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명문가 하면 미국의 케네디 가문이나 록펠러 가문 등을 쉽게 떠올립니다. 우리나라에도 500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명문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퇴계 종가, 서애 종가, 석주 종가, 운악 종가, 다산 종가…. 또한 우리나라의 명문가들은 가풍에 맞는 교육철학을 지금까지 전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본지에서는 우리 문화 속에 숨어 있는 교육의 지혜를 재발견해 보고자 이번 연재를 시작합니다. '21세기로 이어지는 조선조 명문가의 교육철학'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 편집부
호머가 지은 <오딧세이>는 전쟁과 인간사를 그린 대서사이지만 여기에는 명가의 조건과 리더십의 덕목이 고스란히 담겨있기도 하다. 수많은 주인공들이 있지만 이들 가운데 현명한 아버지 오딧세우스, 지혜로운 스승 멘토, 유혹을 물리치고 20년 동안 가정을 지킨 어머니 페넬로페, 아버지의 뜻을 이은 지혜로운 텔레마코스 등이 명문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명문가의 유지, 발전 비결은 교육 이타카의 왕으로 '지혜로운 자'의 대명사로 통하는 오딧세우스와 부인 페넬로페 사이에 텔레마코스가 태어난다. 불가피하게 트로이전쟁에 참여하게 되자 그는 친구 멘토(Mentor)에게 집안 일과 아들의 스승이 되어줄 것을 요청한다. 텔레마코스는 부친 부재의 20년 동안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아버지의 지혜를 닮아간다. 오딧세우스는 아내에게 아이의 얼굴에 수염이 자랄 때까지 자신의 소식을 듣지 못하면 재혼을 하고 왕국을 아들에게 넘겨달라고 부탁한다.
이 때문에 오딧세우스가 귀국하지 않자 구혼자들이 몰려들어 페넬로페를 괴롭히지만 이에 흔들리지 않고 20년 동안 가정과 왕국을 지킨다. 아내 페넬로프는 그야말로 현모양처의 전형이다. 요즘 같아도 이러한 경우라면 재혼하는 여성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오딧세우스가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를 재회하게 된다. 오딧세우스는 가문의 관리자, CEO로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해 결국 왕국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 오딧세우스의 리더십과 집안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위기를 잘 넘기면서 이 가문과 왕국은 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20년 만에 오딧세우스가 돌아왔을 때 아들이 훌륭하게 성장한 것을 보고, 그 이후 멘토라는 이름은 '훌륭한 선생'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800여 년전에 쓰인 이야기지만 그야말로 감동을 주는 스토리텔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할아버지는 있지만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버지는 있지만 아버지는 늘 바쁘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있지만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자라지 못한다. 이러한 세태가 가정의 위기를 부르고 사회의 위기를 부르고 있다.
우리의 전통 명문가가 수백 년을 거치면서 온갖 풍상 속에서도 명가로서 유지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등의 엄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명가에는 멘토에게 자녀교육을 맡긴 오딧세우스와 같은 현명한 판단력과 자녀교육에 대한 헌신이 있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있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표현을 빌자면 가문이라는 회사의 최고경영자, 즉 CEO인 것이다.
오딧세우스와 같은 현명한 CEO를 둔 가문은 수백 년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을 벌이면서 가문의 영광을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들의 공통점으로 꼽히는 최고의 CEO, 최고의 인재가 발전의 원동력이라면 이들 명문가들의 원동력 역시 오딧세우스와 같은 CEO와 그의 지도를 대대로 계승, 발전시켜온 텔레마코스와 같은 자녀가 있었던 것이다.
자녀교육에 헌신한 대학자 퇴계 우리나라 명문가들은 자녀교육에서 공부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생활교육'을 중시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지식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자세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명문가들은 부모가 먼저 솔선수범을 보임으로써 자연스럽게 자녀들이 배우게끔 교육을 했다.
조선시대 명문가들의 자녀교육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이다. 특히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 서애 류성룡 등 역사상 위대한 인물일수록 자녀교육에도 헌신적이었다. 이 가운데 퇴계 이황(1501~1570)은 300여 명이 넘는 수제자를 길러내고 140번이나 넘게 공직의 부름을 받았던 조선시대의 대학자이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자녀뿐만 아니라 친인척의 자제들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어떻게 보면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퇴계는 우리의 상상과 선입관을 여지없이 날려버린다.
