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입니다. 학생들과 함께한 지난 1년간의 수많은 기억들이 떠오르시겠지요. 기억! 그 것을 철학자들은 인연(因緣)의 내면적인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활동하는 사유와 신체에 새겨진, 그리하여 그것에 방향성을 부여하거나, 적어도 그것에 간섭하여 영향을 미치는 ‘인연의 힘’이라는 것이지요. 기억은 그렇게 사람을 사로잡으며 머물게 하고 멈추게 합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과거는 소중하고 아름다워서, 안타깝고 아픈 과거는 안타깝고 아프기에….
사람의 기억력은 어느 정도나 될까요. ‘해마'(은행나무)라는 책에 따르면 우리 뇌의 98%는 곤한 잠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사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눈에 의지하는 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극이 없이 사는 사람일수록, 뇌는 게으름을 피우고 그래서 덩달아 IQ도 나빠진다고 말입니다. 뇌가 지닌 기능은 딱 두 가지라고 합니다. 정보를 처리하거나 저장하는 것.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기억’이라는 겁니다.
왜냐고요? 기억이 망가지면 정보처리를 못 하기 때문이지요. 뇌에서 기억을 맡은 곳이 바로 이 ‘해마’인데 외부에서 힘이 가해져도 원상태로 복구되는 가소성(可塑性)이 가장 풍부한 부위라고 합니다. 크기는 성인의 새끼손가락 정도로 작지만 말입니다. 뭐, 과학으로는 어떻게 설명을 하던지 간에, 겨우 2%만 기능하는 뇌를 가진 인간에게 ‘기억’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힘겨운 녀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잊고 싶은데 잊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 기억을 모두 지워주겠다는 약이 있다면 그 것을 과연 먹을 수 있을까요?
영화 ‘동사서독(Ashes Of Time 1994)’에서 황약사(양가휘)는 구양봉(장국영)에게 ‘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술을 건넵니다.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는다는 그 술을, 그러나 구양봉은 마시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말이지요. 그런 구양봉에게 황약사는 이렇게 말 합니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다. 잊을 수만 있다면 매일 매일이 새로울 거다.” 여기에 황약사와 구양봉이 세상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숨어있습니다.
황약사는 새로이 시작하기 위해선 과거의 아픈 기억을, 먼저 거절하게 하고 먼저 움츠러들게 만드는 그 상처를 잊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구양봉은 여전히 떠나간 연인에 대한 배신감, 그녀를 떠나가게 만든 자신에 대한 실망, 다시 돌이키려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되어 버린 관계에 대한 절망 때문에 여전히 누구에게도 맘을 열지 않는, 오직 돈이라는 ‘외면적'형식으로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해결사'이길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연(因緣)을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그대로 긍정하지 못하는 한, 이미 지나간 뒤에도 못 잊어 집착하는 한, 인연은 이전의 삶과 기억, 상처와 원한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또한 지나가 버리는 이 현재를 사로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한 그것은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며, 아직 오지 않을 것을 얻고자 연연해하는 한 인연의 저 넓은 가능성의 대양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온 그 인연의 선에 집착하는 한, 인연의 선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은, 아니 더 나아가 삶이 긍정적으로 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영화 ‘메멘토'를 통해 보았듯 기억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또 다른 고통이며, 번민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잊게 해준다는 술 ‘취생몽사'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황약사처럼 ‘기억’이 아니라 ‘망각’의 소중함을 깨달아야만,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양봉처럼 ‘취생몽사’를 과거가 보내는 농담쯤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잊으려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나” “갖지는 못해도 잊지는 말라”고 말입니다. | 한국교육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