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당 전경)
최효찬 | 경향신문 기자
주도적인 사람으로 살아라
구약성서에 노예로 팔려가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창세기 37:2)의 이야기가 있다. 요셉이 노예가 된 경위는 이렇다. 그는 어려서부터 꿈을 잘 꾸었다. 그는 11명의 형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는 이것을 형제들에게 이야기 했다. 평소에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요셉을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그의 형제들은 결국 요셉을 이집트 노예로 팔아버렸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의 꿈이 언젠가는 현실이 될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련은 계속됐다. 그는 여인의 유혹을 뿌리친 죄로 감옥에 갔다. 그곳에서도 미래를 준비했다. 감옥 관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에게 기회가 왔다. 파라오의 관리인 두 명이 자신의 꿈을 해몽해 달라고 요셉에게 요청한 것이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몽해 주고, 감옥에서 나가거든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느 날 파라오가 꿈을 꾸었다. 그 꿈이 하도 불길해서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해몽가들을 불러내었다. 아무도 파라오의 꿈을 해몽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꿈을 해몽한 관리가 요셉을 기억해내고 파라오한테 소개해 주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몽해 주었다. 그것은 이집트에 7년의 풍년과 그 이후 7년의 흉년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파라오는 요셉의 지혜를 높이 사 그를 이집트 총리로 발탁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서도 항상 잊지 않고 지낸 것이 있다. 그를 버린 그의 가족들이었다. 형들은 그를 버렸지만, 요셉은 가족들을 항상 마음에 품고 지내왔다. 흉년기간 요셉의 형들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요셉은 형제들을 만났고, 그들을 용서했고, 도움을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주도적인 사람은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닌다.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주도적이 되라'는 명제를 던지면서 요셉의 에피소드로 주도적인 삶을 강조한다.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해 다른 사람들 혹은 주위 여건이나 제약조건들을 원망하기 쉽다. 하지만 요셉과 같이 주도적인 사람은 자신의 생활을 통제하고, 자기 자신과 '될 수 있다'는 결의에 노력을 집중한다. 이를 통해 주위 상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을 만든다는 것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고난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삶을 그리고 있다. 이에 대해 코비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요셉과 같이 자기 삶을 주도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당부한다.
15년을 유배를 당한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삶을 주도적으로 살다간 선비였다. 유배기간의 '강요된 은둔'은 주옥같은 시를 쓸 수 있게 했고, 나아가 세상을 더 밝히는 수많은 저서들을 낼 수 있었다. 고산과 같이 세상은 개인의 불행과는 별개로 '은둔의 미학'으로 다른 삶들을 밝히기도 한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복귀와 함께 장관직에서 해임된 이후 죽는 날까지 15년 동안 은둔하면서 <군주론>과 <로마사론> 등 역작을 남겼다. 물론 그 와중에 현실정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군주론> 등을 헌정하면서 끊임없이 메디치가에 구애를 보냈지만, 메디치가는 끝내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이게 오히려 마키아벨리에게는 사후에 더 명예로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소신을 가진 선비형 정치가
고산은 조선이 풍전등화의 시대였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살았다. 17세기는 당파싸움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이전투구의 세상에서 벼슬길에 갓 오른 고산은 30세에 광해군 당대의 권력자 이이첨의 죄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당한다. 당시 고산이 상소문을 짓고서 그 피해가 관찰사였던 부친(윤유기)에게도 미칠 것을 알고 먼저 보여주니 아버지는 울면서 만류하다가 결국 자식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예측한 대로 부친도 자식의 귀양과 함께 삭직 당하여 불운한 여생을 보내야 했다. 고산은 37세 때(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취임했다. 봉림대군(효종)의 사부를 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중인 51세 때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보길도에서 은거를 시작했다. 52세 때에는 대동찰방과 사도시정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 집권세력(서인)이 대궐로 돌아온 임금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고해 고산은 경북 영덕으로 2차 유배를 당했다. 74세 때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상소를 올렸다가 다시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다. 그의 생애 세 번째 유배였다. 고산은 81세에 이르러서야 왕의 특명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해남을 거쳐 보길도에 들어 은자 생활을 하다가 85세 때 부용동에서 세상을 떴다. 고산의 유배기간은 총 14년 7개월이나 됐다. 요즘에는 고산 윤선도와 같은 소신 있는 선비형 정치가를 만나볼 수 없는 현실에 비춰보면 고산이 살벌한 당시 정치풍토 속에서 얼마나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자녀를 문화의 바다에 빠뜨려라
고산은 유배 등 정치적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학문세계를 구축했다. 그게 바로 고산가의 박학다식의 가풍이다. 고산은 당시의 사대부로서는 감히 다루기 어려운 의학, 천문, 지리, 점성술, 음악, 미술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이러한 학문을 연구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이를 직접 응용하였다. 고산은 한의학에 정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약을 처방해 주기도 했다. 또 당대의 뛰어난 풍수가이기도 하다. 그만큼 당시 양반들이 천시하던 분야에도 남달리 열정을 가지고 공부를 한 실용적인 학자였다. 당대에 이름을 날린 학자들은 대부분 유년시절이나 청소년시절에 큰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모들의 각별한 자녀교육의 지침 속에서 '훈육'되는 게 조선시대 양반가의 가풍이었다.