퇴계는 자신의 평생 사업을 시로 지은 적이 있는데, 성현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닦아 고향에서 '착한 사람을 많이 만드는 것(所願善人多)'이라고 했다. 그래서 권력을 쫓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제자를 기르며 참스승으로 살았다. 선비로서,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아들과 손자 등 가문의 후손들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좋은 친구와 함께 지내며 학문을 닦는 것을 중시했던 퇴계는 아들과 손자, 조카뿐만 아니라 형의 외손, 질녀, 형의 사위, 형의 손자, 조카의 글공부와 어려움을 힘닿는 대로 보살폈다고 한다. 조카와 조카사위, 종손자, 생질, 종질과 누님의 사위, 형제의 외손자, 질녀의 외손자까지 모두 와서 배웠다. 나중에는 문중의 청소년이 모두 몰려와서 배웠다고 한다.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지만 먼저 일가의 큰 어른으로서의 역할도 다했던 것이다.
한번은 넷째형의 둘째 아들 영이 생활이 어려워 학문을 포기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퇴계는 크게 상심하고는 생계 때문에 공부를 그만두어서는 안된다며 영의 뜻을 돌이키려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또 생각해보라'는 편지를 보내어 달랬다. 영은 그 뒤에 학문을 계속해 결국 벼슬길에 나갔다. 퇴계는 이처럼 요즘 사람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세심함을 갖고 있었다. 또 퇴계는 맏형의 외손자에게도 닭 한 마리와 생선 등을 보내면서 시간을 아껴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아울러 퇴계는 자녀에게 충고할 때에는 자녀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직접 말로써 훈계하기보다 편지를 활용하는 방법을 주로 택했다. 과연 요즘에 큰형의 외손자까지 챙기는 자상한 할아버지가 있을까.[PAGE BREAK]인맥 네크워크 형성을 몸소 실천 퇴계는 후손들의 교육에 세심하게 챙겼을 뿐만 아니라 좋은 친구와 함께 지내며 학문을 닦는 것을 중시했다. 후손들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소개시켜주면서 훌륭한 교우관계를 맺도록 주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로 경쟁하고 분발하면서 학문에 힘쓸 수 있기 때문이다. 퇴계는 17세인 맏아들에게 뜻이 돈독한 친구와 함께 산(절)에 가서 굳은 결심으로 맹렬히 공부하라고 권했다. 이어 20세, 22세, 25세 등 2, 3년 간격으로 아들에게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지 말라고 타일렀다.
25세 된 아들에게는 "부형(父兄)이 곁에서 감독하고 꾸짖어야 공부하더냐"며 훈계하기도 했던 것. 성인으로 추앙받는 퇴계도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요즘 부모들처럼 극성스러울 정도였다. 퇴계는 집안을 이어갈 맏손자 안도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퇴계는 60세 때 도산서원을 완공해 제자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그러나 손자는 결혼해 절에서 따로 공부하고 있었다. 퇴계는 안도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산서원으로 와서 제자들과 함께 공부하라고 다그쳤다.
"손자 안도에게
…김성일과 우성전이 지금 <계몽>을 읽으려 한다더구나. 너는 벌써 <주역>을 읽고 있지만 <계몽>도 읽지 않을 수 없으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주역> 읽기를 마치지 못하더라도, 우선은 중지하고 곧장 (절에서) 내려와서 이들과 함께 <계몽>을 읽는 것이 아주 좋겠다."
이때 퇴계가 함께 공부하라고 권한 김성일과 우성전은 큰 학자가 되었다. 이처럼 퇴계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학식 있는 제자들 상호간에, 특히 자신의 아들과 손자와 조카들이 자신의 뛰어난 제자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권유했다. 이것은 그만큼 퇴계가 자질이 뛰어난 사람과의 교우관계가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는 출신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학식이 깊으며 좋은 선비의 자질이 있으면 사귀게 하고 서로 학문을 닦게 하였다. "김근공이라는 사람은 지체가 낮지만 학식이 깊고 넓어서 훌륭한 선비가 될 것 같다"며 손자를 보내 함께 공부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이미 450여 년 전에 조선 최고의 대학자였던 퇴계 이황은 요즘 강조되는 덕목인 '인맥 네트워크'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학문이 깊고 똑똑한 제자가 있으면 아들과 손자, 다른 제자들에게 소개해주고 함께 공부하게 했던 것이다. 굳이 대학자인 퇴계가 후손들과 제자를 위해 그런 일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들과 손자, 제자들을 각별하게 챙겼다.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원은 요즘으로 보면 사립 명문대인 연세대나 고려대, 혹은 대치동의 학원가 중에서 가장 부모들에게 인기를 끄는 학원에 해당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맥은 성공의 가장 큰 밑천으로 통한다. 요즘 자녀를 세칭 명문대에 진학시키려 과외를 시키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인맥 네트워크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부모들은 어릴 때부터 사립초등학교를 보내거나 심지어 유치원부터 명문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수년을 대기하기까지 한다. 폭넓은 인맥 네트워크는 사회인으로 살아가는데 때로는 큰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퇴계의 인맥 네트워크는 그 이후 영남학파라는 조선시대 최고의 학파를 형성했다. 특히 이 인맥 네트워크는 '혼맥 네트워크'로 발전하기도 했다. 퇴계가 행한 가정교육의 법도는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어 제자들 역시 퇴계가(家)와 같은 자녀교육의 전통을 갖게 되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펴낸 퇴계학파의 학맥도에 따르면 퇴계 당대에 310명 등 오늘날까지 모두 715명에 달하는 학자들이 퇴계학파(영남학파)를 형성하면서 퇴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학봉 김성일(1538∼1593), 서애 유성룡(1542∼1607), 한강 정구(1543∼1620) 등은 각각 제자들을 배출해 퇴계학의 소계파를 이루었다. 물론 이러한 인맥 네트워크는 당파를 형성하는 등 좋지 않은 측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현실적인 지침도 마다하지 않아 7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난 퇴계는 생후 7달 만에 진사(進士)인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홀어머니(박 씨) 슬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박 씨는 남들로부터 '과부 자식은 배운 게 없고 버릇이 없다'며 따돌림을 받을까 봐 남들보다 몇 배 공을 쌓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매우 엄한 교육을 했다. 그러한 가르침으로 퇴계는 대학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퇴계는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바로 어머니'라는 기록을 어머니의 무덤에 적어놓았다.
