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상상 속에서만 보아왔던 판타지까지 스크린 속에 비치는 사회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영화 속 이야기들은 단순한 재미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생을 경험하게 되고, 이는 곧 삶의 자양분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교육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교육을 주제로 한 영화는 문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하기도 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본지에서는 2006년 새해부터 교육을 주제로 한 영화를 선정하여 영화가 표현하는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본다. / 편집자
1989년 개봉, 교육 영화의 전형
영화에 있어 대개의 장르는 그 영역을 대표하는 일종의 전형이 되는 작품들이 있기 마련이다. 교육과 관련된 다양한 소재의 영화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 첫 번째 문을 여는 교육 영화의 전형이 되는 작품은 단연 지난 1989년 개봉되어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피터 위어 감독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당시 교육 현장에 있었거나, 이후 교육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사람들치고 이 영화를 접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죽은 시인의 사회>는 시·공간을 초월해 교사와 학생 상호간에 파생될 수 있는 관계의 빛과 어둠을 공감적인 내용으로 그려낸 수작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월튼은 명문 사립고교로 명예와 전통, 규율 그리고 최고가 되는 것을 교훈으로 삼고 있는 엄격한 기숙학교이다. 소수 정예의 학생들을 뽑아 치열한 입시 경쟁에서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월튼의 실체는 사실 비인간적인 입시학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긍심으로 가득 찬 이 곳의 교사들은 학생들과의 불필요한 인격적 관계를 회피하고, 도리어 권위에 의한 지식 전달이 용이하도록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이미 죽어 화석이 되어버린 것이기에 다만 아이들의 머릿속에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어질 따름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이미 세상은 '죽은 지식의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을.
여기에 영어 선생님으로 부임하게 된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 분)은 나름의 독특한 교육철학과 교수법으로 경직된 월튼의 완고함과 거기에 억눌린 학생들의 딱딱해진 가슴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키팅의 교육법은 그러나 생각 외로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단순한 방식이다. 곧 학생도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첫 시간부터 월터 휘트먼의 싯구를 통해 자신을 '선장'으로 호칭해 달라 말하면서 스스로의 권위를 내려놓고 학생들과 인격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일방적인 가르침의 원천으로서의 선생과 수동적 대상으로서 학생이 아닌 '카르페 디엠', 곧 '현재를 즐기고, 시간이 있을 때 활짝 핀 장미꽃을 거둘 수 있는' 생의 동료와 친구로서 말이다.
'내일'의 성공을 위해 '오늘'의 고통만을 강요하는 가정과 사회 그리고 학교에서 '오늘'의 소중함을 말하는 키팅의 외침은 학생들에게 마치 복음과 같은 소식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키팅의 가르침이 정점을 이루는 곳은 교탁 위에 올라서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설 것을 요구하는 유명한 장면이다. 그는 말한다.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 한 번 봐. 설령 그것이 틀리고 바보 같은 일일 지라도 시도는 해봐야 해.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생각만 고려하지 말고 너희들의 생각도 고려해 봐. 너희들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해. 늦게 시작할수록 찾기는 더 힘들어 질 거야."
언제나 엄한 아버지 밑에서 모범적인 생활을 강요받던 모범생 닐은 이렇듯 삶과 조건에 밀려나지 말고 과감하게 상황과 현실에 부딪혀 싸울 것을 요구하는 키팅 선생의 응원에 힘입어 아버지가 반대하는 연극에 출연하기로 결심하고, 뛰어난 형의 그늘에 묻혀 내면에 침잠한 채 살아왔던 토드는 그런 마음을 시로 부르짖을 수 있게 되며, 여자 앞에서 변변한 고백조차 하지 못했던 녹스는 낯선 학생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진심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키팅의 가르침이 늘 좋은 방향의 결실을 낳은 것은 아니었다.
'카르페 디엠'은 도전과 자유의 정신인 것과 동시에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방종과 무절제, 일탈의 객기를 불러 올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다. 실제로 아이들은 밤에 기숙사를 빠져 나가 시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비밀모임 '죽은 시인의 사회'를 시작하지만 이내 모임은 점차 술과 담배 그리고 여자들과의 어울림으로 쉽게 변질되고 만다. 더욱이 모임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달튼은 치기어린 영웅심에 빠져 공공연하게 교장의 권위에 반항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메시지
이렇듯 자유란 언제나 위험에 빠질 수 있는 불안을 내포한다. 하지만 이 긴장과 불안이 제거된 자유란 참된 자유의 본질을 잃어버린 거짓에 가깝다. 기성세대는, 그리고 그에 가까운 가치관을 가진 일군의 교육자들은 언제나 '아이들 위해서' 라는 말로 너무나 쉽게 자유를 억압하고 안정과 보호를 추구하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키팅은 자유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달튼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말한다. "카르페 디엠은 매 순간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라는 것이지 삶을 가지고 장난치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오늘의 어리석은 장난으로 내일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행동은 결코 '현재'의 자유를 소중히 즐기는 사람의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해결의 열쇠는 손쉬운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그들이 균형감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려는 마음, 곧 성경이 말하는 것과 같은 오래 참음의 고되고 지난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랑의 마음에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인내와 사랑의 길은 너무나 좁고 협착하여 가려는 이가 극히 적고, 규칙과 질서에 의해 운영되는 효율성의 길은 넓고 안전하여 가려는 이가 많다는 데 현실의 비극이 있다.
영화 속 키팅 선생이 아이들과 만나고 그들을 가르치는 방법은 다소간의 과장이 섞인 이상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게다가 소수 정예의 엘리트 아이들을 모아놓은 기숙학교의 환경 역시 우리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팅이 아이들을 향해 품고 있었던 뜨겁고 순수한 열정만은 결코 비현실적일 수 없는, 참된 교사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마음이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꿈을 향해 날아오르려 했던 닐의 절망적인 죽음과 희생양으로 그에 대한 책임을 빙자한 누명을 쓴 키팅 선생이 학교를 떠나는 비극적인 내용으로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그의 '진심'은 아이들의 가슴 속에 이미 작은 싹을 틔우고 있었다. 마지막 가는 키팅 선생 앞에서 가장 내성적이었던 토드는 엄격한 교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책상 위로 올라서 그의 가르침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이에 다른 아이들도 잇달아 책상 위로 올라 '선장'인 키팅을 배웅한다. 시인 김지하는 말했다. 아무리 세상과 사람으로 인해 절망할지라도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그렇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말한다. 시인이 살아있을 수 없게 만드는 이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 그런 시대를 애곡할 줄 아는 선생님과 그 통곡을 가슴에 받아 안을 수 있는 아이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희망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