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은 12년간의 정복 전쟁을 통해 그리스·페르시아·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는 동·서양의 첫 만남으로 동·서 문화를 융합하는 헬레니즘 시대의 시작을 가져왔다. 이후 세계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로마가 탄생한다. 로마는 시민과 귀족간의 갈등을 극복하며 민주주의를 이룩하였으며,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을 통해 지중해로 진출한다. 로마는 지중해의 맹주 자리를 차지하며 헬레니즘 국가를 차례로 정복한다.
페르시아 전쟁 후에 벌어진 폴리스간의 분쟁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고, 승자와 패자 모두 동반 침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원전 5세기 이후부터 마케도니아가 남하하여 그리스를 정복하고 여세를 몰아 인도 북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지만 넷으로 분열되어 모두 로마에게 복속된다.
헬레니즘 시대를 연 알렉산더 대왕 기원전 5세기부터 그리스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때 마케도니아는 발칸 반도 남쪽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때 대정복자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자신의 나라로 통합시켰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부왕(필리포스 2세)이 이루지 못한 페르시아 정복을 위해 원정길에 올라 12년 동안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기원전 331년에는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다음, 북부 인도의 인더스 강 펀자브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청년대왕 알렉산드로스는 원정기간 동안 동방 군주제의 현장학습을 톡톡히 하였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어 페르시아 원정 당시에는 페르세폴리스의 왕궁을 불태워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상징적 파멸을 즐기고 많은 재화를 노획하고 금은을 녹여 주화를 만들었다.
이집트에서는 자신을 암몬신의 아들이며 파라오라 자칭하는가 하면, 이집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 정복지 곳곳에 같은 이름의 도시를 건설하였다. 무려 12년 동안 장병들을 이끌고 전쟁터를 누비다가 인더스 강에 이르자, '전쟁이라면 신물이 날 지경'이라는 병사들의 하소연에 더 이상의 정복사업을 단념하고 회군하지만,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 이른 그는 같은 해 6월 10일 열병에 걸려 32세의 젊은 나이로 객사(客死)하고 말았다. 기원전 323년 대 정복자가 죽자 제국은 큰 혼란에 빠지고 처음 셋으로 분열되고 기원전 3세기에는 넷으로 갈라졌다. 셀레우코스의 페르시아·메소포타미아·시리아 권, 리시마코스의 소아시아·트라키아 권, 카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페니키아·팔레스타인 권역이다.
동·서양을 융합한 세계적 문화 형성 알렉산드로스의 사후부터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제정시대를 열 때까지의 약 3세기 동안(BC 323~30년)의 역사를 '헬레니즘 시대'라 하는데, 또 한 가지의 견해는 동방원정 개시에서부터 마지막으로 남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멸망까지로 보고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결과는 문화의 융합과 종족의 혼합을 가져옴으로써 그리스적 요소가 대부분 상실되고 그리스와 동방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합된 문명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고전 그리스 문화와 구별하여 '헬레니즘 문화'라 부른다. 이 시대의 특징은 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동방으로 옮겨졌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테네를 비롯하여 그리스 본토의 인구는 감소한 반면, 마지막까지 번영한 곳은 제2의 아테네라 일컬어지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였다.
결론적으로 알렉산드로스에 의해서 건설된 헬레니즘 세계는 동·서 문화를 융합시킨 세계적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그리스어가 공용어였다. 고전 그리스 문화가 폴리스 중심의 폐쇄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반면, 헬레니즘 문화는 널리 개방된 보편적 문화가 되었다. 이 시대의 세계주의는 좀 더 보편적인 인간성에 기반을 둔 사고에 의해서 기존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체계에 내재되어 있었던 폴리스 중심의 사상풍조가 밀려나게 되었으며, 특히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싹튼 개인주의적 성향은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 지배에 의해서 더욱 분명해졌다.
세계사의 중요한 핵심 로마의 등장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로마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제국이 가장 보편성을 가진다 생각하여 자신들의 세계통치를 로마 판 <용비어천가>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통해서 합리화하였다. 기원전 2000년경에 청동기 문화를 가진 인도·유럽계 민족이 중부 유럽 또는 다뉴브를 거쳐서 이탈리아 반도로 이동하였다(테라마라·Terramara 문화). 이후 기원전 1100년부터 1000년 사이에 철기문화를 가진 민족이 다뉴브 강 유역을 거쳐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와 계속 남하하여, 그 일파인 라틴족이 티베르 강 남쪽 연안에 정착하여 도시국가 로마를 건설하였다. 제3차 이동은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해서 지중해 동부해안 지대에서 이동한 에트루리아인들이 토스카나 지방과 움브리아주 일대에 이르는 중부 이탈리아 북서부까지 점령하여 막강한 세력으로 라티움 일대를 지배하였다.
하지만 로마의 창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당시를 추측할 만한 사료도 없다. 앞에서 말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지시로 그의 로마통일을 칭송한 작품이며, 베르길리우스 본인도 호메로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객관성이 의문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로마시의 발상지는 티베르 강 남쪽 저지대인 라티움이다. 그 지방 주민은 농민이며 작은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초기의 로마는 일곱 언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그 발전 속도도 점진적이었으나,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계급이 분화되자 본격적인 왕정이 시작되었다. 왕(Rex)은 신정일치의 최고 권한을 가진 존재로서 군사·사법·종교의 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왕은 전시에는 비상조치권을 가지고 있으나 평상시에는 대체로 관습법의 제약을 받고 있었는데, 300여 명의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Senatus)은 왕의 위법을 가려내어 왕을 처벌할 수 있었다.