그러나 고산은 11살 때 산사에 들어가 책을 읽었으며 특별히 어느 스승으로부터 배운 바가 없이 독학하였다. 이는 다른 명문가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그래서인지 고산은 주자학뿐만 아니라 실용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해남 윤씨가의 독특한 가학으로 전승된다. 고산의 학문세계는 그의 후손들에게 삶의 지침과 등불이 되었다. 바로 그의 주도적인 삶이 교훈이 되고 가르침이 되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불우한 생을 산 고산은 후손들에게는 가능하면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말고 대신 실용적인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그래서 고산이 살던 녹우당은 풍수지리학, 의학, 천문학, 병가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접할 수 있는 국내의 유일의 '잡학 도서관' 역할을 했다.
녹우당에는 공재 윤두서가 그림 공부하는데 교본으로 이용한 <고씨화보>를 비롯해 중국 고천문서인 <관규집요> 등 외서들이 즐비했다. 후손들은 녹우당에 있는 수많은 서적을 보면서 자신의 갈 길을 찾았다. 또 소치 허련 등 해남 주변 사람들도 찾아와 인생의 길을 열어나가는데 등불이 되어주었다. 고산의 가르침대로 후손들은 당시 엄격한 양반질서에서 잡학이라고 천시하는 의학, 천문학, 점성학, 기술학, 미술 등을 대대로 공부했다. 고산과 같은 대학자이자 시인을 배출한 집안에서 윤두서-윤덕희-윤용 등 3대에 걸쳐 화가가 나왔던 것이다.
고산가 자녀교육의 핵심은 시대에 앞서 실용적인 학문에 힘쓰고 자녀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을 줄 정도로 다양한 학문의 세계에 접하게 하면서 '문화의 바다'에서 뛰놀게 한 데 있다고 하겠다. 시·서·화에 독보적인 재능을 발휘해온 고산가의 가풍은 400년을 뛰어넘어 그 후손들에게도 드러나고 있다. 고산의 14대손인 윤형식의 딸은 대학을 마치고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의 손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집을 내기도 했다. 고산에서 시작된 박학다식의 유별난 가풍은 그 후손들을 문화의 바다에 빠지게 했고, 그러한 가풍은 대대로 그 향취를 더하며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재물이 쌓인 후엔 명예 추구
명문가의 생성과정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명문가는 변증법적이고 진화론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지속적으로 명가의 지위를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상당한 재산가의 반열에 오르고, 이어 이러한 '물질적 부'를 바탕으로 지역주민들에게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면서 신망을 얻게 된다(先財後名). 이후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큰 인물이 나오면서 한 가문의 '정신적 부'를 이룬다. 그리고 물질과 정신이 합쳐져 지속적으로 자긍심 높은 가문과 인물을 배출하면서 명문가를 대대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일종의 정(물질)-반(정신)-합(물질과 정신의 총합으로서의 명가)의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산가의 경우도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해남 윤씨가의 가문을 초석을 쌓은 가문의 기획자가 윤호정(1476∼1543)이라면 그의 고손인 고산 윤선도는 명문가로 위상을 드높인 인물이다. 해남 윤씨는 상속재산으로 갑자기 거부가 된 윤효정 이후로 인재들을 배출하게 된다. 13세에 해남의 갑부 해남 정씨 집으로 장가든 윤효정은 처갓집의 재산을 상속받아 갑작스럽게 부자가 되었고, 윤효정의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서부터 해남 윤씨는 명문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거부가 된 윤효정은 먼저 어려운 지경에 이른 백성들을 3번이나 구제해 주면서 지역민들로부터 신망을 얻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윤효정을 비롯해 해남 윤씨가는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근검과 함께 적선은 녹우당에서 지금도 후손들이 집안의 제1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가훈이다. 해남 윤씨가는 윤효정의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하고 이어 고산 윤선도까지 5대에 걸쳐 연속 과거급제자를 배출하면서 호남의 명문가이자 최고의 재력가로 부상했던 것이다. 이어 고산에 이르러 학문에 제한을 두지 않고 미술과 천문학, 의학, 점성학 등에까지 다양하게 연구하는 가풍을 세우는 등 자녀교육의 원칙과 가학의 전통이 세워지게 된다. 즉 명문가는 한대에 걸쳐 이루어지지 않고 최소한 3대에 걸친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고산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 집안의 학문적인 취향이 오랜 세대에 걸쳐 지속되면 가학의 전통으로 훌륭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대로 수집된 수많은 서적들은 후손들에게 '지성의 바다'에 빠져들게 하는 향기로 작용한다. 이 향기는 가문 구성원들에게 절제심과 자긍심을 높여주는 촉매제가 된다.
