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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의 주요 키워드, 로마제국

포에니 전쟁의 승리 후, 로마제국은 더 이상의 경쟁자가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권력의 힘은 곧 로마 내부를 멍들게 하였고, 결국 사치와 향락으로 얼룩진 로마는 군인 황제의 등극으로 공화정이 끝나게 된다. 제2차 삼두정치의 승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치세를 펼치며 'Pax Romana(로마의 태평시대)'를 열었으나, 이후 등장한 칼리굴라, 네로와 같은 폭군의 등장으로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한편, 로마의 제국주의에 타협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2000여 년간의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


비록 로마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포에니 전쟁(BC 264~146)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중소농민의 몰락과 토지의 집중화 현상 때문에 각지에서 소작농과 빚에 허덕이는 시민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공룡처럼 비대해진 로마 공화정이 위기를 맞이하였다.

권력의 달콤함에 중독된 공화정
그 이유를 필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첫째, 어떤 조직이 방만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문어발식 경영으로 기업이 비대해지면 효율적인 경영이 어려워지고 고비용·저효율의 늪에 빠져들게 되어있다. 둘째,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더 이상 로마를 상대로 대적할 나라가 없었다. 즉, 경쟁상대가 없다는 데에서 오는 심리적인 나태함은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타락하게 만든다.

당시 지중해 세계의 부자나라 카르타고를 점령하고부터 이미 로마인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서히 정복에 맛을 들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2세기에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정복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키아 일대를 정복하더니 헬레니즘 문화를 접하고 로마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마는 무력으로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오히려 문화적으로는 망해버린 폴리스가 정복자를 정복한 꼴이 되고 말았다. 로마인들의 사치와 쾌락풍조는 로마 전체로 확산되어 낮에는 전차경기나 격투기 시합에 탐닉하였으며 밤이면 밤마다 광란의 향연으로 새벽을 맞이하였으니, 바로 이러한 상류층의 사치와 환락 풍조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계층이 생겼다. 이전에는 귀족이건 평민이건 근검절약하며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했지만 이제는 '일하는 사람 따로, 노는 사람 따로'가 된 것이다.

공화정의 탈을 쓴 독재정치 시작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개혁이 시작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었다. 이는 빈농과 소작농을 없애는 방안으로 일정량을 초과하는 토지를 국가에 반환토록 하고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하려고 하였으나, 원로원과 사회 기득권과 부유층의 반대로 실패하고 그들 형제는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개혁시도의 물꼬를 터놓았다는 데서 역사적 의미를 가볍게 볼 수 없다. 이렇게 표류하던 미완성의 개혁은 군부의 정치개입을 불러왔는데, 마침내 민중은 군부를 통한 개혁을 기대하게 되었고 로마의 공화정은 1인 지배체제로 전환됨으로써 제정시대로 돌입하는 첫 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기원전 110년에서 105년 사이에 로마의 속주였던 갈리아(프랑스),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소아시아의 폰투스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로마인들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을 받게 되자 민중들은 군부를 통한 개혁을 기대하게 되어 결국 마리우스와 술라의 1인 통치로 이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기원전 73년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은 군부세력의 전면등장을 부채질하는 사건이었는데, 2년간에 걸친 반란은 로마 시민들이 군부에 구국의 결단을 촉구함으로써 로마의 민주정이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때 야심만만한 정치혼란의 해결사가 등장하였다. 그가 바로 마리우스의 조카인 카이사르(Caesar, Gaius Julius : BC 102~44)였다. 그는 민회의 지지를 받아 원로원을 억압하고 카이사르-폼페이우스-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정치를 출범시켰으나 크라수스는 파르티아에 원정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던 도중에 파르티아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여 카이사르-폼페이우스의 양자구도가 되었고,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원로원과 정적을 치기 위해서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주하였으나 그곳에서 암살당하고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5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를 여왕으로 세웠으며 소아시아 원정에서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로마로 개선한 카이사르는 원로원으로부터 종신집정관이며 최고신관(最高新官, Pontifex Maximus)이 되고, 기원전 44년에는 전 로마군의 최고사령관(imperador - 황제의 어원)의 칭호를 받음으로써 실질적 군주제의 형태로 국정을 운영하였으나, 공화정을 수호하려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에게 기원전 44년 3월 15일 암살당하고 말았다.