로마 민주주의는 계급간 갈등의 결과 우리는 민주주의의 효시로 그리스와 로마를 꼽는다. 그러나 앞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시민권은 시민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 한다. 당시 로마 '시민회(Populus Ramanus)'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전쟁 등에 대한 인준 또는 거부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민회의 결정사항은 다시 원로원에 의해서 거부될 수 있었다. 진정으로 민의의 반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제도였다. 원로원은 각자 개인이 독립된 표결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시민회는 구성원 전체의 의견을 모아 최종안을 도출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스의 경우 성인 남자라면 각 개인이 표결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너무 비교가 된다.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Livius, Titus : BC 57~ AD 17년)의 <로마 건국사>에 따르면 기원전 509년에 왕정이 끝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귀족과 평민(시민)들은 이민족 지배자인 에트루리아 왕을 몰아내고 '공화제(Res Publica Romana)'를 세웠지만 2세기 동안 평민과 귀족사이의 알력은 깊어져 갔다. 시민들이 의무에 걸맞은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자, 귀족들은 당근을 제시하였다. 로마의 팽창과정에서 시민들의 협조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평민회'와 '호민관 제도'가 생겨났다. 그러나 시민과 귀족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시민들이 이번에는 법적 지위 향상을 들고 나와 기원전 449년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이 공포되었으며, 기원전 367년에는 리키니우스-섹티우스법(Lex Liciniae-Sextiae)이 나왔다.
법안의 주요 골자를 보면 그동안 귀족들이 독점해오던 집정관직을 일반시민에게도 개방하여 1명의 집정관이 평민 가운데 선출될 수 있도록 규정하였으며 그밖에 여러 가지 단계를 통해서 시민의 법적 지위향상이 이루어졌다. 특히 평민에 대한 신관직의 개방과 공직 취임권의 개방은 로마인들의 끊임없는 '신분향상'을 위한 건전한 노력을 유도하였고, 이것이 바로 로마의 힘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래서 부(富)의 양극화 현상이 나라의 장래를 암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중해를 차지하기 위한 포에니 전쟁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지중해는 정원의 연못과도 같았다. 로마는 개국 초기에 주변의 여러 부족과 싸우고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에트루리아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본격적인 로마 건국에 착수하였다. 그 후의 로마는 5세기 동안에 걸쳐서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였다. 로마는 우선 주변 부족들을 물리치고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그리스 세력을 크게 위축시키며 반도를 통일하더니 이제는 눈을 돌려 지중해로 진출하게 되었다.
로마인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로마는 전통적인 농업국이었다. 즉 로마인들은 농사를 짓는 농부였으며 그들은 땅이 주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남에게 땅(농토)을 빼앗긴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더욱 열심히 중무장 보병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더욱이 기원전 3세기 전반에는 여러 가지 조치에 의해서 법률상 귀족과 평등한 신분이 됨으로써 권리와 함께 국가보위의 책임을 능동적인 자세로 담당하게 됨으로써 전쟁 자체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이 그 넓은 영토를 확장하고 별 무리 없이 통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분할통치'에 있었다.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로마시민권을 미끼로 던져 주민을 분열시키는 한편, 점령한 도시를 불공평하게 다룸으로써 단결을 저해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의 경우,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열혈당원이 있는가 하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도 많았다.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략한 한니발 카르타고가 잔뜩 긴장했다. 포에니(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로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했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포에니'란 페니키아인이 로마를 가리키는 방언이므로 페니키아의 식민지였던 카르타고도 '포에니'라는 말을 로마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로마의 대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카르타고를 일컬어 '위대한 민족의 적이 될 운명을 가진 나라'라고 하였다. 아마 그의 작품이 포에니 전쟁보다 일찍 나왔으면 아마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보다 더 유명했을 것이다.
시칠리아 반대편 북아프리카 해안에 자리를 잡고 있던 페니키아인의 식민도시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본국이 기원전 6세기 초에 아시리아와 리디아의 협공을 받아 멸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지중해를 무대로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면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가 정면으로 로마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반도가 좁다는 로마와 지중해를 주름잡는 카르타고와의 3차에 걸친 정면충돌이 벌어졌는데, 특히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년)은 카르타고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알프스 산을 넘어 로마 본토를 기습하여 칸네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보급물자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무려 16년간을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로마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황폐하게 하여 로마의 중소농민들이 몰락하고 말았다.
전쟁 승리로 지중해 맹주자리 차지 한편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는 카르타고를 치고 한니발이 반응을 지켜보았다. 역시 짐작대로 한니발이 급히 귀국하여 자마에서 스키피오와 일대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소아시아로 패주하였으며 2차 전쟁은 로마의 사정을 급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차 전쟁은 카르타고에게는 치명적인 상처와 함께 로마에게는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이스파니아(스페인)및 북아프리카 연안에 이르는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게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농토의 황폐는 민주정의 근본을 이루고 있었던 중소농민의 몰락을 초래하여 공화정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로마는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삼아 계속 정복사업을 추진하여 기원전 146년에는 마케도니아, 기원전 64년에는 시리아 등을 정복하는 등 차례로 헬레니즘 국가를 멸망시켜 속주로 편입시켰다(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는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