌓기를 하였는데 안쪽의 것은 계단용입니다. 군데군데 성돌 틈에 흰 부분이 드러나는데 찰쌓기한 흔적입니다. 성을 개축하면서 접합부에 회반죽을 써서 쌓는 축성법을 이릅니다. 이 성은 고구려 양원왕 3년(서기 547년) 가을 7월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어 축성된 지 1500년은 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전투를 치렀을 견고한 고구려 백암성은 어이없게도 당 태종에게 쉽게 넘겨집니다. 요동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이 성을 지키던 장수 손벌음(孫伐音)이 항복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손쉽게 백암성을 탈취한 당은 그 기세를 몰아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을 향해 진군하지만 패배를 맛보게 되죠.

고구려 유적을 찾는 일, 단순히 옛 땅을 그리워하는 향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찾고 백두산을 찾고 우리 민족을 찾아가는 동북3성 답삿길은 기름기에 절여진 중국음식만 먹다 한국음식을 먹는 듯한 깔끔함과 담백함입니다. 다음 호에서는 환인지역 고구려 유적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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