한편 재력이 넉넉한 부자가문에 태어난 경우 그 자손은 유유자적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다. 더욱이 재능을 타고났다면 가문을 빛낼 인물로 성장하기도 한다. <논리철학논고>를 쓴 분석철학의 대가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는 평생 경제적인 문제에 고민하지 않고 대학교수도 싫다며 시골에 은거하면서 학문적 성공을 일궈낸 인물이다. 188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장 부유한 철강 재벌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대 교수직도 버리고 노르웨이의 조용하고 경치 좋은 곳에 오두막을 짓고 은둔하며 철학적인 사유에 집중하며 살았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천재적 재능이 있었겠지만, 부모의 재력이 없었다면 과연 교수직을 내던지면서까지 생활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역시 거액을 상속받은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은 그에게 오히려 짐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문가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경제력을 꼽을 수 있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훌륭한 인물이 탄생하기까지 눈물겨운 후원 스토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천하제일가문으로 꼽히는 공자의 경우 후원자로 72제자의 한사람인 자공이 있었다. 만약 자공의 지원이 없었다면 평생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공자가 생업을 돌보지 않고도 위대한 사상가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칼 마르크스 역시 엥겔스라는 평생 후원자가 없었다면 <자본론>과 같은 책이 햇볕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명가의 지속을 위한 3가지 조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자전적인 소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통해 한가문의 흥망사를 다뤘다. 여기서 토마스 만은 변증법적이고 진화론적인 가문의 성장과정을 체험적으로 들려준다. 소설에서처럼 한 가문의 흥망성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토마스 만은 1875년 독일 뤼벡에서 부유한 상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의원을 지내는 등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토마스 만은 1901년에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형 하인리히 만도 작가로 명성을 날렸다. 여기까지는 한 가문이 진화론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명가의 재생산 단계에 접어드는 듯하다. 경제력에 이어 큰 인물을 배출한 것.
그러나 토마스 만의 가문은 이후 그의 아들 클라우스와 미카엘의 잇단 자살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장남 클라우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설가가 되었지만 문학적으로 아버지만큼 성공하지 못해 고통을 겪었다. 작가로서의 명성은 얻었지만 끝내 그는 자살했다. 이와 같이 명가로의 도약과 지속적인 확대 재생산은 결코 쉽지 않다. 잘 나가던 가문도 몇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쇠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문호인 괴테가도 괴테가 귀족의 반열에 올랐지만 손자대에 이르러 가문이 끊겼다. 지속적인 명가의 재생산은 가문 구성원들의 절제심과 함께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류 역사에서 명멸한 수많은 명가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특히 최소한 3대 이상에 걸친 노력 없이 명가로 도약하기 힘들다. 경제력을 지닌 것만으로도 안 된다. 나눔과 베품의 실천을 통해 이웃들로부터 신망을 얻어야 한다. 자녀교육을 통해 절제심을 지닌 인물을 배출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적어도 이러한 3가지의 기본조건을 충족시킬 때 명가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자녀교육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