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 박하선/사진작가, 여행칼럼니스트
고생 끝에 허락된 왕국과의 첫 만남
여기는 티벳 고원의 서부 변방. 불같은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해발 4000m의 고원에서 나무 한 그루 없는 주변의 산들이 하얀 사막처럼 빛나고 있다. 온 천지가 텅 비어있어 마치 오수(午睡)속의 적막함 같을 것을 느끼게 한다. 세 갈래의 갈림길 옆에 텐트를 치고 지나가는 트럭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린 지도 이틀이 되었다. 말로만 들어온 '구게 왕국'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오늘도 저 멀리 바라다 보이는 모래언덕에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기만을 눈이 빠지게 지켜보고 있다. 그것은 마치 구약성서에서 한 예언자가 신의 계시를 받고 성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라고나 할까.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너무도 생소한 이 구게 왕국. 9세기 한때 중앙 티벳의 '랑 다르마'왕의 불교에 대한 박해로 인해 흩어져 있던 추종자들을 모아 '예쉐 오(Yeshe O)'라는 사람이 866년에 창건한 왕국이다. 불교의 보존과 전래에 역점을 둔 이 왕국은 예쉐 오 왕 자신도 결국 왕위를 버리고 중이 될 정도로 불교가 크게 번성해 티벳 전역에 다시 불교의 부흥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17세기 카시미르 사람들의 침공으로 멸망하기까지 서부 티벳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역할을 해 왔던 곳이다.
30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그 흔적들은 인도와의 국경을 지척에 두고 산속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자다'와 '사파랑'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마을들은 워낙 꼼꼼하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사전 정보 없이는 그냥 지나치기가 쉬운 곳이다. 또 설사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교통이 워낙 불편해 목전에서 포기하는 경향이 많은 오지 중의 오지로 통한다. 3일째 되는 날도 역시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웬만한 거리 같으면 걸어서라도 도전해 보겠지만 150㎞가 넘는 험악한 산길이다.
사실 구게 왕국에 대한 사진 한 장 구경한 적이 없을 정도로 사전 정보가 미흡했지만 그러한 왕국이 있다는 말만 듣고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려서 아까운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누룽지와 육포로 연명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날은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한낮이 다 되었을 때 트럭 한대가 모래먼지를 날리면서 이쪽으로 방향을 잡고 다가서고 있었다. 부리나케 짐을 챙겨서 길을 막고 차를 세우니 군용 트럭이었다.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3일을 기다린 마당에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화물칸에 올라타고 구게 왕국을 향해 계곡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월과 함께 흩어져가는 흙빛 도시
험악한 산길에 얼마를 몸부림쳤을까. 협곡으로 접어들면서 주변의 산세가 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웅장하게. 수많은 골이 패인 흙빛의 산들이 마치 거대한 신전처럼, 또는 병사들이 사열을 받고 있는 자세로, 아니면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된 위엄 있는 왕궁이나 장군들의 얼굴 등등이 천의 모습을 띠고 한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구 속의 혹성이라더니 이곳을 두고 한 말인가. 이러한 것들이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에 의해 생겨난 자연적인 것이라고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거대한 제국 속에 빨려 들어온 듯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그저 입만 딱 벌어질 뿐이다.
역시 왕국이 있을 법한 곳이다. 이것은 구게 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전초전으로 그 왕국의 위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으며, 또 그 왕국을 찾아가는 우리를 맞아 일종의 대 환영식을 베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다' 마을은 아주 조그마한 동네였다. 눈에 보이는 것 거의가 흙빛이었지만 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톨링'이라는 사원의 모습이 제일 먼저 관심을 끌었다. 예쉐 오 왕의 명을 받고 인도에서 공부하고 있던 '린첸 상포'가 978년에 돌아와 불교의 부흥을 위해 지은 많은 업적 중의 하나다.
또한 1040년에 인도의 유명한 학자 '아티샤(Atisha)'가 이 구게 왕국으로 건너와 티벳 전역에 불교의 부흥을 꾀하면서 이곳 톨링 사원에 2년 동안 머물었던 기록도 가지고 있다.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것인지는 몰라도 많이 훼손되고 파괴되어 있었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있어 이곳 촌장인 듯한 노인네가 열쇠를 가지고 와서 본전 옆 건물을 열어주곤 했다. 옳거니 하고 그 순례자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그 노인네가 가로막고 절대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이방인은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카메라 때문에 그럴지도 몰라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하면서 살살 구슬려도 보고 화를 내보이기도 하면서 통사정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문 옆에서 고개만 내밀고 입맛만 다시다가 끓어오르는 울화를 달랠 겸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 저기 부서진 성곽과 불탑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흙으로만 만들어진 것들이라 천년이라는 세월을 지탱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도처에 토굴들도 많다. 지금은 모두 비어 있거나 아니면 가축들의 보금자리나 창고 같은 것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왕국 시절에는 물론이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토굴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지금 주민들이 살고 있는 흙집들도 말이 집이지 토굴이나 다름없을 정도지만.
