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원 | 인천대 강사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연일 위생개혁의 시급함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들에게 위생을 통한 인민의 건강은 문명개화의 척도이자 서구 문명국과 같은 부강한 국가가 되기 위한 지름길이었다. 급진개화파들은 서구 여러 나라가 문명국이 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을 ‘건강한 인구’에서 찾았다. 건강한 인구 육성은 국력이었고, 그 힘을 기반으로 문명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문명의 적은 ‘똥’이다
글자에서도 냄새가 난다? 확실히 요 글자만은 기호 그 자체가 냄새를 풍긴다. 똥! 옛 글자로 쓰면 ‘똥’이다.(인터넷 상에는 옛글자 표기가 안됩니다) 좀 유식하게 한자로 쓰면 ‘屎’(똥 시)다. 한자로 쓰면 냄새가 풍기지 않는 것도 같다. 그런데 똥이 왜 문명개화의 적일까. 또한 똥과 신체검사와 위생과 단발은 어떤 관계를 맺을까. 알쏭달쏭하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전염병이 전쟁보다 더 무섭다’고 말하며 위생사업의 중요성을 목울대에 힘을 주어 외쳤다. 유길준뿐만이 아니었다.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연일 위생개혁의 시급함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들에게 위생을 통한 인민의 건강은 문명개화의 척도이자 서구 문명국과 같은 부강한 국가가 되기 위한 지름길이었다. 급진개화파들은 서구 여러 나라가 문명국이 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을 ‘건강한 인구’에서 찾았다. 건강한 인구의 육성은 국력이었고, 그 힘을 기반으로 문명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건강한 인구의 육성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전염병이었다. 1821~2년에는 13만 명이, 1859~60년에는 40만 명이, 1895년에는 30만 명이 죽었다.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좀벌레처럼 일상의 즐거움을 갉아먹었다. 우연하게, 그것도 갑작스럽게 닥치는 죽음의 공포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두렵게 마련이다.
정부는 개화파들의 위생개혁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정부는 ‘도로와 위생에 관한 규칙’을 만들었다. 마치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도로를 깨끗이 쓸고, 상하수도 시설을 정비하고, 변소와 주방을 개량하고, 정기적으로 길거리를 소독했다. 그러나 오랜 삶의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다. 급기야 정부는 공권력인 경찰을 투입했고 경찰들은 민중들의 삶을 감시했다. 노상방뇨 하는 사람이 있는지, 우물이 더럽지 않은지, 하수도에 더러운 오물을 버리는지, 뒷간의 분뇨를 잘 치우는지 등등.
위생감찰을 주된 업무로 하는 ‘위생순검’이라는 특별 직책도 등장한다. 이들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거리를 활보하며 길가에 대·소변을 보는 사람들을 적발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상점의 위생상태도 점검했으며, 만약 불결한 상점이나 상한 음식을 파는 가게가 적발되면 태형(笞刑)이나 벌금형을 내렸다. 정부가 경찰력을 동원하여 위생개혁에 팔을 걷어붙이며 끝까지 박멸하려고 했던 물질은 바로 똥과 오줌이었다. 똥오줌과의 대 전쟁이 선포된 것이다.
특히 노상방뇨는 크나큰 범죄행위였다. 정부와 계몽가들에게 똥은 단순히 생리적 현상에 의한 배설물이 아니었다. 똥은 만병의 근원이자 공기를 오염시키는 악독한 물질이었다. 똥에서 나오는 냄새를 사람들이 맡으면 질병에 걸린다고 믿었다. 똥은 각종 세균이 서식하고 번식하는 숙주라고 판단되었고, 길가에 널려 있는 똥의 척결만이 살길이요, 문명개화의 길이었다.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똥’은 어느 날 갑자기 만병의 근원, 비위생의 표본으로 새롭게 ‘발견’되었다. 대로에 똥을 누는 자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사실 똥이 무슨 죄가 있는가. 느닷없이 바뀐 세상, 근대의 시선, 문명의 시선이 똥을 적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런데 만약 무심코 길가에 노상방뇨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건 팁(Tip)이다.