퇴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을 두지 않고 똑같이 예를 갖추고 대했다. 귀한 사람은 잘 대접하고 미천한 사람이라고 차별해 대접하지 않았다. 제자들에게도 항상 높임말을 썼다. 이러한 겸손하고도 정성을 다하는 접대로 사랑방에는 손님과 제자들이 끊일 날이 없었다. 바로 이 점이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 퇴계의 위대한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퇴계는 자손들에게 '빚보증은 절대 서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기도 했다. 즉 친구가 먼 길을 와서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하면 그 허실을 가리어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이되, 빚보증까지는 절대 서지 말라고 훈계를 내렸다. 대학자인 퇴계이지만 자손들을 위해서는 현실적인 지침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퇴계의 자녀교육법에서 또 하나 두드러진 점은 그 자신이 성현의 책에서 배운 바를 그대로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을 통해 먼저 모범을 보여준 데 있다. 자녀교육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이 바로 부모의 본보기 교육이라고 한다.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이면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이를 보고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퇴계 집안 후손들은 퇴계라는 큰 스승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의식이 뿌리박혀 있다. 일부는 조상 전래의 가치관을 지키고자 하는 입장에서 개화에 반대하기도 했고, 퇴계의 14대손인 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와 같이 시인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옥사하기도 했다. 육사의 어머니 허 씨는 독립운동가의 대부격인 왕산 허위 집안 출신이다. 이처럼 육사는 대표적인 항일투사 집안을 외가로 두고 있었다. 또 3대에 걸쳐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안동의 고성이씨 종택(宗宅)인 임청각은 육사의 종고모집이다. 육사는 어려서부터 자주 임청각을 드나들었고 결국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교육으로 후손 이끈 가문의 CEO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퇴계종가는 3대가 함께 산다. 15대 종손 이동은(李東恩 1907년생)옹은 아직도 서울에 있는 아들과 손자들을 보러 한 달에 한번쯤 외출을 할 정도라고 한다. 16대 차종손인 이근필(李根必 1931년생)씨는 1남 3녀를 두고 있다. 장남 치억 씨는 일본 유학 후 현재 성균관대에서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다. 둘째 딸은 대학을 나와 사회생활을 하다 교원대에 입학해 재학 중이다.
퇴계는 450년 전에 '착한 사람들의 인맥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벼슬은 자신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퇴계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퇴계는 스스로 학문을 닦아 착한 사람을 많이 키워내는 교육 사업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찾았다. 특히 퇴계의 자손들과 후학들에 대한 가르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세심하고 열성적이었다. 요즘 아버지들의 경우 항상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자녀교육을 나 몰라라 하는 동안 가정에서는 점점 입지가 좁아져가고 있다. '아빠는 돈만 벌어주는 기계'라는 자조 섞인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버지가 자녀교육에 그만큼 무관심한 자업자득이 아닐까.
퇴계의 헌신적인 자녀교육은 오늘을 사는 아버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명문가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모의 노력과 함께 자녀의 노력도 함께 수반돼야 한다. 인류 최초(?)로 지혜롭고 모범적인 자녀교육으로 위기를 돌파한 지혜로운 아버지 오딧세우스와 스승 멘토, 아버지의 지혜를 이어가려는 아들 텔레마쿠스 등 3위 일체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퇴계는 스승이자 멘토로서 자녀들을 이끌고 학문을 독려했던 가문의 최고경영자였다. 그 후손들은 14대 450년을 이어오면서 한국 최고의 가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