제2차 삼두정치의 승자,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기원전 1세기의 로마는 대외적으로는 영토상의 팽창은 사실상 정지되었으며, 대내적으로는 공화정이 붕괴되고 제정으로 정치형태가 옮겨가는 많은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그의 부장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양자인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부하였던 레피두스가 로마의 영역을 셋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삼두정치체제로 로마를 이끌었으나 야심에 찬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체제를 깨뜨리고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시종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세운 왕조였으며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을 추격하여 이집트에 왔을 때, 클레오파트라를 총애한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실의 내분을 정리하고 그녀를 프톨레마이오스조의 여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관할지인 이집트를 방문하여 클레오파트라와 깊은 관계에 빠지고 말았다는 데에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것을 구실로 이집트 정벌을 감행하였다. 물론 표면상의 이유는 아내를 버리고 옛 상관(카이사르)의 정부와 바람을 피우는 안토니우스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정적을 제거한다는 치밀한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안토니우스의 부인 옥타비아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였음).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는 아그리파가 지휘하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에게 참패를 당하고 안토니우스는 자살, 클레오파트라는 독사를 이용한 자살로 두 사람의 비련은 막을 내렸다. 악티움 해전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전 지중해 세계가 로마의 세력권에 완전 통합되었으며, 로마 안에서 공화제를 고수하려는 공화파의 입지가 회복 불가능한 상황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로마로 개선한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적 깜짝쇼를 벌였다. "본인은 로마를 위해서 해악을 끼쳤던 안토니우스를 평정함으로써 국내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므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으며 본인에게 위임된 모든 권한을 원로원과 자랑스러운 로마 시민에게 반환하는 바이오." 이러한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쇼에 대해서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도 그에게 공화제에서 가능한 직책과 권한을 부여하였다. 특히 그가 부여받은 칭호 가운데 임페라도르와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는 실질적인 제정시대로의 돌입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은 공화제라는 명분에서 이루어진 권력집중의 독재체제였다는 말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Pax Romana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독재권력을 싫어하는 로마인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자신을 프린케프스(제1시민)라 칭하면서도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켜 통치권을 강화하였으며 종교적으로는 제국의 대사제로 군림함으로써 사실상 로마의 제정시대를 열었다. 우구스투스의 치세를 또한 '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고도 하는데,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개선하는 길에 당대의 대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만나 《전원(Eclogae)》이라는 시집을 출간케 하였다. 그의 목적은 베르길리우스의 시적 재능을 이용하여 자신의 업적을 선전코자 하였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을 알아주는 데에 대한 보답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승리를 찬양하는 대작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아이네이스》, 즉 로마 판 《용비어천가》였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 시대는 조용하고 전원적인 분위기로 흘러갔다(Pax Romana). 농부들은 다시 밭을 일구러 나가고 도시의 시민들은 혼란 이전의 평상시로 돌아왔으며 군인들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로마제국을 조용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적어도 '군인 황제 시대'이전까지는 말이다. 제국 내의 많은 도시에 교량과 수도가 설치되고 도로가 정비되었으며 제국의 수도 로마 시는 벽돌도시에서 '대리석도시' 상징되는 번영과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직업의 분화 등 사회전체에 평화와 안정이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투스가 76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양자인 티베리우스 및 친족 4명이 제위를 계승하였지만 대체로 무능하였다. 특히 칼리굴라는 광기가 있는 군주였고 네로는 폭군이었다.

팔레스타인서 추방당한 유대인
폭군 네로가 자살하자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Titus Flavius : AD 69~79)가 제위를 계승하였는데, 황제가 되기 전에 유대인의 반란진압에 파견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위에 오른 그 이듬해인 서기 70년 아들 티투스를 보내어 로마군단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파괴토록 하여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살아야 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 즉 이산(離散)의 유랑민족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추방하였을까? 로마인들이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기 전에 그곳은 이미 헬레니즘 국가의 영토였다. 유대인들은 우상문화를 철저히 배격하여 안티오쿠스 4세와 처절한 싸움을 벌인 바 있었고 이번에는 로마가 헬레니즘 국가를 정복함으로써 '유대인 버릇잡기'가 인수·인계된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크게 작용하였다. 예수 탄생 이후 로마제국은 유대인 출신 나자렛 예수, 그리고 유대교와 유대 독립전선 등이 제국을 어지럽히는 근원이라고 생각하여 로마제국을 상대로 무장봉기를 일삼는 유대인들을 아예 소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타협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서기 66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이 "못살겠다. 갈아 치우자"며 대대적인 무장반란을 일으키자 서기 70년 로마제국은 티투스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군단을 현지로 파병하여 예루살렘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성전이 잿더미가 되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지만 독립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960명의 남녀노소가 '마사다 요새'에서 농성에 돌입하여 처절한 항쟁을 계속하다가 결국 서기 73년에 장렬한 집단자결로 로마제국의 탄압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2000여 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세계를 전전하면서 갖은 핍박을 받고 20세기에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무려 600만 명의 목숨이 희생당하는가 하면,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 탄생을 시발점으로 지금은 팔레스타인과 주변 아랍국들과 민족적·종교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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