일전에 용동 등지에서 어떤 의관한 사람이 오줌을 누다가 일순사에게 붙잡혀 뺨을 맞고 의관을 다 찢겼을 뿐 아니라, 땅에 눈 오줌을 도로 먹게 하며 무수한 곤욕을 당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겼다.(‘오줌 누다 봉변’, <대한매일신보> 1909. 2. 12. 잡보(雜報))
일본 통감부가 한국을 다스릴 무렵인 1909년, ‘일순사’가 뺨을 때렸다고 하니, 일제의 만행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 문제는 일본순사의 행위가 아니다. 위생에 대한 강박증이 만들어낸 제도의 폭력이다. 의료가 병을 치료하는 행위라면, 위생은 병을 예방하는 일이다. 치료는 일차적으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전제로 하지만, 위생은 도래할 질병, 미래의 환자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의 시스템이다. 이는 일상의 습속(習俗)을 개량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몇백 년 동안 지속되었던 삶의 방식을 갑자기 바꾸는 일은 녹록지 않다. 위생은 질병과의 전쟁이기도 하지만 민중의 삶의 습속과 싸우는 일이다. 근대는 낡은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규칙들을 만들고, 또한 사람들을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 내야 한다. 낡은 외투를 벗고 허허벌판으로 떠밀려 나간 사람들은 철저하게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만 하는 것이다.
위생이 고생이라!
공권력을 동원한 정부는 위생개혁을 위한 박차를 가했다. 분명 인민들의 삶을 보다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행한 일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에게 위생은 ‘고생’의 다른 말이었다. 경찰들은 길거리에 퇴비 쌓는 행위를 금지했다. 변소는 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함부로 똥을 풀 수도 없었다. 똥간을 푸는 일에도 돈이 들었다. 지금처럼 탱크로리가 딸린 차가 온 게 아니라 똥통을 짊어진 사람들이 방문했다. 그들이 공짜로 뒷간을 청소해줄 리 없었다. 똥을 치워주는 대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백성들에게 이 ‘분뇨처리부대’는 안 그래도 어려운 살림에 반갑지 않은 손님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명 1900년대 식 새마을 운동의 명목으로 신설된 ‘청결법’과 그에 따른 ‘위생비’는 사람 잡을 세금이었다. 순검과 헌병들은 아무 집이나 무단으로 들어가 위생비를 내지 않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했고, 세금징수를 빌미로 부녀자에 대한 성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민중들에게 부과된 위생비는 약 1원 정도였다. 지금으로 보면 대단한 액수가 아니지만, 당시 쌀 한 가마니가 약 5~6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신학문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니 만큼 어찌 위생에 둔감할 수 있겠는가. 미래의 동량인 학생들이 비위생적 환경으로 질병이라도 걸리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황제가 단발하는 것도 위생에 관계되는 일이라며, ‘위생’에 방점을 콕 찍지 않았던가. 물론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면서 단발령을 철회하기는 했다.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짐이 그때 단발령을 내린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친일세력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짐은 다시 명하노니, 이후로는 편할 대로 하라.”
그렇지만 한번 트인 물꼬를 쉽게 막을 수는 없었다. 수백 년 간 지속되어 온 장발 ‘관습’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단발이 ‘위생’과 연관되었고,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문명개화한 사람의 상징이 된 이상, 계몽의 선두에 서야할 학생들 역시 단발의 유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학생들은 황제가 편할 대로 하라고 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알아서 해라’라는 말을 완곡법으로 받아들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단발이 편해서였는지, 여하튼 그동안 고이 길러왔던 댕기를 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댕기 동자의 시대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계의 새로운 패션, 단발
1930년대 활약한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김기림은 근대 초기 한국의 역사를 ‘단발의 시대’라고 선언한다. 남들은 스포츠니, 스피드니, 센스니 떠들 때, 김기림은 과감하게 단발이야말로 근대 초기 한국 사회를 주름잡았던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단발은 하나의 사건을 떠나 조선반도를 들썩이게 했던 대단한 유행이었다.
100년 전 단발과 복장개량은 구시대의 관습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서양식 복장을 입은 것은 단지 서구의 유행을 추종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런 부류들도 있긴 했다. 그러나 몸의 외피를 바꾸는 일이자 끈질기게 내 몸을 구속했던 제도적 관습을 벗어나는 적극적인 행동이 바로 단발이었다. 단발은 머리 모양을 바꾸는 행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혁명과도 같은 폭발력을 지닌 의식이었으며, 전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처음부터 신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이 단발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신들의 모습을 바꿨다. 단발을 하고 도포를 벗어 던지는 것이 문명개화된 학생의 상징이었고 또한 그것이 문명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행동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장발의 전통이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국가와 학교 그리고 계몽가들은 학생들에게 단발을 하라고 연일 목소리를 높였으나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정은 자식들의 단발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이로 인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행여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먼저 단발을 한 친구의 독려로 머리카락을 잘랐지만, 쉽게 집으로 들어갈 수 없는 학생들도 많았다. 날이 저물어서야, 부모 몰래, 그것도 벙거지를 쓰고 집으로 들어가는 일일 비일비재했다.