시간의 깊은 잠 속에 빠져있는 왕궁
구게 왕국의 본산은 이곳 '자다' 마을에서 17km 더 깊이 들어가 있는 '사파랑'에 있다. 그러니까 그곳에 왕궁이 있는 것이다. '사파랑'으로 가는 차편이 없어 간략한 짐만 챙겨서 걸었다. 불볕이었지만 구게 왕국의 하이라이트인 왕궁을 보게 된다는 기대가 앞서다 보니 참을 만 했다. 그러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고, 또 수많은 협곡을 넘나들면서 몸이 파김치가 되었을 때는 '사람이 이러다 죽는 모양이구나' 했다.
악전고투 끝에 이 구게 왕국의 성채 바로 밑에 섰다. 벌집 같은 수많은 토굴과 몇 채 안되는 사원, 그리고 도저히 그냥은 오를 수가 없어 보이는 산꼭대기에 외롭게 떠있는 왕의 거처 등이 쥐죽은 듯한 고요 속에서 우리를 맞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만화영화에 나오는 '마귀의 성'처럼 제법 으스스한 분위기로 다가왔고, 우리는 그 '마귀의 성'에 들어가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 한판 승부를 치러야만 하는 주인공이 되는 기분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성채를 카메라에 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불렀다. 이곳 관리인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드물어서인지 반가운 기색이었다. 이 거대하고 소중한 왕국의 성채를 이 사람 혼자서 관리하고 있다는 말에 그저 놀랄 뿐이다. 그는 단순한 관리인이 아니라 불화를 그리는 젊은 화가로서 이곳 사원내의 많은 단청이나 불화를 자신이 직접 보수하거나 새로 그렸다고 자랑했다. 입장권 얘기가 나왔다. 자그마치 우리 돈 4만 원 정도다.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지만 결국 사람 좋은 관리인 덕택에 할인에 할인을 거듭해서 중국인 요금으로 낙찰이 됐다. 물론 내부의 촬영을 일절 허락해 주지 않은 것이 애석했지만.
관리인을 따라 들어간 성내는 다섯 채의 사원을 빼고는 온통 토굴뿐으로 텅 비어 있었다. 사원 내부의 벽면마다 엄청난 벽화들과 불상들이 있었다. 부조된 불상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떨어져 나간 모습이지만 벽화들은 그런 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내부가 너무 어두워 자세히 살펴보기가 힘들었지만, 벽화의 성격이 그 유명한 돈황의 '막고굴' 벽화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전형적인 티벳 불교의 그림 양식과 인도와의 접촉이 많다 보니까 그림 속에 인도인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 등이 우선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디에서 떨어져 나온 불두인지는 몰라도 그 위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세월을 얘기해 준다. 내부의 분위기가 천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처음으로 깨어난 듯 제법 으스스하기까지 했다.
이방인의 발길을 잡는 천년의 고독
왕국의 성채에서 곧바로 내려오니 강변에 마을이 있었다. 이곳이 '사파랑'이라는 곳인데 '자다'보다도 더 작고 별 특색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이 마을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바로 이 위에 구게 왕국의 성채가 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이 마을 쪽으로 돌아 왔더라면 협곡을 건너는 등의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어느 민가에 들려서 버터차를 얻어 마시고 간단한 요기를 한 후 다시 성채로 올라왔다.
시간이 너무 늦었고 또 아침의 왕궁도 보고 싶어서 이곳 관리인의 숙소에서 '참파(티벳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미숫가루)'를 얻어 먹어가며 하룻밤을 신세 지기로 했다. 오고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몸은 극도로 피곤한데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 다시 '자다'까지 걸어가야 할 일이 꿈만 같아서 일까? 아니면 이 구게 왕국에 들어오기도 힘들지만 한번 이방인이 들어오면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말이 떠올라서일까? 버터를 태워 밝히는 불빛이 천년의 고독을 희롱하는 것을 지켜보는 가운데 구게 왕국의 밤은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