앞에서도 잠시 얘기했듯이 단발은 일종의 의식(儀式)이었다. 그것은 양반과 상놈의 구별을 없애주는 상징적 행위이기도 했고, 야만인에서 문명인이 되는 계기이기도 했으며, 변화된 신체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설렘, 매혹, 공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행동이었다. 단발은 그저 머리카락을 짧게 깎았던 것이 아니라 아예 ‘삭발’에 가까웠다. 상고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바르는 단발은 고급에 속했고, 대부분의 학생은 머리를 빡빡 밀었다. 듬성듬성 이가 빠진 바리캉이 청년들의 머리털을 쥐어뜯는 동안 주위의 친구들은 그들의 단발을 독려하며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무쇠골격 돌 근육 소년 남자야. 문명의 정신을 잊지 마라. 우리는 덕을 닦고 지혜 길러서, 문명의 선도자가 되어 봅시다.’
신체검사, 신체를 도표 속에 감금하다
단발도 복장개량도 크게 보아서는 위생의 문제였다. 위생의 문제는 겉모습만 문제 삼지 않았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잠자는 것, 머리 감는 것, 목욕하는 것, 운동하는 것 등등.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였다. 더구나 미래를 이끌어갈 새 시대의 주인인 학생들의 건강은 곧 국력과 비례한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세심하게 관리되었다. 학생들은 정기적으로 신체검사를 받았다. 요즘 학생들에게 음란사이트와 인터넷 게임이 크나큰 문제였다면, 당시 학생들에게는 호환과 마마 같은 질병이 문제되었다. 질병, 특히 전염병을 예측하기란 아직 쉽지 않았던 시대였다.
1907년과 1909년 콜레라 기승을 부릴 무렵 정부에서는 각 학교에 의사들을 보내 학생들의 신체검사를 일제히 한다. 지금처럼 몸무게, 키, 시력 등을 측정하여 수량화하는 게 아니라 질병의 유무를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1910년 일본에 의해 한국이 강제병합 되면서 신체검사의 모습도 크게 바뀌었다. 현재의 신체검사와 비슷한 모습이 당시에 연출된다. 1913년 4월 조선총독부 훈령 제24호로 공포된 법이 있다. 일명 ‘관·공립학교 생도 신체검사 규정’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법령을 근거로 매년 4월에 학생들의 신체를 검사했는데 항목은 모두 11개였다. 키, 몸무게, 가슴둘레, 척주(脊柱), 체격, 시력, 눈병, 청력, 귓병, 치아, 질병이었다. 질병 검사의 항목은 영양불량, 빈혈, 선병(腺病), 각기(脚氣), 폐결핵, 두통, 신경쇠약, 비질(鼻疾), 인후병, 전염성 피부병, 기타 만성질환이었다.
근대 초기 각 학교에서 학생들이 신체를 조사한 건, 문명국가 건설과 부국강병책을 위해서는 자라나는 학생들의 건강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체력은 곧 국력’이라는 모토가 작동했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때 실시된 신체검사는 황국의 건강한 ‘신민’을 육성하려는 방책이었다.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결국 학생들의 몸은 국가에 의해 표준화되고 검사되고 관리되었으며, 그렇게 한 국가의 국민으로 길들여져 갔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체력장’을 실시한다. 그 무시무시한, 입학시험보다 더 공포스러운 체력장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입학시험에 합격이 되어도 체력장을 통과해야만 상급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체력장의 종목은 질주력(疾走力), 도약력(跳躍力), 투척력(投擲力), 운반력(運搬力), 현승력(懸乘力) 이었다. 일명 100미터 달리기와 3000미터 달리기 그리고 멀리 뛰기와 멀리 던지기가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식민지시기에 만들어진 체력장이라는 제도는 시대를 뛰어넘어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들어서면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